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환경에 대한 생각(The Notion of Environment)

복잡한 자아 개념에 대한 바이어블한 분석을 방해했던 가장 심각한 장애는, 필시, <경험 주체와 그것이 경험하는 대상 사이 이분법을 유기체와 그것의 환경 사이 이분법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 전통적 전제(當然視)일 것이다. 다른 유기체들이라 우리가 칭하게 되었던 그러한 아이템들을 우리 경험 장에서 관찰할 때, 물론 우리는 그들의 ‘환경’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앞서 논증한 것처럼, 유기체와 그것의 환경을 구별하는 것은 오로지 관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관찰된 유기체의 환경이란, 고로, 관찰자가 유기체를 격리해냈던 관찰자 그 자신의 경험 장이다. 그 유기체 자신은 그 자신의 외부 아이템들이나, 심리학자들이 칭할, 말초(末端) 데이터에는 접근할 수 없다.

  

    <우리의 경험적-실재(現實)을 조성하는 지식, 우리의 세계 그림은,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한 조각 한 조각씩 구성한다>는 점을 우리가 당연시할 경우, 또한 이때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우리 그림/지식도 반드시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세계라는 특정 모델을 구성하고 그것을 외재화(外在化)시키고, 이어 그 실존이 우리 행하기와 독립된 것인 양 그것을 다루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자아라 부르는 것에 대한 특정 모델을 구성하고, 그것이 여타 물(物)들 가운데 특정 물(物)이 될 수밖에 없도록 그것을 외재화시킨다 (Piaget, 1937, pp.7 and 82).

 

    이러한 구성은, 명백히, 많은 단계들을 밟으며 성취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무엇이 구성되고 있는지 물으며 시작하자. 

 

    자아 개념이 친숙한 맥락이나 일상 언어에서 지시될 때, 그것은 아주 단순하게 보인다. 통상, ‘나는 그 모든 걸 나 혼자 했어’ 또는 ‘내가 그런 처지라 나로서도 어쩔 수 없어’과 같은 표현들에서 문제될 것은 없다. ‘너는 너’ 그리고 ‘나는 나’와 같은 다소 독특한 표현들도, 게르트루드 쉬타인(1874–1946)의 ‘장미는 장미는 장미’ 만큼 독특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진술을 만들 때 명백히 맘에 두는 것은, 개체 동일성 또는 특정 인물의 연속성이다. 그럼에도, 정확히 우리 자아들의 연속성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분석하려 하자마자, 우리는 곤란들에 부딪히게 된다. 다의성(模糊性)은 피할 수 없다: 경험적 자아조차도 여러 외관들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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