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확실성(certainty, mathematical)

        수학적 확실성

 

절차들 꾸리기라는 개념적 깜냥은, 수학적 지식의 확실성에 관해 끝임 없이 드는 의혹의 신비감 또한 제거한다. 2 + 2 = 4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앞(2장)에서 말했을 때, 내가 그 근거로 든 것은 세기 절차와 수 단어 시퀀스(順序)에 대한 합의(合意)였다. 그렇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특정 숫자(또는 수 단어)는 단위들로 이루어진 특정 여럿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하지만, 단일 아이템들에 대한 지각이란, 실제로, 자주 미심쩍은 것일 수 있다는 이의(異議)가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수들에 대한 산술 조작(演算)들의 결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 그것은 삼단논법에서 결론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이다. 

 

    앞 절들에서, 내가 논했던 것들은, <시각 또는 촉각 장(場)에서 대상들 격리하기, 그 격리가 이행되고 있는 사이 조작들 정렬(整列)하기, 그리고 변함없이 계속되는 주의의 이동으로 특정 선(軌跡이나 境界, 그래서 模樣) 생성(生成)하기와 같은> 통상적 비수학적 활동들로 형성된 경험적 원자재(原材料)를 사용해, 생각하기 주체는 수학적 기초(初等) 개념들을 추상할 기회들을 얻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 당혹스런 질문에 대면하게 된다: <그와 같이 명백히 오류 가능한 행위들에서 어떻게 수학적 추리가 산출하는 확실성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수수께끼에 대한 그러한 모델의 대답은 <추상적 개념 수의 구성에서 모든 감각 소재는 제거된다>는 사실에 있다. 비록 수들, ‘1’, ‘2’, ‘3’, 등등이 처음에는 경험적 사물(事物)들의 도움으로 구상되었다 하더라도, 그들 감각 속성들은 추상의 두 단계, 단위들 추상과 단위들의 단위들 추상을 거치며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추상적인 것들을 조작(演算)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정말 추상적인 것들인지 그리고 감각적 지각의 오류가능성과 더는 상관없는지 하는 의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는, 삼단논법의 연역적 절차에 우리가 부여한 확실성과 유추적이다. 전통 교과서에, 이를테면, 우리가 틀린 것으로 여기는 ‘모든 사람은 불멸(不滅)한다’를 대전제로, 이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를 소전제로 하는 삼단논법이 쓰여진 경우, 우리는 명백히 틀린 결론인 소크라테스는 불멸한다를 얻는다. 여기서, <이러한 결론, 역시, 모든 인간의 필멸(必滅)을 단언하는 더 그럴법한 대전제를 갖고 시작할 때 얻어지는 그것의 역(逆)과 마찬가지로 확실하며 논리적으로 ‘참’이다>라는 걸 알아차리는 가운데 앞서 언급한 수수께끼가 생겨난다. 

 

    삼단논법의 전제들은 반드시 ‘가설들’로 간주되어야 하고, ‘만약’을 앞에 붙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경우, 그 수수께끼는 사라진다. 그 전제들이 경험 세상과 맺는 사실적 관계는 논리학의 형식적 기능과는 무관하다. 그것들을 ‘처럼’ 명제들로 간주함으로써, 우리는 잠시 그 절차 단계들이 이어지는 동안에만은 그것들을 의심할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한다. 고로, 그 결론의 확실성이 생겨나는 것은, <그 전제들로 명시된 상황들은, 단정(假定)된 것들이기에, 해서, 그 절차 과정에서만은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서다. 

 

    산술에서 2+2의 확실성과 유추(類推)는 다음에 있다: 상징 ‘2’는, 수 단어들 ‘하나’와 ‘둘’이 각각 할당된 2개의 추상적 단위들로 조성된 개념 구조를 표현한다. 상징 ‘+’가 요청하는 것(操作)은, 그 왼쪽 단위들에 그 오른쪽 단위들을 한 줄로 이어붙이고 그것들을 새로이 세는 일이다. 표준 수 단어 시퀀스는 정해져 있고 세어지고 있는 아이템들은 의심 가능한 감각적 사물들이 아닌 추상적 단위들이기에, ‘넷’으로 끝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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