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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과 내용(form and content)

        형식과 내용

 

형식과 내용 사이 구별은 서양철학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용어들은 허다하게 다른 방식들로 쓰여 왔다. 삐아제의 구별 방식이 복잡해지는 것은, 그 구별을 ‘관찰 가능한 것들’(내용)과 ‘정렬들’(형식)에 대한 용법과 연결 짓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다. 

 

형식과 내용의 기능들이 상대적인 것은, 모든 형식은 자신을 담는 또 다른 형식의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Piaget et al., 1977a, Vol 2; p.319) 

 

    이것이 말이 되는 단 하나의 경우란, 삐아제한테는 지각물, 관찰 가능한 것, 그리고 여하한 대상 지식도 모두 주체 행위의 결과지 수동적 수용자의 외부에서 야기된 결과의 적재(積載)가 아님을 상기(想起)할 때뿐이다. 그의 이론에서, 지각, 상기, 재연하는 그리고 정렬하는 일이 모두 역동적이라 말하는 것은, 내적으로 이용 가능한 소재를 조작해 일정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이행한 활동들이란 의미에서다.

 

    고로, 용어 ‘외생적’ 같은 경우, 결코 물리적 유기체와 관련해서 물리적으로 외부에 있다고 가정된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는 해석될 수가 없고, 그 대신, 어떤 것이 방금 수반되어 들어가는 과정에서 그 과정과 관련해서 외부의 그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관찰과 재연은 두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 그것들은, 주시된 그 과정과 관련해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 아이템(項)들을 조작한다. 목하 그 과정은 그 아이템들을 요소들로 취하고, 이것들은 ‘내용’으로 정렬되어 새로운 ‘형식’ 또는 ‘구조’가 된다.

● 새로운 산출 결과들은, 장차 구조화 과정에서 ‘내용’이 되는 것과 관련해, 최초 ‘주어진 것들’로 취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일단 특정 과정이 성취된 후 그 결과들은, 후속 정렬 과정 또는 더 높은 분석 수준과 관련해, ‘관찰 가능한’ 또는 ‘외생적’인 것들로 간주될 수도 있다. 

 

    삐아제가 보았던 것처럼, 이는 무한 역행(退行)을 야기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ibid., p.306), 그는 이러한 생각(觀念)을 반박하는 최소 두 개의 논증을 제시했다. 그 중 하나는 과학적 분석에 대한 그의 구상에서 나온다. 자신의 이력 아주 초창기에, 그는 이러한 과학적 분석을 일종의 순환 프로그램으로 보았다; 과학의 한 분과에서 추상된 일정 요소들은 다른 분과에 주어진 것들이 되어 정렬과 추상에 사용된다. 초기 논문(Piaget, 1929)과 약 40년 후 ‘과학의 분류’ (Piaget, 1967a, 1967c)에서, 그는 과학 분과들의 이러한 호상간 상호의존성을 닫힌 변화 사이클로 정식화했다: 생물학->심리학->수학->물리학, 다시 생물학으로 도는 폐회로. 삐아제 조망에서, 끝(終結)없이 나아가는 선형(螺旋形)적 진보(前進)란 있을 수 없다; 그저 한 분과의 새로운 정렬과 개념 창출을 야기하는 다른 분과의 방법과 개념들의 발달만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의 개념적 골조에 가한 분자와 입자 물리학의 최근 충격(影響)은 멋진 보기일 수 있다 (하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연구비가 현대 물리학 개념들이 수학 개념들의 도움으로 심리적 선점책(先占策)에서 발전했던 방식에 대한 연구에 제공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추상들의 무한 역행 사고를 반박하는 두 번째 이유의 근거는 발생적 인식론의 발달 기초에 있으며, 여기 논의와 직접 관련된다. 아이의 인지 이력은 의심할 바 없는 발단(發端)을 갖고 있다: 말인즉, 유아가 출발하며 지닌 것과 같은 그러한 고정된 행위 패턴들(반사들)에 모든 경험을 동화시키는 또는 동화시키려 하는 최초 발달 시기를 갖고 있다 (Piaget, 1975, p.180). 초기 고정성을 제외한다면, 이들 행위 패턴들은 아이가 바로 뒤이어 확장하는 경험에 기초해서 정렬시키기 시작하는 스킴들과 비슷하게 기능한다 (3장을 보라).

 

    유아의 감각운동 시기(즉, 아이의 첫 두 해) 초반, 동화와 조정은 알아차림과 의식적 반성 없이도 벌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너 달 먹은 젖먹이들이 (관찰자들한테는, 모두 똑같지 않은) 아이템(項)들을 특정 스킴의 촉발자들로 동화시킨다는 사실은 때때로 일반화 능력으로 기술되고 있다 (동물 심리학자들은, 쥐 혹은 원숭이들과 같이 작업한 후, 이 능력을 ‘자극 일반화’라고 부른다). 감각운동기 조금 나중에서야, 반성은 작동하기 시작해, 주어진 특정 스킴에서 기능하는 경험 아이템들을 기능하지 않는 여타 것들과 차별하기 시작한다. 그와 같이, 일종의 메커니즘이 개시되는 바, 그것은 실험관찰적 추상들의 원천을 갖추고 있으며, 생겨난 실험관찰적 추상들은, 경험된 아이템들이 실제 제시되지 않고 있을 때, 아이가 자신한테 그것들을 재연(再演)하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불가피하게, <행하기 주체의 알아차림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수반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문제가 긴급한 까닭은, 우선, 로크가 단어 ‘반성’을 인간(科)학들에 도입한 이후, 이 단어에는 반성하기를 하는 의식적 마음이 함축되는 경향(傾向)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삐아제가 ‘형상적’과 ‘조작적’을 구별한 많은 곳에서, 그 단어가 조작적인 것들에는 의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는 바들(傾向)이 있기 때문이다 (조작적인 것들에 대해, 로크와 삐아제 모두 ‘마음이 그 자신의 조작들 반성하기로 주워 모은 관념들’이라 기술했다). 이 문제는, 따라서, 삐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에서 의식적 반성 깜냥이 제기될 때, 푸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삐아제는, 내가 다른 곳에서(Glasersfeld, 1982) 말한 것처럼, 해당 구절에서, 자신의 관찰들(관찰자 관점)에서 수집하고 있는 것을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관찰된 주체의 조망에서 특정 자율적 견해를 추측(構成)하고 있는 것인지, 명시한 경우는 거의 없다 (Vuyk, 1981, Vol. 2를 보라). 이러한 차이는 심적 조작들에 대한 모델 만들기에 결정적이며, 고로, 그의 추상 이론 그리고, 특히, 반성적 추상 이론 이해하기에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다. 나는, 다음 절 이후, 이러한 의식에 대한 문제를 다시 거론할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나는 삐아제가 구별했던 추상의 상이한 종류들을 펼쳐보이고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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