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행동주의(behaviourism)

1.

독자들은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행동주의(behaviourism)에 반대하는 것에 놀랄 것이다. 이미 죽은 말에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행동(行態)주의가 운동으로서는 한물갔지만, 행동주의의 중심 개념들은 심리학과 교육 두 분야 모두에서 변함없이 그리고 대단히 활발하다는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한 개념들에 매달린 이들은 필시 구성주의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얻을 것이다.

 

 

2.

조작들에 입각해 개념을 정의하는 아이디어는 미국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퍼시 브리지먼한테서 유래하는데,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필수 핵심 개념들을 분석하는 맥락에서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켰다(Bridgman,1927). 불행히도, 브리지먼의 ‘조작주의’는, 심리학에서 행동주의 운동에 맞게 차용되었고, 물리적 측정 조작에 집중된 발췌문들을 비판 소재로 삼는 철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았다. 개념의 심적 구성에 관해 브리지먼이 말했던 것은 그 어디서든 무시되었다. 

 

 

3.

유럽을 떠났기에 그리고 심리학의 배경 지식이 없었기에, 문제가 무엇인지 찾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967년과 그 후 10년 동안, 미국에서 심리학, 언어학 분과들의 만연한 지적 분위기는 행동주의의 강한 지배하에 있었다. 스키너는, 1977년 말쯤, ‘인간 행동은 일종의 함수이며, 그 변수들은 환경에 있다’(Skinner, 1977, p.1)라는 주장을 되풀이 강조했다. 그런 류의 결정론을 믿을 경우, 누구한테든, 마음 구성에 대한 이론이 차지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 여하튼, 환경 결정론에 대한 믿음은, 객관적 환경에 접근할 수단이 있어 그 환경의 특정 조각이 특정 행동의 원인임을 보여줄 수 있을 때만 통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 또는 진정으로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 자신의 환경이라 범주화한 것, 그리고 이어 관찰된 행동과 인과적으로 관계 짓고 있는 것은, 언제나 관찰자 경험 영역의 일부이지 독립된 외적 세상이 아니다.

 

 

4.

이와 같은 삐아제 접근을 행동주의의 자극–반응 접근과 물리학자들의 선형적 인과 사슬들 모두와 근본적으로 차별짓는 것은, 행위 스킴들의 명확한 목표–지향성이다. 삐아제가 틈나는 대로 주장했던 것처럼, 행위 스킴이 피드백 루프(되먹임 폐회로)와 상당히 유사한 까닭은, 그것에 고유한 동화와 조정의 이중 메커니즘들은 그것을 자기–규제(自律)토록 하기에, 고로, 그런 의미에서 순환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흡사한 사이버네틱스는 8장에서 다룰 것이다). 

 

 

5.

개념 구조와 그 언어 표현 사이 관계는 이태리 조작주의 학파 마음에도 역시 있었으며, 의미 분석에 대한 케카토의 방법은 구성론적 이론 발달에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개념적 의미론’이라 불렀고 기계 번역 작업에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그것은 비인습적(非因習的) 방법일 뿐 아니라 언어학의 통상 관행과도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에 대한 적절한 자구적 정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특정 개념 획득에 필요로 되는 심적 조작들을 명시하는 ‘레씨피’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브리지먼의 조작적 정의라는 아이디어의 정교한 응용이었다. 일종의 심적 행태 분석이라 말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현행 용법(current usage)으로 생각할 경우, 이는 부작용이 야기될 것이다. 

 

내가 20세기 마지막 25년간을 살았던 미국에서, 심리학은 그 자신을 행동과학으로 정의하는 선택을 했으며 – 행동이란, 왓슨과 스키너의 추종자들이 파괴적 성공들로 설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유기체가 하는 일이다. 행동(行態)주의 창립자들은, 요지부동으로, 과학의 관심 대상일 수 있는 관찰 가능한 것들 너머에는 여하한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전적으로 행동에만 집중하며, 행동(行態)을 관찰 가능한 [표정, 소리, 냄새, 몸짓과 같은 몸으로 드러내는, 자극에 대한 모든] 반응들로 정의하는 것으로, 지적 유기체의 더욱 복잡한 깜냥들 다루기는 쉽게 피해간다. 여태껏, 행동주의 심리학은 그저 비둘기와 쥐의 행동에 대한 국부적 모델들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삐아제 역시 심리학을 행동(行態)에 대한 과학으로 묘사했지만 (3장을 보라), 그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삐아제한테 행동이 중요했던 까닭은, 관찰자는 종종 타자의 행동에서 그 마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마음 기능하기가 그의 최우선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6.

20세기로 넘기 직전 존 듀이는 썼다: ‘성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심적 경험의 본성과 기원에 관해 자신들을 끊임없이 속이고 있다’ (Mclellan and Dewey, 1908, p.27). 그의 작업의 대부분은 기만들 까발리기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추세는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도래한 것은 행동(行態)주의 시대였다. 행동주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하나는, 그 신조의 그토록 많은 지도자와 추종자들이 자신들을 경험론자로 주장하며, 그들 선조로 존 로크를 인용하고, 그리고 이리하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로크의 주저(主著)인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II권 1장을 지나치지 않고 읽었다면, 아주 놀랄만한 것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언어적 상호작용들

 

1. 

 

‘개념’과 ‘재인 패턴’ 사이 구별은 발달적이자 기능적이다. 그 재인 패턴은 앞서 형성된 것으로 특정 행위가 구체적 지각물과 함께 정렬, 발동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자극–반응 메커니즘과 같은 행동(行態)주의 개념으로 적절히 묘사, 기술될 수 있는 모든 현상들의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길을 건너며 연석 너머 차도로 한 발 디딜 때, 앞서 발걸음보다 발을 높이 들어올린다. 연석을 개념적으로 알아차릴 필요 없이, 지각 시스템은 감각 패턴을 알아보고 과거 ‘바이어블’한 것으로 입증된 운동 프로그램을 촉발시킨다. 삐아제 용어로, 그 시퀀스(配列)는 ‘연석 통과하기 스킴’이다. 우리 일상의 수많은 행위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기능하며 여하한 개념적 수반도 요청하지 않는다 – 그렇다고, 이로써 행동주의의 전제(當然視), <개념들은 실존하지 않는다>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재인 패턴이 개념과 병합되는 경우는, <그 자신을 특정(特定)하는 감각 신호들 없이 그리고 행위 촉발하기 없이>, 자발적으로 또는 단어로 인해 불려나올 때다. 

 

 

 

2.

‘소리–이미지’와 ‘재인 패턴’ 사이 구별은 유추적이다. 구체적 청각 신호들을 특정 언어의 단어로 알아보도록 하는 재인 패턴은, 그 단어를 발화(發話)로 산출하도록 하는 소리–이미지의 재현(再現)보다 앞서 형성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는 언어학자들이 구별하는 능동적 어휘와 수동적 어휘의 차이로 파악된다. 도식의 오른쪽 배치가 왼쪽의 거울 이미지인 것은, 훈련이나 관행(習慣)에서 생겨나 명령 권능의 기저를 이루는 자극–반응 경로가 한 번 더 있기 때문이다. 양쪽 경로의 요소들 사이 여하한 차이도 없는 것은, 오른쪽에서, 촉발자가 (언어학으로 특정된 소리인) 음소(音素)들에 대한 청각 경험이라는 사실이 문제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경험과 연결되었던 반응으로서 특정 행위는, 음소들뿐만 아니라, 사전에 훈련되었다면, 몸짓, 빛 신호, 또는 깃발로도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역할

 

1.트레이닝보다는 가르치기에서,

 

인간은, 그저 훈련되어 망가진 나머지 기계적으로 지시받는 존재가 될 수도, 정말 계몽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개와 말을 훈련시키듯, 인간 역시 훈련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훈육이 잘되는 일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생각하는 걸 배우는 일이다. 그 목표는 모든 행위들이 비롯되는 원리(原理)들이어야 한다. (Kant, 1803, Werke, vol ix, p.450)

 

칸트 시대, 이는 양자택일로 보였던 것 같다. 우리는 행동(行態)주의 운동이 합리적 계몽의 경로를 제거했던 업보(反理性主義)를 안고 있다. 환경–자극들과 보상–강화에만 전적으로 집중함으로써, 행동주의는 생각하기(思惟)에 대한 관심을 효과적으로 지워버렸다. 성과(成績)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그 결과로, 학생들한테 고작 교사가 말하거나 교과서에 있는 것을 상기할 것만을 요구하는 시험들을 계속해서 시행하고 있다. 그런 시험들은 이해하기가 아닌 기억과 암기 학습을 검사한다. 이해하기는, 마음과 의미처럼, ‘전–과학적, 유심론적’ 허구로 간주되었다 (Skinner, 1971, pp.12–23를 보라). 

 

구성론의 관점에서, 행동주의의 ‘자극’과 ‘강화’라는 생각들은 순진(素朴)하며 기만적이다. 그렇지만, 행동주의 운동은 수십 년 전 엄청 강력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육자들 마음에 아직도 살아 활동하고 있다. 고로, 행동주의의 이들 기본 용어와 관련해서 우리의 개념적 차이들을 논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2.

행동주의 도그마는, 그럼에도, <과학적 설명은 관찰자가 직접 지각 가능한 것들만을 고려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한편, 이러한 한정(限定)은 <우리 관점에서 보아, 행동의 이유들을 공급하는> 모든 내부적 준거(基準)에 대한 계획적[programmatic: 프로그램에 입각한 의도적] 무시로 이어진다. 이들 준거는 관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개별 개체의 경우에는 불변(不變)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한가하거나 지겨운 일을 하고 있을 때 울리는 전화기 벨소리는 나로 하여금 전화를 받도록 재촉하는 자극이다; 일에 파묻혀 있을 때라면 멈추길 바라며 한참 동안 내버려둘 것이다.) 

 

다른 한편, 관찰–가능한–것들에만 전적으로 집중함으로써 자극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 기만적 정의가 부여된다. <관찰자가 그 자신의 지각장에서 자극으로 격리해낸 것이 관찰된 유기체한테 자극으로 기능하는 것과 같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당연시(前提)하는 것은, 실재론의 가장 소박한 형식에 입각한 뻔뻔함(推定)이다.

 

 

3.

보다 개방적인 심리학자들은 강화를 기원에 따라 두 종류로 구별한다: 하나는 외인적(外因的) 다른 하나는 내인적(內因的)이라 부른다. 관찰자가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외인적인 것들뿐이지만, 유기체의 선행–행동의 반복–가능성을 증가시키는 효과에 있어서는 양자 모두 같다. 행동주의자들은 오직 관찰 가능한 것만을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했기에 그들 배우기 이론에서 내인적 강화는 배제되었다.** 이러한 배제는 개념적 배우기에 대한 계획적 무시로 이어졌고, 그러한 가르치기 방법론의 귀결들은 황폐(破壞) 그 자체였다. 최근 한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그럼에도 그들은 이것을 설명적 장치의 하나로 사용했다(Skinner, 1971, p.107를 보라).

 

학교 환경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다양한 강화들은 칭찬, 포상, 그리고 평점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외적 동인(動因)의 사례들로, 그에 이은 활동 목표는 약속된, <성적표의 별(☆)이든, 또는 보고서 평점이든>, 인센티브를 얻는 것이다. (Rieber, 1993, pp.205–6) 

 

이 절차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 이로써, 강화된 행동의 반복이 야기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되어, 행동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배우기에 대한 해결책을 갖게 되었다고 공표했다. 이러한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인 까닭은, 외적 동인들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유발(誘發)하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는 도덕[moral: 그/그녀가 옳고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행동, 처신에 대한 (표준 또는 특정) 규범(基準)들] 교육의 맥락에서 훈육과 가르치기 사이 주된 차이를 설명할 때 그 터무니없음을 명확히 지적했다. 

 

아이가 그른 일을 할 때 벌을 주고, 바른 일을 할 때 상을 주면, 아이는 더욱 삼가며 착한 짓을 할 것이다. (Kant, 1803, vol.IX,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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