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피드백, 귀납, 그리고 인식론(Feedback, Induction, and Epistemology)

        피드백, 귀납, 그리고 인식론** 

 

** Glasersfeld (1981b)로부터 수정되고 확장되었다(Pergamon 출판사에 경의를 표함).

 

 

 

제어 이론의 가장 성공적인 관념들 가운데 하나는 네거티브 피드백 원리였다. 오토 마이어가 그의 굉장히 유쾌한 책, 피드백 제어의 기원들(1970)에서 보인 대로, 이 원리를 실용적으로 구동시킨 것은 BC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것은 연소량에 따라 기름 흐름이 조절되는 기름 램프들로 명백히 입증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자동온도조절기, 자동항법장치, 그리고 유도미사일들을 갖고 있다. 이들 장치들은 구조와 소재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정한 한계들 내에서, 그것들은 전에는 인간 에이전트의 주목, 구별, 그리고 판단이 요청되었던 활동들을 해낼 수 있다. 모든 제어 메커니즘은 보다 중요한 과업이나 더 많은 여가 활동을 위해 사람들의 손이나 마음을 자유롭게 하도록 디자인되었다. 맨 처음부터, 그러한 메커니즘의 목적은 디자이너나 사용자가 자신의 경험 세계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상태의 유지, 혹은 창조였다 - 노예들을 잠자리로 보낸 후에도 등불을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 날씨에 상관없이 방 안 온도를 적정하게 유지시키는 것, 등등. 오늘날 이 모든 것들은 당연한 것들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러한 현상의 몇몇 기본적 측면들을 쉬이 간과하게 되는 이유다. 파워스(1978)가 보여준 것처럼, 이렇게 사용자의 목표 구조들에 박혀든 바로 인해, 피드백 메커니즘들이 생명 유기체들에서 실제 기능하는 방식은 잘못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제어 시스템은 … 출력이 아닌 입력을 제어한다’는 특징이다.

 

자연 시스템들은 그들 외부 세계에 생겨난 <그들 행동의 객관적 효과들>에 입각해 조직될 수는 없다; 그들 행동은 관찰자의 이득이나 관찰자의 목적 수행을 위해 그런 척하는 쇼가 아니다. 자연 시스템은 오직 그 자신의 행위들(또는 독립된 사건들)이 그 자신의 입력들에 미치는 효과들에 입각해서만 조직될 수 있을 뿐이다 … (Powers, 1978, p.418)

 

    구성론적 조망에서, ‘입력’은 분명코 외부의 에이전트나 외부 세계가 집어넣는 무엇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경험하는 무엇이다. 이는, 내가 파워스의 것을 개작한 아주 간단한 다이어그램에서 볼 수 있다 (1973, p.61).

 

피드백 루프.jpg

    제어 시스템은, 자신이 감각한 것(감각 신호)과 자신이 감각하기로 된 또는 감각하고 싶은 것(준거/기준) 사이 편차가 있을 때 (네거티브 피드백으로) 작동한다. 오로지 관찰자 입장에서만, 유기체의 행위가 그것의 환경 조건들을 바꾸고, 고로, 그것이 감각하는 것을 바꾼다고 말할 수 있다. 유기체 자신은, 그저, 준거(基準値)와 자신이 감각한 것 사이 편차에만 반응할 뿐이다. 유기체의 행위가 그 자신의 감각에 여하한 영향도 주지 못하는 환경에 처한 경우, 이 편차는 점점 더 커져 치명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유기체가 문제시하는 것은, <자신의 가능한 활동 목록들 가운데 실행한 것>과 <그것이 자신의 감각적 요동들에 일으킨 변화> 사이 관계다. 

 

    주어진 일에서 우리를 대신하는 특정 기계적 피드백 장치는, 우리 자신이 경험한 배우기를 결정화(結晶化)시킨 것이다. 그것은 그 디자이너가 경험에서 귀납적으로 얻었던 if–then 규칙[그러면 그리하니 그럴 것이고  이러면 이리하니 이럴 것이고 이도저도 아니면 가만 있으라]의 물화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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