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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형화(equilibration)

        평형화 개념  

 

조정 개념에서, 요동 제거를 총칭하는 용어, ‘평형화’ 개념에 기반한 독창적 배우기 이론이 나온다. 평형화에 대한 그의 후기 저작의 집중은, 삐아제가 왜 사이버네틱스에 흥미를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다(Cellérier et al., 1968; Piaget, 1977b를 보라).

 

    네거티브 피드백이 작동하는 제어시스템은 선택 값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요동들을 제거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8장을 보라). 그 결과, 항상성[homeostasis: 시스템이 외부 변화들에 대해 자신의 평형을 달성하기 위한 조건들을 유지하기 위해 그 변화들에 반응하는 과정]은 제어공학에서 중심 주제가 되었다. 하지만, 삐아제가 출발부터 매우 명확히 한 건, <인지 맥락에서 꾸준히 유지되어야 할 것이, 온도계 설정온도나 혈액 혈당치처럼, 고정 값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보다는, 자전거타기의 균형잡기처럼, 변하는 수치들 사이 관계나, 특정 함수(函數)에서 규칙적 변화가 더 잦은 것들이다. 

 

    인지발달은 평형화 확장하기(équilibration majorante)로 특징지어진다: 이 용어로 삐아제가 뜻한 건 ‘유기체가 제거할 수 있는 요동들의 범위 증가’다. 이러한 개념의 한 측면은 과학철학의 관심 대상이며, 과학 가르치기에서도 그렇다고 본다. 인지하기 주체가 전적으로 새로운 요동을 매번 제거할 때마다, 가능하며 때때로 벌어지는 일로, <앞서 확립되어 여타 요동들 제거에서 바이어블한 것으로 입증된> 개념이나 조작들과는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된 개념이나 조작을 그러한 평형 성취 조정 과정에 끌어들였음이 밝혀진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비일관성이 드러나는 경우, 자체로 상위의 개념적 수준, <즉, 반성으로 가용(可用)한 스킴들을 검토, 비교하는 수준>에 요동을 일으킨다. 가용한 스킴들에 대한 이러한 반성적 검토는 오늘날 심리학자들이 고안한 용어 ‘메타인지(metacognition)’로 가리키는 깜냥을 예지한, 그리고 포함한 것임을 주목하라. 

 

 이때, 이러한 상위수준의 요동은, 만족할 만한 평형을 회복할 수 있기 전, 하위수준의 재구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과학의 역사는 이러한 종류의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오늘날 이론 물리학자들한테 아주 곤혹스러운 것으로, 파동 개념에 기반한 모델은 일정 여건에서 빛의 현상에는 아주 잘 들어맞지만, 다른 실험 결과들 설명에 필요한 입자 이론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있다. 

 

    평형화에는 또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명확히 진술되지는 않았지만 삐아제의 반복된 관찰에 함의되어 있다: <조정을 위한 가장 빈번한 계기들은 타자들과 상호작용으로 제공된다>. 이들 조정들이 요동들을 제거하고 있는 한, 이들 조정들은 개체의 개념 구조들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역에서도 평형을 이루어낸다. 삐아제가 이러한 함축적 귀결을 조금만 더 강조했다면, 그의 모델이 사회적 요소를 무시하고 있다는 그러한 피상적 비판은 대체로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간략한 설명으로 보여준 바와 같이, 스킴 이론에는 다른 과학적 설명들처럼 일정한 전제들이 수반된다. 이에 따라, 인지하기 유기체들은 최소한 다음 깜냥들을 지녀야 한다: 

 

 경험 흐름에서 재발하는 것들을 확립(構成-維持)시키는 능력과 그 능력 이상의 경향;

 여기에는, 이어, 적어도 2개의 진전된 깜냥이 수반된다: 경험들 상기하기와 복구하기(재연하기), 그리고 유사성과 차이에 대한 비교, 판단 능력; 그리고

 유기체는 특정 경험들을 더 ‘좋아한다’는 전제(先假定); 말인즉, 유기체는 몇몇 기본 가치들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들 특징들로, 삐아제 모델은 날카롭게 20세기 수많은 심리학자들과 충돌했으며, 고로, 그들은 반성, 목표–지향, 그리고 가치들을 고려한 여하한 언급도 피하고자 줄기차게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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