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트레이닝보다는 가르치기(Teaching rather than Training)

        트래이닝보다는 가르치기

 

구성론적 생각하기 방식을 채택하려면, 교육적 관행 저변에 깔린 상당수 핵심 개념들을 개조(改造)해야 한다. 배우기와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정보와 지식의 본성, 타자들과 상호작용, 동기유발 현상에 관한 이론적 생각(觀念)들을 구성론적 조망에서 보게 되면, 그것들은 모두 바뀐다. 이들 변화들 가운데 대다수는, 앞 장들에서, 일반적 방식으로 언급되거나 함축되었다. 이 장에서는 그것들의 교육적 맥락(狀況)에서 효과들을 짚어볼 것이다. 

 

    가르치기와 트래이닝(訓練)은, 그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두 가지 관행이다. 나는 이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럼에도, 아주 최근에서야, 이에 대해서도 칸트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2장의 간략한 역사적 개관을 쓰면서, 여러 차례 칸트 전집으로 되돌아가 전에는 결코 읽지 못했던 절들과 마주쳤다. 그의 생전 출판된 저작들을 담고 있는 마지막 권 volume IX에서, 나는 페다고지(敎授術)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발견했다. 이것은 그가 죽기 바로 전 해, 1803년에 발행되었다. 

 

인간은, 그저 훈련되어 망가진 나머지 기계적으로 지시받는 존재가 될 수도, 정말 계몽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개와 말을 훈련시키듯, 인간 역시 훈련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훈육이 잘되는 일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생각하는 걸 배우는 일이다. 그 목표는 모든 행위들이 비롯되는 원리(原理)들이어야 한다. (Kant, 1803, Werke, vol ix, p.450)

 

    칸트 시대, 이는 양자택일로 보였던 것 같다. 우리는 행동(行態)주의 운동이 합리적 계몽의 경로를 제거했던 업보(反理性主義)를 안고 있다. 환경–자극들과 보상–강화에만 전적으로 집중함으로써, 행동주의는 생각하기(思惟)에 대한 관심을 효과적으로 지워버렸다. 성과(成績)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그 결과로, 학생들한테 고작 교사가 말하거나 교과서에 있는 것을 상기할 것만을 요구하는 시험들을 계속해서 시행하고 있다. 그런 시험들은 이해하기가 아닌 기억과 암기 학습을 검사한다. 이해하기는, 마음과 의미처럼, ‘전–과학적, 유심론적’ 허구로 간주되었다 (Skinner, 1971, pp.12–23를 보라). 

 

    구성론의 관점에서, 행동주의의 ‘자극’과 ‘강화’라는 생각들은 순진(素朴)하며 기만적이다. 그렇지만, 행동주의 운동은 수십 년 전 엄청 강력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육자들 마음에 아직도 살아 활동하고 있다. 고로, 행동주의의 이들 기본 용어와 관련해서 우리의 개념적 차이들을 논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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