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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화된 정보에 대한 환상

        코드화된 정보에 대한 환상 

 

이 지점에서, 영국 경험론자들도 잊자, 칸트도 잊자, 그들을 무시하면 실재론을 위한 특정 상황(事態) 하나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 결국, 칸트 이래, 명시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함축적으로 실재론으로 기울었던 철학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회의론자들의 오래된 공격에 맞서 만족할 방어를 성취하지 못했다. 지식을 실재에 대한 그림으로 생각하고 싶다면, 사물들을 대체로 실재하고 있는 것들로 보여주는 실재론적 그림을 우리가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을 보증할 그 어떤 검사도, 정확히 말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정보처리 맥락에서 최근 나타났다. 그 학파에서, 역시, 지식은 자주 재현적(表象的) 용어들로 논해진다. 인지적 유기체는 재현들을 형성하기에 이르고, 그 재현들은 실재에서 수집(收穫)된 정보가 ‘코드화’된 것들이라고 말해진다. 그렇지만, 비크하르트와 리치(Bickhard & Richie)(1983)는 이것이 환상(幻想)임을 보여주었다. 코드란, 기표(記票)된 아이템(項)들과 이것들로 기의(記意)된 아이템들 사이 의미론적 연결들의 배열이다. 그와 같이 의미를 취하는 연결을 창조(製作)하려 하는 이라면, 반드시, 사용할 기호/상징들만이 아니라 그것들로 기호화 또는 상징화 하고 싶은 아이템들에도 접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어 사용에 있어 신비주의자들의 은유적 방식을 합리적 방식과 구별하기 위해 비코가 도입했던 기준을 오늘날 용어로 정식화한 것임에 주목하라. 전제(當然視)된 존재론적 실재는 항상 우리 경험 경계면 반대편에 머무르기에, (코드–상징들의 의미에 접근해야 하는) 두 번째 조건은 충족될 수 없다. 고로, 원래 의미가 끔찍하게 왜곡된 것은, 우리 감지(sense)들을 거쳐 우리가 받아들이는 신호들이 실재에 관한 정보를 나르는 ‘코드’라고 말할 때다. 

 

    <감지들이 정보를 전송한다>는 시각에 대해 특히 공격적인 문제 하나를 하인츠 폰 푀르스터가 19세기 독일 생리학자 요하네스 뮐러의 저작에서 발굴했다. 그는 그것을 ‘무차별적 코드짓기 원리(Principle of Undifferentiated Encoding)’라고 적절히 칭했다:   

 

신경세포의 반응에는 그 반응을 야기했던 에이전트들의 물리적 본성이 코드화되어 있지 않다. 코드화된 것은, 내 몸 바로 이 지점에 ‘무엇’이 아닌 단지 ‘얼마나’일 뿐이다. (Foerster, 1981, p.293) 

 

    달리 말해, 당신 손가락 끝, 발가락, 귀, 또는 눈의 망막에서 뉴런을 거쳐 뇌로 보내진 신호들은 질적으로는 전적으로 같은 것들이다[: Qualia(感覺質들)가 아닌 Quantia(感覺量)만이 있을 뿐이다]. 그 신호들에 체현된 것은 특정 요동의 강도(强度)지, 그 요동의 원인의 본성(本質)과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아니다. 보고, 듣고, … , 만질 수 있는 사물들을 담고 있는 세계의 그림은, 오직, (함께 다다르는 그리고 순서들이 생겨나는) 신호들 사이에 해석자가 확립시킨 관계들로만 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성적 활동에서 주의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몇몇 실험 심리학자들은, 각각 별개로, 주체들이 지각 장에서 그들 눈이나 몸을 물리적으로 움직이지 않고도 그들 주의 집중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음을 보였다 (Köhler, 1951; Lashley, 1951; Pritchard et al., 1960; Zinchenko와 Vergiles, 1972). 이 놀라운 발견은 심적 구성에 대한 모델이라면 그 어떤 것에도 중요하다. 이로써, <감각 신호들은 숙명(宿命) 지워진 덩어리에서 나온다>는 전통적 당연시에 대한 필요는 제거되며, 정렬과 관계들의 창시자로서 마음을 해방시킨다[말인즉, 제약과 가능성의 세상을 마주하고 세계 창조자로서 마음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한다]. 

      

    내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그렇지만, 실험 결과들이, 구성론적 모델과 양립하는 바와는 무관하게, 구성론적 모델을 ‘참(眞)’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무차별적 코드짓기와 주의의 이동 깜냥에 대한 경험적 발견들은, 그 자체로 관찰자들의 구성물들이기에, <감지들이 객관적 외부 세상의 구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영어 원문의 ‘not’은 오기]>는 것을 입증하는 논리적 근거로 쓸 수는 없다. 이러한 불가능성은, 인간 지식은 재차 인간 인지 메커니즘들이 수반되는 절차로는 검사될 수 없다는 회의론자들의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양립-가능한 실험관찰적 발견들이 항상 고무적인 까닭은, 구성론의 주장에서 알기란 서로 양립할 개념적 구조와 모델들을 모아 일관된 네트워크들을 짜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경우, 그것들은 다음 요구를 적법한 것으로 만든다: 객관적 정보가 감지들을 거쳐 수용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와 같은 소통적 전달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모델을 제출하라!

 

    이어, 구성론적 이론의 책무는, 정보의 밀폐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상 삶(living)이 행해지고 있는 현저하게 안정적인 경험적 실재(現實)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보여줄 수 있는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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