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주관성(subjectivity)

1.

급진적 구성주의(RC)란 무엇인가? 이것은 지식과 알기 문제에 대한 비인습적(非因襲的) 접근이다. 출발 전제(當然視)는, <지식이란, 어떻게 정의되든, 개인들 머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생각하기 주체가 아는 것은 그/그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하는 방식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의식하며 살고 있는 세계뿐이다. 이 세계는 사물, 자아, 타자, 등등, 수많은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경험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내 경험, 당신 경험이 다르지 않으리라 믿을 이유들을 내가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경험이 같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언어에 대한 경험과 해석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RC는 더없이 충격적 견해다. 상당수 비판가들은 주관성 강조는, 그들 생각에, 개인들이 원하면 어떤 실재(現實)든 맘대로 구성할 수 있음을 함축하기에, 유아론(사람들 머리(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시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또 다른 비판가들은 구성론적 접근이 개인의 지식 발달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할을 무시하고 있기에 터무니없다고 주장한다. 두 반대 모두 정당화될 수 없다. 이를 입증하는 정식 논증들이 이 책 나머지 장들에서 제시될 것이다.

 

2.

삐아제 이론의 전제(先假定)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기 주체는 두 개의 기본 깜냥을 갖고 있다. 첫째, 감각과 운동의 경험 요소들을 정렬시킬 수 있다; 둘째, 그와 같은 정렬(協應)로 얻어진 개념 구조들이 진전된 경험 상황들에서도 ‘바이어블’한 것으로 확인될 때, 그 자신의 조작하기에서 추상할 수 있는 것은, 장차 경험 다루기에 도움이 될 주기성과 규칙들이다. 생각하기 주체가 정렬시키는 요소들은, ‘경험에서 얻어진’ 것들이기에, 정의상, 그 주체 시스템 안에 현존하는 것들이다. 그 시스템은, 결단코, 관찰자 관점에서 그 시스템 밖에 있는 것들로 보이는 아이템(項)들, 즉, 그 시스템의 경험을 야기한 ‘환경’ 요인들에 접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정렬은 전적으로 내적 사건이며, 고로, 그것은 정렬자한테는 항상 주관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삐아제가 연구하던 아이들한테만이 아니라, 과학자든 순진한 구경꾼이든, 그 어떤 관찰자한테도 해당된다. 그 누구도 이러한 경험의 근원적 주관성은 피할 수 없으며, ‘신의 안목(神瞰圖)’에 접근할 수 있다고 사칭하는 철학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들도, 모든 인지하기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감각운동 경험과 개념적 경험에서 결론들을 끌어냈으며, 그들 결론들에 대한 여하한 설명, 즉, 그들 ‘지식’ 역시 반드시 내적 사건들에 입각할 수밖에 없으며, 그밖에 설정된 그 어떤 요소들에도 기댈 수 없다. 

 

 

 

언어적 의미

 

언어적 상호작용.jpg

 

 

RC(1995)의 개념적 네트워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