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종잡기 힘든 자아(The Elusive Self)

        종잡기 힘든 자아

 

이상 텍스트 곳곳에서 1인칭 대명사를 빈번하게 썼고, 내가 말한 많은 것들은 이러한 1인칭을 지식 구성자로 당연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제기되는 질문은, 여기 1인칭에 거주하리라 생각되는 ‘주체’, 능동적 에이전트가 스스로 그/그녀 자신에 대한 지식을 구성할 수 있는가 여부다. 종종 듣는 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자아(自我)-지식은 오직 다른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서만 생겨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의문과 맞붙는 방식은 데카르트가 물꼬를 텄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 의심하기라는 그의 방법을 써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의심할 여지없이 남는 단 하나는 <의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타자들과 상호작용이 필요 없었기에, 단지 자신한테 cogito ergo sum이라 말했을 뿐이며, 그가 내린 결론은, 생각하고 있었던 동안생각하기 주체, 그가 실존했었다는 점이었다 (2장을 보라). 

    

    그가 단어 ‘실존한다’로 의미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그의 결론의 기초를 ‘생각하기’에 두었기에, 지각을 언급하는 버클리의 정의를 맘에 둘 수 없었다. 데카르트는 공간과 시간이 관찰자와 독립된 절대적 준거 틀을 조성한다고 믿었으며, 그가 표현 ‘실존한다’를 그러한 프레임워크(作業構造)에서 규정 가능한 좌표들로 자취를 갖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는 상식적 시각(見解)를 공유했다고 여겨도 무방하다. 우리가 ‘X는 실존한다’라고 말하는 경우, 통상, <우리는 시간의 어떤 점 X가 공간의 어떤 점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칸트 이후 상황은 더 복잡하게 얽힌다. 공간과 시간을 더 이상 존재적(ontic) 세상의 속성들이 아닌 ‘경험하는 방식들’로 간주하는 경우, 관찰자의 주관적 시공 준거 틀에서는 특정 가능한 좌표들을 취함에도 우리가 실존한다고 여기고 싶지 않은 것들, 이를테면, 환상, 신기루, 그리고 다가가면 사라지는 것들로, 고향, 거울 이미지, 무지개, 등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구성론에 맞추기 위해, 데카르트의 선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재해석은 ‘생각하기를 나는 알아차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되어야 한다. 내 생각에, 우리의 자아라 부르는 것의 토대는, 정확히, <하고 있거나 경험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러한 알아차림(自覺)>이다. 그것이 고상(高尙)한 의미를 갖는 생각하기일 필요는 없다.  당신이 구두끈을 매려는 걸 알아차리게 되는 경우, 당신 역시 그걸 하려는 당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내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한테는 의식이나 알아차림 모델에 대한 단초(端初)조차 없다는 바와 관련해서, ‘것’으로서 자아 개념의 그 근저에 알아차림이 있다는 주장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럼에도, 바이어블한 알기 이론을 구성하려는 여하한 시도에서도 알아차림의 근본적 신비는 인정될 수밖에 없다. 비트겐쉬타인이 말한 것처럼:  

 

나라는 것은, 철학에서 ‘세계는 나의 세계다’는 사실을 거쳐 나온다 … 그 철학적 나는 사람이 아니며, 인간 몸도, 심리학이 다루는 인간 정신(soul)도 아닌, 형이상학적 주체, 극한이다 –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Wittgenstein, 1933, par.5.641)

 

    하지만, 자아 개념에는 두 개의 면면이 있다. 실재론적 조망에서, 우리가 지각하는 자아는, 지각되고 있기에, 지각하기 주체의 명령 대상이 된다. 베르거와 루크만은 이를 아주 깔끔하게 표현했다: 

 

한편, 다른 모든 동물 유기체가 각각 몸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도 하나의 몸으로 있다. 다른 한편, 인간은 몸 하나를 갖는다. 말인즉, 인간은 그의 자아를 제–몸(自身)과 동일하지 않는, 오히려, 그 몸을 맘대로 할 권능을 갖는 ‘것[스스로 自 다스릴 己]’으로, 경험한다. 달리 말해, 그의 자아에 대한 인간 경험은 몸으로 있기(存在)와 몸 갖기(所有) 사이를 맴돌며 항상 균형을 유지한다; 반복해서 반드시 바로 잡혀야 하는 균형이다. (Berger and Luckmann, 1967, p.50) 

 

    구성론적 조망에서, <우리가 구상하는, 몸을 포함하는, 자아>는 비트겐쉬타인이 세계(世界)의 일부가 아닌 ‘나’라 칭했던 능동적 에이전트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 자아>의 여타 세속적(世俗的)인 부분이 구축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 자아가 경험한 바이어빌러티에 따라 가늠된다. 이와 같이, 경험 세계의 일부로 있는 자아–개념 성분에 접근하는 다소 직접적인 방식이 있다. 철학자가 쓰는 의미로 <자아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대신, <우리는 우리 자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은 그 경험하기를 행하는 신비한 ‘것’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만져질 수 있는 구조, 자기–자신(自己–自身)으로 경험되고 있는 몸에 집중된 것이다. 그와 같은 탐구는, 신비한 자기-의식적인(自己–意識的)인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러한 ‘것’이 그 자아(自己–自身)를  어떻게 에이전트(自己)로서 그리고 자신의 나머지 경험 장과 구별된  지각물(自身)로서 재인하게 되는지 검토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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