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의미(meaning)

1. 의미 구성

http://www.cysys.pe.kr/zbxe/RRC/324420

 

2. 언어와 실재에서,

 

인간 존재들은 예닐곱 살쯤 되면 그들이 자라는 사회 집단에서 말해진 언어에 대한 통제 깜냥이 주목할 정도로 발달한다. 그들은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기에, 타자들에 의해 이해될 수 있으며, 타자들이 말하는 굉장히 많은 것들을 이해한다. 하지만, 아직은 그와 같은 이해하기가 어떻게 가능한지 숙고할 나이는 아니다. 또한, 그들이 단어들과 연합시켰던 것들이, 모두한테 같은 환경에 그 자체로 실존하는 것들이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경험 요소들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여하한 꺼리(根據)도 갖고 있지 않다. 고로, <단어들은 독립적 대상들을 지시해야 하며, 그것들의 의미는, 그렇기에, 개체로서 화자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다. 매일매일, 이들 명백한 사실들은 무수히 반복 확증되며, 이후 어떤 시기 언어에 관한 숙고에 관심을 두는 경우, 십중팔구 그러한 생각은 불가피하게 전제로서 그러한 소신의 기초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이는 해가 지구를 도는 것만큼이나 틀림없어 보이지만, 설명 모델의 기초로서 좋은 것은 못 된다. 

 

구성론의 관점에서, ‘공유/공용하기’라는 생각(2장을 보라)이 함의하는 것은, 심적 구성물의 맥락에서, 같음이 아닌, 양립-가능성이다. 모든 언어 학습자들은 개체 경험 요소들로 각자 자신들의 단어 의미를 구성하고, 이어, 타자들과 언어적 상호작용에서, 그 의미를 시행, 착오 그리고 버티기를 거쳐 작동(通)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 적응시킨다. 의심할 바 없이, 이들 주관적 의미들은 사회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수정되고 다듬어져 온갖 용례들로 적응된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으로 바뀌지도 바꿀 수도 없는 사실은, 개체 의미의 형성 소재는 오로지 그 개체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서만 취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根據)로,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주의 깊은 탐구자들은, 폴 콥을 따라, 의미에 대해 공유‘되고자’-취해진-것이라 말한다; 그것은 실제로 같다는 걸 함의하지는 않는다 (Cobb, 1989를 보라). 

 

 

주관성

 

 

 

 

단어 ‘컵’과 연합된 재연이 이 단어를 쓰는 언어 화자들의 수많은 방식들에 대체로나마 맞아 들어가기 위한 조정을 끝마칠 때까지 아이는 수없이 좌절된 언어적 상호작용들과 그 자신의 의미에 대한 반복된 잘라내기와 덧붙이기를 시행할 것이다. 어른들로서 우리는 ‘바이어블’한 ‘컵’의 의미를 다기한 맥락들, 이를테면, 축구선수권대회, 속옷, 집합, 골프장, 엉덩이나 어깨의 해부구조, 등등에서 스스로 구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더듬거리기, 짐작하기, 그리고 수정하기가 필요했는지를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단어와 언어적 표현들의 의미 조율과 조정 과정은 우리들 각자에 걸맞게 우리 사는 내내 계속된다. 특정 언어를 얼마나 오랫동안 말해왔는가 하는 바와 상관없이, 우리한테는, <우리가 단어를 어떤 특정 측면에서는 독특한 자신만의 것으로 판명된 방식으로 사용했고 사용하고 있음>을 깨닫는 계기들은 변함없이 있을 것이다.

 

 

  

 

 

언어적 의미 구성에서 이러한 핵심적이며 불가피한 주관성을 보게 될 경우, 이제 더 이상, <단어들이 생각(觀念)이나 지식을 나른다는, 우리가 말한 걸 이해하는 청자는 필히 우리 것과 동일한 개념적[개념-형성] 구조들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은 지속될 수가 없다. 대신, 우리는 이해하기란 일치(一致)나 필적(匹敵)이기보다는 들어맞기(適)나 조화(調和)의 문제임을 깨닫는다. 경험 맥락에 맞아 들어가는 기능으로서 바이어빌러티 개념은, 진화론과 인식론에서만큼이나 언어적 커뮤니케이션(疏通) 영역에서도 유용하다. 

 

 

 

바이어빌러티

http://www.cysys.pe.kr/zbxe/RRC/board_9/324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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