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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론의 기초(The Semantic Basis)

            의미론의 기초
 
소쉬르는, 20세기 첫 10년에, <단어와 의미 사이 고리, 의미론적 연결은 ‘소리–이미지’와 ‘개념’ 사이 연합적 고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공리(公理)로 취했다. 소리–이미지는, 그가 수차 강조했던 것처럼, 발화된 단어의 물리적 소리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소리–이미지가 소리에 대한 청각 경험에서 얻어진 추상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사과’ 개념이 사과 경험들에서 얻은 추상인 것과 같다. 일단 소리–이미지가 개념과 연결되면, 그 조합은 ‘심리적 양면체’, 일종의 ‘언어적 기호’로 간주된다 (de Saussure, 1959, p.66). 간단한 도식으로 그 연결을 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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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심리적 양면성으로 인해, 바로, 단어들과 언어에 대한 ‘상징적’ 사용이라고 내가 칭했던 것이 가능해진다. 그 어떤 언어의 화자가 특정 경험 상황을 실존하는 특정 개념에 동화시킬 수 있는 순간, 그 개념은 그것과 연합된 소리–이미지를 불러낸다; 그리고 거꾸로, 들린 어떤 소리가 특정 소리–이미지에 동화될 수 있는 순간, 그 소리–이미지는 그것과 연합된 개념을 불러낸다. 그것은 쌍방향 연결이며 양방향으로 모두 작동한다. 이것은 행동과 관련된 것이 아닌 심적 사건이기에, 나는 이를 ‘상징적’이라 부른다 (Glasersfeld, 1974). 이것은 ‘신호주고받기’에서 단어와 여타 기호들을 사용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 앞서 언급한 개의 사례에서, 주인이 단어 ‘앉아’를 뱉을 때마다 그 개는 얌전히 주저앉는다. 그 명령에 따르기 위해, 그 개는 자기 청각장의 온갖 노이즈(雜音)에서 소리 ‘앉아’를 격리(孤立)시키기 위한 소리–이미지 비슷한 것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개한테, 이러한 소리–이미지는 앉기 개념과 연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이러한 특정 소리를 뱉을 때마다 하도록 훈련받았던 단지 그러한 행동 반응과 연합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행위를 위한 신호이지, 개념이나 심적 재연을 펼쳐내는 상징이 아니다.**  게다가, 신호는 일방 연결로 조성된 것이다: 개가 자발적으로 앉는 경우, 그로써 개한테 명령의 소리–이미지가 불려나오지 않으며, 자신이 하고 있는 바를 그 개는 내뱉기 ‘앉아’로 기술할 수도 없다.

 

** 단어 ‘상징’에 대한 나의 용법은 드 소쉬르와 삐아제 모두와 다르다 — 그들한테, 상징들은 그것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과 항상 ‘아이코닉한’ 관계를 갖는다 (즉, 상징과 그 의미 사이 어느 정도 유사성을 필요로 한다).
 

    인간들 사이, 신호–주고받기를 정형화시켜 상징적 상호작용을 사실상 용납하지 않는 영역은 군대이다. 명령이 주어지는 것은, 실행되기 위해서지, 수령자들한테서,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개념을 불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명령들은 언어적 기호 형식을 갖지만 빈번히 그 기능은 갖지 않기에, 이러한 단어 사용을 구두 행동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것은 단어들과 언어의 일상적, 개념적 사용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나의 개념 분석 작업에서, 나는 소쉬르의 기본 통찰력이 지극히 유익하다는 걸 발견했다. 구성론적 언어 모델에서 그 통찰력의 중심적 역할을 보이기 위해, 나는 그것을 더 포괄적인 도식으로 합체시켰다.
 
1 ‘개념’과 ‘재인 패턴’ 사이 구별은 발달적이자 기능적이다. 그 재인 패턴은 앞서 형성된 것으로 특정 행위가 구체적 지각물과 함께 정렬, 발동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자극–반응 메커니즘과 같은 행동(行態)주의 개념으로 적절히 묘사, 기술될 수 있는 모든 현상들의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길을 건너며 연석 너머 차도로 한 발 디딜 때, 앞서 발걸음보다 발을 높이 들어올린다. 연석을 개념적으로 알아차릴 필요 없이, 지각 시스템은 감각 패턴을 알아보고 과거 바이어블한 것으로 입증된 운동 프로그램을 촉발시킨다. 삐아제 용어로, 그 시퀀스(配列)는 ‘연석 통과하기 스킴’이다. 우리 일상의 수많은 행위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기능하며 여하한 개념적 수반도 요청하지 않는다 – 그렇다고, 이로써 행동주의의 전제(當然視), <개념들은 실존하지 않는다>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재인 패턴이 개념과 병합되는 경우는, <그 자신을 특정(特定)하는 감각 신호들 없이 그리고 행위 촉발하기 없이>, 자발적으로 또는 단어로 인해 불려나올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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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2: 언어적 상호작용들에서 개념과 재연들의 역할

 

 

2 ‘소리–이미지’와 ‘재인 패턴’ 사이 구별은 유추적이다. 구체적 청각 신호들을 특정 언어의 단어로 알아보도록 하는 재인 패턴은, 그 단어를 발화(發話)로 산출하도록 하는 소리–이미지의 재현(再現)보다 앞서 형성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는 언어학자들이 구별하는 능동적 어휘와 수동적 어휘의 차이로 파악된다. 도식의 오른쪽 배치가 왼쪽의 거울 이미지인 것은, 훈련이나 관행(習慣)에서 생겨나 명령 권능의 기저를 이루는 자극–반응 경로가 한 번 더 있기 때문이다. 양쪽 경로의 요소들 사이 여하한 차이도 없는 것은, 오른쪽에서, 촉발자가 (언어학으로 특정된 소리인) 음소(音素)들에 대한 청각 경험이라는 사실이 문제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경험과 연결되었던 반응으로서 특정 행위는, 음소들뿐만 아니라, 사전에 훈련되었다면, 몸짓, 빛 신호, 또는 깃발로도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소쉬르의 해체(解體)에다 추가된 주된 요소는 ‘재연(再演)’이다. 내 조망에서, 이러한 추가가 불가결한 이유는, 청자나 독자에게서 재연들을 불러내는 능력은 언어에 엄청난 권능을 부여하며, 이로써 언어는 모든 신호주고받기 형식들과 차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언어와 통신에 대한 내 모델을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리처드 로티의 모델들과 구별하는 특징이다 – 그들 관념들 가운데 수많은 것들은 RC와 완벽히 양립-가능한 것들이다.
 
    개념, 소리–이미지 그리고 재연들을 엮는 쌍방향 연결들의 순환에서, 하나는 나머지 다른 둘을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제,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난 단어, 이를테면,
 
                       무소(rhinoceros)
 

를 내가 제시하는 경우, 당신은 이걸로 뭘 할지 알 수 없겠지만, 내가 이게 무슨 의미인지 묻는 경우, 정확히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짐승으로, 악명을 떨친 뿔을 갖고 아프리카에서 산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이리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단어가, <당신이 보았던 영화들에서, 당신의 사파리 여행 경험에서, 또는 동물원 탐방에서 형성되었던> 시각적 재연을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밖에 온갖 재연들을 불러낼 수 있다 - 이오네스코의 연극 한편, 당신 사무실의 특별히 촌스런 사람, 또는 우연히 이 단어와 연합시켰던 그밖에 어떤 것들. 이와 같은 (때때로 ‘connotation[2차적으로 지시되는, 즉, 함의(暗示)되는 바]’으로 지시하는) 보다 넓은 범위의 연합들은 시작(詩作)에서 의존하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의 관심사는 그 단어와 특정 경험으로서 동물 사이 일차적[‘denotational’이 아닌  ‘primary’] 연합이다.**

 

**단어들의 이러한 일차적 기능은 ‘denotation’이라 불리지만, 내가 이 용어를 피하는 까닭은, 이것이 실재-세상의 대상들에 대한 지시를 함축하고 있기에, 그리고 내 의미론 모델에서, 단어들은 경험의 조각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실제 경험에서는 아니지만 특정 묘사나 기술에서 경험한 듯 형성했던 재연을 불러내는 단어들이 있을 수 있으며, 분명 그런 이름들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아카디아(牧歌的 理想鄕)가 그려진 그림을 본적이 없어도, 마담 보봐리나 갈라하드 경이 나오는 영화를 한 번도 보지 않았지만, 그것들에 대한 어떤 이미지들을 구성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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