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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커뮤니케이션? 왜 언어?

        왜 커뮤니케이션? 왜 언어? 

 

언어 습득 과정이, 내가 기술했던 것처럼, 꾸준한 노고가 드는 일이라면, 그 일에 동기를 부여하며 성취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접근에는 많은 방식들이 있다. 우리 이력을 되짚어 볼 때, 아이들한테는 실제 그 사안과 관련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이 속한 집단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두 다리로 걷는 걸 배우는 것 못지않게 긴급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족 또는 호모족[인간,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 그리고 보노보스와 같은 ‘위대한 원숭이들(Great apes)] 무리들이 왜 언어를 발달시켰는가 하는 의문은, 19세기 말 프랑스 아카데미가 확증 불가능한 환타지들의 발표에 지쳐 언어 기원 연구들을 금지시켰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있다. 

 

    지난 30년 동안 위대한 원숭이들과 함께 한 커뮤니케이션 실험들은 그 화제를 되살려냈다. 침팬지 라나와 함께 작업하며 당대 영장류학의 일부만을 다루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개시가 유인원의 생존 투쟁을 훨씬 더 용이하게 만들어 생물학적 진화 과정의 특징이 될 수 있었다고 믿을 여하한 근거도 찾지 못했다. 해서, 나의 제안은, 그것은 유아의 놀이에서 시작되어 그로부터 사회적 진화의 중요한 인자(因子)로 발달한다는 점이었다. (Glasersfeld, 1980, 1992a). 

 

    실상이 그럴지라도, 구성론적 조망에서, 우리는 아이의 언어 습득 노력을 그럴듯한 것으로 만드는 심리학적 모델이 필요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정렬 기능을 갖춘 다면적 모델이나 그러한 몇몇 모델들 필요하다. 나는 가능한 단면 하나만을 제안하고 싶다. 

 

    우리의 기본 전제(當然視)들 가운데 하나로, 자신의 평형을 생성, 유지하기 위해 분투하는 생명 유기체는 경험 흐름에 규칙성들을 확립(構成-維持)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삐아제가 아이 인생 첫 해 동안의 발달 과정에서 현저한 특징으로 관찰 기술했던 ‘순환적 반응(circular reaction)’으로 명백히 나타난다 (Piaget, 1937). 이 용어가 지시하는 것은, 특정 행위에 우연히 잇따른 지각 사건을 경험 했기에 그 행위를 반복하려는 유아의 시도들이다. 그 행위가 또 다시 그 사건을 ‘산출’하는 경우, 이는 유아한테 기쁨을 주는 것으로 보이며, 유아는 그 절차를, 또 다른 무엇에 자신의 주의가 붙잡히기 전까지는, 반복할 것이다. 

 

    여타 심리학자들은 유아들이 그들 경험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사례들을 ‘초기 배우기’라 불러왔다. 각별한 이목을 끄는 실험이 하나 있다. 아기가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릴 때마다 불빛이 들어오도록 누름 스위치를 아기 베개 밑에 놓는다. 그때, 우연한 아이 머리 운동으로 전등이 켜지면, 아이는 그 효과가 지겨워질 때까지 그 운동과 이어지는 명백히 흥미로운 감각 경험을 반복할 것이다 (Lipsitt, 1966).

 

    이것은 <행위 스킴들의 구성 목적은 경험에 대한 나름 제어 깜냥을 얻기 위한 것이다>라는 전제(當然視)와 멋지게 들어맞는다. 초기 배우기는 굉장히 다양한 여건들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패턴으로 보인다. 초기 배우기의 또 다른 성취의 기초는, 앙앙대기로 불쾌한 상태가 완화되든, 안아지는 기쁨으로 지겨움이 종결되든, 여하튼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는 반복된 경험인 것으로 생각된다. 삶이 계속됨에 따라 그와 같은 원시적 제어 스킴들의 구성을 위한 무수한 계기들이 생겨난다. 내가 그것들을 ‘원시적’이라 부르는 것은, 단어들에 대한 나름 통제력을 획득하면서부터는 그/그녀 주변 타자들 사이에 예측-가능한 반응들을 발생시키기 위한 훨씬 풍요롭고 더욱 강력한 장(場)[뷔고츠키의 근접발달지대(ZPD: the zone of proximal development)]이 열리기 때문이다. 

 

    성인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에는 엄청난 다양성이 있다. 단어들은 행위를 유발시키거나 대상에 접근할 기회를 얻는 ‘신호들’로 쓰일 수 있다. 단어들이 목적 없이 거저 사용되는 대수롭지 않은 경우들도 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단어들은 도구로 쓰이며 목표를 돕는다. 목표들의 차이를 불문하고 단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들은 수신자의 개념적 구조들을 겨눈다는 점이다. 질문의 의도는, 타자가 갖고 있으리라 믿어지는 한 조각 지식에 대한 정식을 불러내는 것이다. 코멘트(批評), 기술(描寫), 설명, 그리고 강의들의 목표는, 청자들의 경험적-실재(現實)를 변경, 수정하는 것이며, 발화들은 가끔씩 기억이나 감정들이 펼쳐지도록 디자인된다. 그 모든 경우, 언어의 성공적 사용의 최우선 조건은 수신자가 해석을 구성하고자 노력하는가 여부다. 

 

    RC를 형성하는 대다수 관념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새로운 생각은 아니지만, 이에는 반복이 필요한 것 같다. 독해(讀解)의 개념적 메커니즘들에 관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그녀의 저작 이후 거의 50년이나 흘렀음에도, 루이스 로젠블랫은 자신의 이론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 때문에 자신의 기본 원리를 재차 진술해야 했다. 그녀가 주로 관여한 것은 문학이었지만, 읽기(讀解)에서 ‘대상’에 관해 그녀가 말한 것은, 과학과 철학의 텍스트들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언어의 일반적 목적성(存在-理由)에 관한 나의 표명들과 어울리는 결론으로 쓰일 수 있다.       

 

심미안이 있는 독자가 집중하는 ‘대상’은 ‘자구(字句)’가 아니라 ‘경험적’인 것이다: 그 ‘대상’은 독자가 펼쳐내어 겪어보는 인지적, 정서적 구조다. (Rosenblatt, 1985,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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