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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수정한 것

알아차림(awareness)

1. 알아차림(意識)에 대한 의문

 

삐아제와 그의 공동 연구자들이 했던 <알아차림에 도달>에 관한 연구의 주요한 두 결과 가운데 하나를, 그는 La prise de conscience**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이 책 제목은, 몇몇 양심적인 삐아제 해석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레슬리 스미스(Leslie Smith)(1981)가 지적했던 것처럼, ‘[The grasp of consciousness {의식의 파악(把握) 또는 포착(捕捉)}]’로 잘못 옮겨졌으며, 이것은 ‘[attainment of consciousness {의식에 도달(到達)}]’ 또는 ‘[onset {그 개시(開始)}]’로 옮겨져야 마땅했다. 

  

… 행위는 그 자체로 상당한 권능을 지닌 자율적 지식이다; 왜냐면? 그것은 <개념화된 이해라는 의미로서 그 자신을 의식하는 지식>이 아닌, 그저, <‘익힌 또는 몸에 밴 조작(know-how)’>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전자의 원천이 되는 까닭은, 의식에 도달은 거의 언제나 아주 분명히 이러한 초기지식 이후로 지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기지식은 그 자신을 알아차리지는 못해도 현저히 효과적이다. (Piaget, 1974a, p.275) 

 

    특정 상황에 대한 의식적, 개념화된 지식이, 발달 과정에서, 그 상황에서 행위(處身) 방식으로서 지식에 뒤쳐진다는 사실은, 감각운동 수준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는, 내 보기에,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주어진 아이템(項)의 재인 능력과 관련해서 그 아이템을 재연하는 능력의 시간적 지체와 유추적이다. 그러나 감각운동적 이미지, 이를테면, 사과 하나를 자신한테 자발적으로 재연하는 능력은, 삐아제가 윗 구절에서 ‘개념화된 이해’라 칭한 것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그러한 이해에는 사과 (또는 자신한테 재연하는 것이면 모든) 개념에 고유한 특징들 알아차리기가 수반될 것이며, 이러한 종류의 알아차림은 그저 재연만을 사용하는 것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심적 기능이다. 

 

    이러한 진전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 그것과) 일정 거리를 두고 그것을 자신의 대상으로 창조하기 위한’, 로크가 칭한, 마음의 ‘기예와 애씀(受苦)들’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익숙한 운동 패턴은 재차 멋진 사례가 된다: 우리는 자신들한테 테니스 스트로크 또는 골프 스윙을 능숙하게 재연할 수 있지만, 섬세하게 정렬된 특정 활동에 대한 그와 같은 추상에 수반된 일련의 기초 동작(動作)들에 대한 ‘개념화된 이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사람은, 있다 해도, 극소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때라야, 오직 ‘소급적 주제화’로서 그것은 구축(構築)될 수 있다: 즉, 전체 근운동감각 패턴이 그러한 연습 활동 경험에서 실험관찰적으로 추상된 이후라야 가능한 일이다.

 

    삐아제 이론에서, 윗 상황은 반성적 추상(reflective abstraction)의 첫 번째 유형과 유사하다: 그는 이것 또한 주체의 알아차림(意識)을 수반할 수도, 안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역사를 통틀어, 사상가들은 사유(思惟) 구조들에 대한 의식적 파악 없이 사유 구조들을 사용했다. 고전적인 보기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계들의 논리를 사용했음에도, 이를 그 자신의 논리학 구성에서는 완전히 무시했다. (Piaget와 Garcia, 1983, p37) 

 

    달리 말해, 이행 조작 알아차리기 없이도 인지적 조작 대상은 분명 알아차릴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인 ‘반성적 생각’ 또는 ‘반성된 추상’의 경우, 이와 관련된 알아차림에 대해 삐아제가 명시적으로 진술한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끝으로, 특정 반성적 추상이 의식된 경우, 우리는 그것의 그러한 결과를 ‘반성된’ 추상이라 부르며, 우리는 이를 그 층위에서 벗어나서 행한다. (Piaget et al., 1977a, Vol 2; p.303; 내 강조)

 

    반성적 추상이라는 상세 항목을 다룬 둘째 권 말미, 삐아제가 요약에서 이와 같이 진술(陳述)했을 때, 분명해진 것은, 통상 세 가지 유형들로 그가 논한 그 순서로 인해 약간 오해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발달에 따른 순서도, 논리에 따른 순서도 아니다. 그가 ‘반성적 생각’이라 적절히 칭하며 3가지 유형 가운데 두 번째로 열거한 것은, 유형 1이나 유형 3인 반성적 추상들보다도 훨씬 더 정교한 인지 현상으로 기술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또한 ‘실험관찰적’ 추상의 더 진전된 발달로서 적절한 것이다. 

 

    단어 ‘반성’은 삐아제의 다음과 같은 추상 분류 방식을 따라 두 가지 의미로 나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반성적 추상 유형 1과 의사–실험관찰적 추상의 경우, 다른 조작 수준에 사영(射影)과 그 사영된 수준에서 조정된 조직화(組織化)로 해석되어야 하다; ‘반성된’ 추상, 즉, 유형 2의 경우, 그것은 의식적 생각(構想)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의 두 권의 책, La prise de conscience(의식에 도달)(1974a)과 Réussir et comprendre(포착과 납득)(1974b)에는, 삐아제와 그의 공동 연구자들의 추론, <의식은 짧은 보폭들로 멈칫거리며 나타나며, 각 보폭은 대체로 특정 조작하기 방식 하나씩을 개념화한다는 점>을 끌어내는 관찰 소재들로 가득 차 있다. 폰 훔볼트처럼, 삐아제도 경험 흐름 밖으로 한 발 벗어나는 마음의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그래서, 주체 자신의 조작하기에 대한 주체의 알아차림이 언제 어떤 조건들에서 번쩍이기 시작하는지를 보여주고자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의식에 도달을 특징짓는 개념화와 관련하여, 행위가 어떻게 (단순에서 복잡한 형식으로) 진화하는지 확립하고자 한다 (Piaget, 1974a, p.275ff). 이어 둘째 책에서, 그는 알아차림(意識)이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 탁월한 정의를 제공하고 있다:

   

성공한다는 것은, 제기된 목표 도달을 충족시킬 정도로 주어진 상황을 <행위(行爲)로> 파악(把握 또는 納得)하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이전에 확립해서 행위에 사용했던 고리들에 대해 같은 상황들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로 제기되는 문제들을 풀 수 있을 정도로 그 상황들을 <생각으로> 터득(攄得)하는 것이다. (Piaget, 1974b, p.237)

 

    삐아제는, 이 두 권에 담긴 세심한 탐구들의 누적된 결과로, 성공적 스킴들 구성하기와 추상된 이해들 구성하기 사이 호상간 상호작용에 관한 극히 정교한 기술(記述)에 다다를 수 있었다; 결국, 재연 모드(樣式)에서, 즉, 감각운동 경험 수준의 문제들에 맞설 필요 없이, 문제들에 대한 조정 그리고 해법 발견하기로 이어지는 상호작용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는 반드시 추가되어야 하는 진전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앞선 절들에서, 재연은 재인에 뒤따른다는 사실을 논했고, 상징들의 ‘가리키기’ 기능은 실험관찰적 추상들에 기초한 재연들을 야기하는 상징들의 권능에 익숙해진 결과로 따라온다는 사실을 논했다. 제시된 추상된 운동 패턴들의 사례들로 명백해진 것처럼, 상징들은 그저 그와 같은 패턴들 가리키기로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며, 이 경우, 행위의 재연은, 주체가 그 행위를 의식적으로 개념화해서 그 재연 방식을 알고 있다면, 단축(短縮)될 수 있다.

 

 

2.  조작적 알아차림

 

이제, <의식적 개념화를 수반할 수 있게 되어, 그 결과, 상징들에 더욱 많은 권능을 부여하는 심적 작동하기 방식을> 가능한 것으로 만든 이러한 상징들의 가리키기 기능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반성적 생각이 삐아제가 아리스토텔레스 추상이라 부른 (위의 인용구를 보라) 종류에 적용될 수 있자마자, 조작되고 있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意識)뿐만 아니라 방금 이행, 완료되고 있는 조작들에 대한 알아차림 또한 있게 될 것이다. 이를 삐아제는 더 앞선 맥락에서 제기했다:    

 

형식은, 지각할 때는 그 내용과 분리 불가능하나, 조작 영역에서는 그 내용과 독립적으로 다룰 수 있다; 그 영역에서는 내용 없는 형식들조차도 구성되어 다루어질 수 있으며 … 논리–수학적 조작(演算)들은, 내용과 독립된 배열 구성을 … 전적으로 상징들만을 기초로 한 … 순수 형식들을 허용한다. (Piaget, 1969, p.288; 내 강조) 

 

    내 용어들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징은 조작과 연합될 수 있고, 조작이 상당히 익숙해지면 상징은, 그 조작 이행의 실제 재연을 산출하지 않고도, 그 조작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일 수 있다. 이를 작업-가설로 승인할 경우, 우리는 후앙 카라무엘이, 로크의 에세이 출간 25년 전에, 아주 멋지게 특징지웠던 수학적 활동 모델을 갖게 된다:  Caramuel 저작에 대한 내 지식은 작고한 내 친구인 파올로 테르치(Paolo Terzi) 덕택으로, 비제바노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17c 저자의 라틴어 논문이 발견되었을 때, 그 친구는 그 논문의 가치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스페인 귀족이었으며, 건축가, 수학자, 그리고 과학철학자로 바티칸의 부름을 받았던 카라무엘은, 곧바로, 교황청(Holy See)과의 몇 가지 견해 대립 때문에, 롬바르드라는 작은 도시의 주교로 쫓겨났다.  

 

내가 ‘사라센 군대는 베니스 군대보다 8배나 많았지만, 그 1/4은 전사, 1/4은 포로가 되고, 1/2은 도망쳤다’와 같은 구절을 듣거나 읽을 때, 나는 베니스인들의 당당한 분투에 감탄할 수 있으며, 그 전체 수를 몰라도 그 각각의 비례적 크기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 나한테 얼마나 많은 터키 사람이 있었고, 몇이 죽었으며, 몇이 잡혔고, 몇이 도망쳤냐고 물을 경우, 미지수들 가운데 하나가 결정되지 않으면 답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래서, 그러한 필요가 생겨나 보통 산술에 추가되었다: 후자는 기지수(旣知數)들을 다루며, 전자는 미지수(未知數)들을 다룬다. (Caramuel, 1670/1977, p.37)

 

    유럽에서는, 카라무엘 왈, ‘추상적 개념, 수(數)보다 더 추상적인’ 추상들을 다루는 이러한 다른 산술은 ‘대수(algebra)’로 알려졌다. 내가 여기서 논했던 추상과 반성 모델로, 이러한 더 진전된 추상이 야기된 지점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누기와 같은 산술 조작에서 추상된 조작 패턴의 실제 재연을 펼치기 위해서는 특정 숫자들이 필요하다. 이것은, 이를테면, 사과의 재연이 펼쳐질 때 특정 속성들이 필요한 것과 유추적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사과 재연 형성에 필요한 속성들은 감각 속성들인데 반해, 산술 조작(演算) 패턴 재연에 필요한 수들은, 그 자체로 심적 조작들에서 추상된 것들이며, 고로, 약간의 감각 소재의 도움만으로도 재연 가능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상징들이 추상된 조작 패턴과 연합되고 나면, 이들 상징들은, 포인터(指示者)들로 기능하는 자체 권능으로, 연합된 재연을 실제 펼치지 않고도, 이해될 수 있다 – 다만, 상징 사용자가, 수 소재가 이용될 수 있는 경우, 그 재연 산출 방식을 알고 있다는 조건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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