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실험관찰적 구성(empirical construction)

        실험관찰적 구성에 대한 분석

 

알기 문제에 대한 이러한 접근으로, 경험론은 한 바퀴 돌아 자신의 원래 취지(趣旨)인 경험 세계 검토하기로 돌아왔다. 경험론은 출발하며, 경험 세계가 머지않아 그 너머 존재적(ontic) 세상, 객관적 실재 세상의 어떤 것을 드러낼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희망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가 경험 세상 탐구를 계속 이어 갈려면, 우리는 반드시 칸트의 ‘transendental enterprise[아 프리오리(경험과 독립된) 요소들에 기초한 기획, 소위, 선험 철학적 기획]’의 정신 안에 있어야 한다: 말인즉, 우리는 <우리 발달의 일정 지점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알아차리는 외관상 안정된 세계를 우리가 갖게 되는 방식을 밝혀낼 의도>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표현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알아차리는 세상’에는, 세상 속으로 ‘던져진’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적 관념을 되뇌려는 의도는 없다. 전자의 표현은, [하이데거의 표현, ‘world disclouser’가 아닌], 삐아제의 관념, <우리의 경험-세계 구조를 결정짓는 상당수 개념들은, 두 살 이전, 쌓고 있는 것들에 대해 알아차림(意識)이 없는 때인 감각운동 시기에 구성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로, 스펜서가 그토록 우아하게 말했던 것처럼, 성인(成人)들로서: 

 

그와 같은 우주에 대한 우리 이해하기의 시작은, 그 우주가 목하 펼친 출연(現象) 발견하기가 아니라, 그 우주가 생기도록 우리가 최초로 했던 것 상기하기다 (Spencer Brown, 1973, p.104).

 

    우리가, 일상에서, 현실이라 (혹은 아주 드물게 실재라) 부르는 것은, 우리의 실제 경험 흐름에서 우리가 확립해서 사용, 관리하는 상대적 내구성을 지닌 지각적, 개념적 구조들의 영역이다. 이러한 경험적-실재(現實)는, 채택하고 싶은 인식론에 관계없이, 한 덩어리로는 우리한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조금 조금씩, <되돌아보면 일련의 층위들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단계들로>, 구축한다. 반복은 그러한 발달에 불가결한 인자이다. 반복을 제외하면, 주어진 아이템(項)이 현존 경험 맥락 너머에서 영속성을 갖는다고 주장할 다른 근거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떤 경험을 이전에 겪었던 완전히 같은 아이템의 두 번째 사례로 간주하기만 하면, 영속적 사물들에 대한 생각은 바로 생겨난다. 이러한 ‘개체 동일성’의 창조는 중대한 귀결들을 갖고 있다 (4장을 보라). 우리가 하나이자 같은 아이템에 대한 경험들로 간주하고 싶은 두 경험들이 즉시 이어지지 않고 있을 경우, 그때 우리는 그 아이템이 생존할 수 있는 방식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말하자면, 개체로서 그 아이템을, 우리 경험 흐름에서 우리가 그것 이외의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 다른 어딘가에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 경험장(經驗場) 밖에서 벌어지는 ‘존재’의 상태 혹은 그러한 조건으로서 ‘실존’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실존을 취한 사물(事&物)들은, 우리 주의가 다른 곳에 있는 동안, 있기 위해 속할 공간(空間)과 지속을 위한 시간(時間)을 요구한다. 달리 말해, 우리 경험에서 우리가 반복할 수 있는 개체 동일성을 창조함으로써, 우리는 완벽하게 구비된, <그 구비된 것들을 우리가 경험하든 안하든 실존하는>, 독립된 세계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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