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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의 권능(power of symbols)

    상징의 권능

 

 

 

 

 

단어에 대한 의미론적 차원의 상세 모델은 7장에서 제시할 것이다. 단어 사용에서 재인과 재연의 역할을 논하기 위해, 여기서는, 간단하지만 불가결한 조건 두 가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첫째, 발화시 단어 조성 음소들 또는 작문시 단어 조성 그래픽 표식들은 반드시 자신의 어휘들 가운데 해당 구체적 아이템(項)들로 재인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재인 능력은, 발달 과정에서, 단어를 자발적으로 재연하는 그리고 생산하는 능력에 앞선다.

 

 

 

 

 

    단어가 행위 형식에서 그저 특정 반응만을  야기하고 있는 경우, 이를테면, 그 단어가 명령으로 쓰일 때, 나는 그 단어를 ‘신호’라 부른다. 두 번째 조건이 만족되고 있는 경우, 나는 그 단어가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단어 ‘상징’에 대한 내 용법은 수잔 랑거(Susanne Langer)(1948)를 따르며, 상징은 그것의 지대 대상(指示體)와 아이코닉한 관계를 지녀야 한다는 삐아제 용법과 같지는 않다. 

 

 

 

 

 

 내 용어 체계에서, 단어가 사용자한테서 추상된 재연을 펼쳐내도록 할 때에만, 그것은 상징으로 간주될 것이다. 고로, 단어/상징은, 경험에서 추상된 그리고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일반화된 특정 개념 구조와 연합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일단 단어가 상징으로 작동되고, 이어, 그 연합된 의미가 격리(추상)되었던 재연된 경험 토막들로 펼쳐지기만 한다면, 그 단어의 권능은 요긴하게 더 멀리 확장될 수 있다. 그 단어가 개별 사용자들한테 더욱 능숙해짐에 따라, 그 연합된 개념 구조는 더 이상 실제로 완전 구동되는 재연으로 펼쳐낼 필요가 없게 된다. 사용자들은 그 단어 사건(出現)을 일종의 ‘포인터(指示者)’로 간단히 적재(裝着)하고, 이후 특정 순간 필요할 경우 쫓아간다. 이것은, 나한테, 국부적 지각 구성에 기초한 대상 알아보기 깜냥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상징 활동 맥락에서, 이러한 깜냥은 미묘하며 또한 중요하다. 다음 사례는 내가 말하려는 걸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의 유럽 여행담에서 지명 ‘파리’를 듣거나 읽는 경우, 당신은 그 단어를 그 단어와 연합시킨 적이 있는 다양한 경험에서 지시된 대상들 – 이를테면, 유럽 지도 위 특정 점, 처음 잠깐 본 에펠탑, 루브르의 모나리자 – 을 가리키는 포인터로 적재(레지스터)할 수 있다; 하지만, 여행담이 곧바로 런던으로 바뀌면, 그 관련 경험들 가운데 여하한 것도 실제 재연으로 완벽히 구동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곧이어, 맥락 혹은 대화가 그 경험을 요청하면, 파리에 대한 언급으로 돌아가 연합된 재연들 가운데 하나를 전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상징 기능을 ‘가리키기’로 골라 칭한 까닭은, <단어/상징은 특정 재연들로 가는 경로를 열거나 활성화하는 권능을 획득하면서도, 그 능숙한 상징 사용자한테 그때 그곳의 그 재연들을 펼쳐내도록 강제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 최선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능은, 부연하자면, 아이들의 수 개념 획득에 대한 우리 이론의 중심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Steffe, Glasersfeld, Richards and Cobb, 1983). 이 이론에서, 추상적 수 개념의 최초 현시로 입증된 것은, <특정 수 단어가 ‘하나’에서 그 주어진 단어까지 표준 수 단어 배열의 모든 항(項)들의 순차적 일대일 정렬을 함축 혹은 가리키고 있음을 (그리고 그 항들은 모두 무언가 세어질 수 있는 아이템들과 같이 정렬될 수 있음을), 그 주체가, 세지 않고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실상, 이를 근거로 우리가 믿는 바, 우리는, 성인으로서, <이를테면, 우리는 숫자(상징) ‘381,517’이 무슨 뜻인지를 안다고, 그토록 많은 일련의 이산적 경험 아이템들을 우리한테 재연하는 일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수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익숙한 세기 절차(혹은 다른 수학적 방법)에서 최종 요소라는 것 때문이다. 

 

 

 

 

 

    수학에서, 상징의 이러한 함축 형식은 너무 흔해 보통 그냥 지나치게 된다. 이를테면, 당신이 <정오각형의 한 변은 이 다각형의 외접원의 반지름에 를 곱한 1/2과 같다>고 하는 문장을 읽고 있을 때, 당신이 이 상징들이 가리키는 조작(演算)들을 알고 있다면, 이 진술을 이해하기 위해 제곱근들을 그릴 필요는 없다. 잠재적 능력으로 충분하며, 실제 조작은 이행(또는 완료)될 필요가 없다. <수학적 표현들은 그것들이 상징하는 조작들을 이행하지 않고도 이해될 수 있다>는 바는 너무 자주 당연시되고 있기에, 형식주의 수학자들은 가끔씩 넋을 잃고, <상징 조작(manipulation)이 곧 수학이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상징들이 가리키는 심적 조작(operation)들이 없다면, 그 상징들은 의미 없는 표식들로 환원된다 (Hersh, 1979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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