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사회적 자아(Social Self)

매우 기본적인 이들 고찰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은 개체의 자아 개념의 구성과 진화에서 사회적 성분에 대한 분석일 것이다. 사회 심리학자, 폴 세코드가 설명한 대로: 

 

그(個體)의 세계에서 다소 안정된 ‘것’으로서 그의 특정 인물에 대한 관념 발달시키기에서 필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타 인물들이 예측 가능한 방식들로 행동(處身)하고 있음에 대한 그의 깨달음일 것이다 … 많은 경험으로 시간을 보낸 이후에야 그 개체는 마침내 자기 자신과 연합된 상대적으로 안정된 본성의 최소한 몇몇 속성들을 찾아낸다. 대상으로서 자아와 에이전트로서 자아 모두 이에 해당된다. (Secord and Peevers, 1974, p.121)

 

    구성론적 조망에서, 이는 분명 바이어블한 견해일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아이들에 대한 관찰로 확증되었는지 여부에 대해 나는 아는 바 없다. 확증된 바가 없다면 그것은 사회 심리학자들한테 보람찬 탐구일 것이다.

 

    한편, 토대와 관련한 이론적 까다로움이 하나 있다. 만약, 타자들의 반응에서 내 자신한테 부여할 속성들에 관한 지시를 끌어내고 있다면, 그리고 이들 타자들에 대한 내 지식이 나 자신의 구성 결과라면, 그 절차에는 고유한 순환성이 있다. 내 조망에서, 이것이 악순환이 아닌 까닭은, 우리한테는 우리 좋을대로 타자들을 구성할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여타 모든 구성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든 타자 ‘모델들’ 역시 우리 경험에서 바이어블한 것들로 판명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들은 버려져야 한다.

 

    우리의 여타 개인들에 대한 구성이 이러한 바이어빌러티에 의존한다는 점은, 여타 합리적 지식이론들과 마찬가지로 구성론에서도 흐릿한 영역, 윤리, 그 방향으로 이끄는 귀결을 하나 갖고 있다. 그 영역이 불명료함에도, 개체가 생각하기와 행하기 방식들의 상호주관적 바이어빌러티를 확립하려면 타자들의 확증이 필요 하다는 사실에는, 자율적 구성자로서 타자들에 대한 염려/배려가 수반된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우리 생각에 따르도록 강제할 경우, 우리는 그들을 확증 제공자로서는 실상(ipso facto) 무력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칸트의 ‘실천 명법’의 또 다른 정식이다:

 

당신 자신만이 아닌 타자들한테도 있는 인간성을 결단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항상 행하라. (Kant, 1785, p.429) 

 

    생각하기 존재들은, 그의 설명으로, 그들 각자의 목적(存在-理由)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다른 여하한 목적으로도 교체되면 안 된다 (ibid., p.428). 엄밀히 말해, 이는 ‘윤리적’ 준칙이 아닌 윤리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 이 조건으로 주장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배려해야 하며, 그들을 대상으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모든 윤리 철학들은 암묵적으로 이러한 전제(當然視)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왜 그러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구성론은 그 기본적 이유를 최소한 하나는 제공한다. 이러한 조망에서, 개체로서 주체한테 생각하기와 행하기의 상호주관적 바이어빌러티를 확립하기 위한 여타 다른 사람들의 필요(必要)란, 그러한 타자들에 대해 조마조마(念慮/配慮)하는 마음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타자들이 배려되어야 하는 까닭은, 더욱 견고한 경험적-실재(現實) 구성에 있어 그 무엇도 그들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체로는 여하한 윤리–준칙도 구성하지 않지만, 윤리 발달을 위한 합리적 기초 하나를 주고 있다. 내 강조하는 바, 행위나 사고 스킴들의 바이어빌러티는 언제나 특정 목표들과 관련되어 가늠되기에, 윤리[ethics: 한 개인의 행동을 제어하는 도덕적 ‘원리(準則)들 또는 원리들의 체계’] 자체는 정말이지 실제로 이러한 바이어빌러티에 기초할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윤리가 반드시 그 자신을 현시해야 하는 곳은 바로 목표들 선택하기에서다.

 

 

RC(1995)의 개념적 네트워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