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변화(change)

        변화 개념

 

적자(適者)가 우리 경험 세계를 만들어 갖추는데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 구조들 가운데 하나는 단어 ‘변화’로 지시된 개념이다. 언어 사용자가 자신의 개념들을 구축하는 방식을 우리가 주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두 가지 작업으로 탐구할 수는 있다. 첫째, 그 단어로 묘사, 기술하고자 했던 상황들이 어떤 종류인지를 검토하라; 둘째, 그와 연합된 개념으로 일정한 경험적 상황들을 적절히 비추어 보기 위해서 편입시켜야 하는 요소들은 어떤 것들인지, 논리적 관점에서, 풀어보라. 변화 개념에 이 작업을 할 경우 즉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한테 기억이 없다면 변화를 구상할 기회란 없을 것이란 점이다. 변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경험의 두 순간을 고려하고 차이를 하나 찾아야 한다.

 

    이러한 하나 이상의 경험의 필요는 이미 제논의 화살 역설에 내재되어 있었다. 날아가는 화살 하나를 주시하는 경우, 화살이 활을 떠나는 순간부터 움직이며 목표를 맞추는 순간까지 위치를 달리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화살이 나는 가운데 어떤 한 순간 그 화살에 주목할 경우,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제논이 영화를 알리는 없었겠지만, 오늘날 영화 형식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그가 제안했던 것의 완벽한 도해(圖解)다. 날아가는 화살을 보여주는 영화는 정지된 일련의 프레임들로 조성될 것이다. 각각의 프레임에서 정지된 화살들은 약간씩 다른 지점에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한 장의 프레임만을 본다면, 화살이 움직이고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화살과 관련된 여타 경험들에서 유추로 얻은 추론일 것이다. 프레임 한 장 그 자체로는 여하한 운동(動勢)도 담을 수 없다. 

 

    이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제레미 벤담은 그 점을 명확히 진술했다:   

 

어떤 물체에 대해 ‘그 물체가 움직였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시간 영역(場)의 상이한 부분들에서 그 물체가 공간 영역(場)의 상이한 부분들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Bendam, in Ogden, 1959, p.115)

 

    운동에 대한 지식은 관찰자에 의해 경험 장에서 [동의 운영이 아닌 구성된 지각 현상으로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관심은 운동에 대한 지식에 있지, ‘실재하는’ 화살이 움직이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에 있지 않다는 것에 주의하라. 영화 필름이 훌륭한 도해(圖解)가 되는 까닭은, 정확히, 거기 있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사된 필름을 볼 때 우리는 운동을 본다. 그래서 일어나는 의문: 이러한 경험은 어떻게 발생될 수 있을까?

 

    그 분석은, 필히, 우리한테는 최소한 두 장의 연이은 경험 프레임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케카토 방법은 각각의 프레임이 요청하는 최소 조건들 맵핑(寫像)시키기에 있다. 고로, 우리는 경험 흐름의 두 순간을 표시한다: t1과 t2. 

 

    ‘변화’를 말하려면, 또한, 차이 하나를 지각하거나 구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색깔, 모양, 크기, 위치, 또는 등등의 것들에서 차이다. 프레임이 배경을 담고 있다면, 화살의 위치는 다른 보이는 아이템(項)들과 관계로 정의될 수 있다; 배경에 아무 것도 없다면, 화살 위치는 오직 그 프레임의 모서리들과 관계로만 정의될 수 있다. 두 장의 프레임이 같은 지점에 있는 화살을 보여줄 경우, 그 화살이 움직였다고 말할 수 없다. 위치에서 차이 자체로만은, 변화를 말하기에, 충분치 않다 – 그 차이는, 화살의 경우처럼, 우리가 움직였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의 속성이 되어야 한다. 

 

    화살 대신, 내가 작은 푸른 자두를 보이고 곧바로 좀 더 큰 검붉은 자두를 보이는 경우, 당신은 변화를 말하고픈 생각(意志)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푸른 자두가 나무에 달려 있었고, 몇 주 후 당신이 그것을 다시 주시했을 때 검붉은 자두를 보았다면, 당신은 그것이 색깔이 변했다고, 실은, 그것이 익었다고 말할 것이다. 달리 말해, 개념 ‘변화’에는 경험 흐름의 두 순간에 ‘같은’ 대상으로 간주된 대상에서 지각된 차이 하나가 필요하다.

 

    하지만 같음이란, ‘대상 영속’의 맥락에서 설명한 것처럼, 보기와는 달리 그리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만들어지는 결정적 구별을 예지했다: 

  

다시 영구적 ‘사물들’; ‘같은’ 사물 그리고 그것의 다양한 ‘현상들’과 ‘변형들’; 사물의 상이한 ‘종류들’ … 이들 개념 도구들을 자신의 경험 흐름에 적용해 실제 정돈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극히 작다. 이들 도구들 가운데, 우리의 가장 저급한 조상들이 필시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모호하고 부정확하게 사용했던 개념은, ‘또 같은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 만약 그들한테 그 같은 것이 안 보이는 사이 내내 유지됐던 ‘사물’인지 아닌지 묻는다면, 그들은 필시 어쩔 줄 모르며, 자신들은 결코 그런 질문을 해본 적도, 그런 견지로는 소재(質料)들을 고려한 적도 없다 할 것이다. (James, 1907/1955, p.119)

 

    우리 당대의 많은 이들 역시 이러한 질문을 고려한 적이 없다. 식탁 위 와인 잔들이나 그 주위 의자들에 당신이 귀속시킬 수도 있는 같음은 ‘동등(同等)’의 같음일 것이며, 이것으로 변화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변화 개념 구성에 수반되는 같음은 ‘개체 동일성’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변했다고 말하고 싶은 그것은 반드시 두 프레임들에서 완전히 똑같은 개체여야 한다.   

 

    나는 이제 그 개념의 도식적 재현(再現)을, ‘X’로 화살 지시하기와 그것의 서로 다른 위치들 표시하기로, 완성할 수 있다. X가 연이은 프레임들에서 완전히 같은 화살(개체 동일성)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 대신, 아래 그림에서 ‘≡’ 등호로 보이고 있다. 

 

위치변화.jpg

 

 

    자두의 경우, 변화–도식(圖式)의 구조는 비슷하겠지만, 화살 경험에서 변화를 결정하는 위치들 대신, 서로 다른 색깔들이 t1과 t2에서 각각 X와 연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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