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배우기(learning)

        배우기

 

삐아제의 저작에서 창발한 배우기 이론은 다음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특정 방향으로 인지 변화와 배우기가 일어나는 경우란, 스킴이 기대된 결과의 산출 대신 요동으로 이끌리고, 그 요동이 조정으로 이끌려, 평형을 유지하거나 재차 확립할 때다.**

 

      ** 물론, 또한 예기치 않은 일련의 경험으로 발생한 요동들에서 생겨난 굉장히 많은 우연한 배움들이 있다.  

 

    배우기와 그것이 창조한 지식은, 이렇게, 명백히 도구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금, 삐아제 해석하기에 있어 서두르거나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그의 인지이론은 두 종류의 ‘바이어빌러티(viability)’를 수반하며, 따라서 쌍층적 도구주의이다. 감각운동 수준에서 바이어블한 행위-스킴들의 도구로서 역할은, 유기체들이 그들 경험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감각평형 그리고 생존과 같은 그들 목표들>을 성취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또 한편, 반성적 추상 수준에서 조작적 스킴들의 도구로서 역할은, 유기체들이 그들 경험의 현 지점에서 바이어블한 것들로 판명된 생각하기뿐만 아니라 행하기 경로들까지 보여주는 <구조들로 조성된 비교적 일관된 개념적 네트워크>를 획득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이러한 상위의 한층 포괄적인 추상 수준에서 개념들의 바이어빌러티를 가늠하는 기준은, 그것들의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가능한 최대의 개념적 네트워크에 그 개념들이 무모순적으로 맞아들고 있는가> 여부다. 이러한 면은 구성주의가 과학의 관행을 침식한다는 잦은 불평을 잠재울 것이다. 이 두 번째 수준에서 바이어빌러티의 최우선적 핵심 기준은, 실상, 철학자들이 ‘진리에 대한 일관성 이론’이라 불렀던 것과 유사하다: 이 이론은 개념적 양립-가능성을 문제로 삼는다. 게다가, 과학이나 철학 모델들에서처럼, 다른 기준들, 다루기 용이함, 경제성, 단순성, 또는 수학자들의 ‘엘레강스[elegance: 멋진 또는 매력적인 스타일 또는 양식을 갖춘 상태] ’와 같은 기준들은, 같은 여건에서 바이어블한 것으로 동등하게 증명된 모델이나 이론들을 고를 때 사용될 수 있다.

 

    첫 번째 도구성(道具性)의 종류는 (관대한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경멸해왔던) ‘공리적(utilitarian)’이라고 불릴 수 있다; 두 번째, 개념적 일관성을 문제시하는 도구성은, 엄밀히 인식론적이며, 자체로 철학적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후자의 도구성은 지식 구상에 있어 근본적 전환을, 말인즉, 다다를 수 없는 존재론적 검사를 요청하는 ‘진리(Truth)’라는 역설적 구상을 제거하는 전환을 재차 강조한다.

 

    존재론적 실재와 대응 대신 경험 세계의 바이어빌러티를 채택하는 조치는, 귀납적 추론과 일반화들로 얻어진 지식에도 적용된다. 이는 논리학과 수학의 연역적 추론들에는 여하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삐아제 조망에서, 이들 연역 영역에서 결론들의 확실성은, 감각운동 수준 스킴들의 결과가 아닌 심적 조작에 속하는 것이다 (Beth and Piaget 1961; Glasersfeld, 1985를 보라). 

 

    개념 배우기와 관련해, 나는 거의 논해지지 않는 특징 하나를 강조하고 싶다. 경험 요소들이 재연되며, 실제 경험한 적이 없는 가설-상황 형성을 위해 일단 결합될 수만 있다면, 온갖 류의 사고 실험을 해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실험은, <내가 이거나 저걸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와 같은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될 수 있다. 게다가, 사고 실험은 물리학과 수학의 가장 정교한 추상적 문제들을 숙고할 수도 있다. 그것들의 결과가 응용되어 실제 바이어블한 성과들을 끌어낼 수 있는 한, 사고 실험은 인지 영역에서 필시 가장 강력할 배우기 절차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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