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반성(reflection)

1.

 

제 5장 반성과 추상

 

 

20세기로 넘기 직전 존 듀이는 썼다: ‘성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심적 경험의 본성과 기원에 관해 자신들을 끊임없이 속이고 있다’ (Mclellan and Dewey, 1908, p.27). 그의 작업의 대부분은 기만들 까발리기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추세는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도래한 것은 행동(行態)주의 시대였다. 행동주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하나는, 그 신조의 그토록 많은 지도자와 추종자들이 자신들을 경험론자로 주장하며, 그들 선조로 존 로크를 인용하고, 그리고 이리하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로크의 주저(主著)인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로크는 이 저작을 권과 장, 그리고 번호 매겨진 절들로 나누었다.

 

 II권 1장을 지나치지 않고 읽었다면, 아주 놀랄만한 것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바로 첫머리에, 그들을 약간은 신중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는 주의 사항이 있다:        

 

이해하기(悟性)는, 눈처럼, 우리한테 그밖에 모든 것을 보고 지각하도록 하는 반면 그 자신을 주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과 거리를 두고 그것을 그 자신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에는 기예와 고통이 필요하다. (John Locke, 1690, Introduction, par.1)

 

    그래서, 로크는 II권 첫머리에서 ‘마음’과 그것의 권능, ‘반성’ 없이는 해볼 요량이 없다는 걸 아주 분명히 하고 있다. 2절 머릿글: ‘모든 생각(觀念)들은 감각 혹은 반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4절 부제: ‘우리 마음들의 조작들’. 로크가 이들 용어로 의미한 것을 설명한 곳은 바로 이곳이다: 

 

이어 이러한 담론을 따르는 가운데, 반성으로, <나>는, 마음 그 자신의 조작들을 취하는 <알아차림(注意)>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것이고, 그러한 이해하기(悟性) 가운데 이들 조작에 대한 생각(念)을 산출하는 이성으로, 그것들에 대한 태도(觀)을 취하는 <알아차림(注視)>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것이다. (Locke, 1690, Book II, Chapter I, par.4) 

 

    우리 (20)세기, 반성 개념을 열정적으로 방어, 확장시켰던 이는 바로 쟝 삐아제다. 마음과 그것의 조작들을 부정했고, 모든 알기를 <객관적 감지 데이터들[Qualia: 感覺質]>의 수동적 수용으로 환원시키고 싶었던 경험론자들과 멀리할 기회라면, 삐아제는 언제든 붙잡았다. 그럼에도, 그가 로크의 관념 구분에 동의하는 데 곤란을 느끼지 않았던 까닭은 자신의 ‘형상적’과 ‘조작적’ 지식 구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내 확신컨데, 심적 경험을 부여된 것으로 취하는 자기 기만 방식의 위험에 관한 듀이의 견해에 동의했을 것이다. 해서, 나는 이러한 위험을 경계코자, 다음 쪽들에서, 반성, 추상, 재연, 그리고 상징들의 용법에 대해 우선 나 자신의 견해를 논하고, 이어 반성에 대한 삐아제 견해에 관한 잠정적 해석을 논할 것이다. 

 

 

2.

 

        반성

 

사과를 하나 먹고, 바로, 다음 사과를 한 입 씹는 이한테 둘 가운데 더 단 것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 경우, 그 사람이 답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실상, 우리는 이들 여건에서 정상적 인물이라면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라는 걸 당연히 여길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판단이 어떻게 내려지는가를 관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판단 형성에 필수적으로 보이는 몇몇 단계들을 가설로 설정할 수는 있다. 첫 번째 사과 먹기에 동반된 감각들은, 최소한 질문을 알아들을 때까지는, 상기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기억은, 하인츠 폰 푀르스터(1965)가 지적했듯이, 고정 불변의 기록일 수 없다 (두뇌 용량은, 분자 수준까지 가더라도, 그렇게 충분한 크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기억은 저장 메커니즘보다는 일종의 동적, 즉, 재구성 메커니즘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이어 그것들은 재연(再演)되며, 두 번째 사과를 씹을 때 동반된 감각들과 (그 인물(人物)이 ‘단맛’으로 칭했던 그 어떤 것을 참작하며)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재연과 비교하기는, 비교를 위한 소재를 공급했던 감각 과정들과는 상이한 조작하기 방식이다. 경험 반성하기는 경험 얻기와 분명코 같은 것이 아니다.

 

    로크 이후 100년, 1795년, 빌헬름 폰 훔볼트는 격언(格言) 몇 개를 간결하게 적었고, 그것들은 그의 사후 그의 편집자가 머릿글, ‘생각하기와 말하기에 관해’ 밑에 삽입했다. 처음 세 개의 격언은 반성을 다루고 있다:

 

1 생각하기의 핵심은 반성하기, 즉, 생각<하는> 것을 생각<되고> 있는 것에서 구별하기에 있다.

2 반성하기 위해, 반드시 마음은 자신의 진행 활동 가운데 잠깐 멈춰서 있어야 하며, 순간 보였던 것을 단위로 파악(把握)해야 하며, 그리고 그런 연후 그것을 자신과 마주보는 대상으로 설정해야 한다. 

3 마음은 이어 단위들을 (그것들 몇몇은 그 방식으로 창조될 수 있다) 비교하며,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분리하고 연결시킨다. (Humboldt, 1907, p.581) 영어로 된 최초의 폰 훔볼트의 격언들 번역본은 로텐쉬트라이히(Rotenstreich)가 출판했다(1974). 여기서 약간 다르게 번역한 것들은 내 것이다.

 

 

    우리가 직접적 경험 흐름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한테 그 한 토막을 재연하도록, 그리고 그것이 직접 경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이에도, 그것을 마치 직접 경험인 것처럼 주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신비한 깜냥에 대한 기술(記述)로, 훔볼트 것보다, 내 알기로, 더 나은 것은 없다. 내가 그 깜냥을 신비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 그것을 스위치 켜고 끌 정도로 쉽게 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이 획득될 수 있을 방식을 제시할 (모든 정보처리 모델들 가운데 최소한 단 하나의) 모델의 단초마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 보였던 것을 단위로 파악하는 일’은, 경험의 지속적 흐름 밖으로 그것을 잘라내는 일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일종의 추상(抽象), 즉, 가장 단순한 종류의 추상이다. 집중된 주의(注意)는, 경험 한 토막을 골라, 그것을 <앞서 왔던 것에서 & 오고 있는 것에서> 격리하고, 그리고 그것을 <그 자체로> 폐쇄(孤立)된 것으로 대한다. 마음한테, ‘그것을 자신과 마주보는 대상으로 설정하는 일’은, 그때, 그것을 다시 펼쳐 보이는 일, 즉, 재연하는 일이다. 다음 두 절에서, 나는 추상과 재연을 차례로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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