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꿈(dream)

1.

 

필요한 감각 소재를 당장의 지각 장에서 가용할 수 없는 경우 개념 구조들 생산에 수반된 노고와 곤란의 병발적 증가는, 모든 재연 형식들에서, 특히, 행위와 관련해 추상된 프로그램의 재-제정(re-enactment)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재연에는, 재연하려 하는 것이 경험적 대상이든, 행위나 조작 프로그램이든, 그 실행을 위해 어느 정도의 감각 소재가 필요하다. 이러한 기본 조건으로 말미암아, 내 믿기로, 버클리는 추상된 일반 관념의 ‘실존’에 반대하는 자신의 논증에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상, 매번 우리가 그와 같은 일반 관념을 우리한테 재연할 때마다, 그것의 구동에는 그것이 추상되어 나왔던 류(類)에 속하는 소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구체적 관념으로 전환된다.

 

    이 마지막 조건은, <현재 구성물과 이것으로 재연하려 한 것 사이에는 어떤 동형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재차 정식화될 수 있다. 이러한 동형관계(isomorphism)와 관련되는 것은, 사물-자체가 아니라, 명확히, 집중하고픈 (또는 집중하게 된) 그러한 과거 경험의 면면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한테는 실비오 케카토의 예리한 관찰 하나가 항상 떠오른다. 그가 말하길, 우리는 꿈을 꿀 때, 지각 과정과는 반대 방향으로 조작한다: 대상 개념들로 시작해서, 그 꿈의 줄거리에 필요한 그것들의 지각적 특징들 그 이상은 결코 시각화할 수 없다.** 

 

** 이를 케카토는 ‘의미’를 구성, 유지하는 조작들에 관한 우리 토론들에서 말했다 (1947-52). 

 

2.

 

이러한 외재화의 진행과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은, 그 대상들을, 실제 이용할 수 없을 때, 재연하는 능력의 발달이다. 한편, 이러한 중첩된 구성으로 결과된 ‘내부’과 ‘외부’는, 관찰자가 <관찰된 유기체/그것의 환경>을 만든 이분법과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그 <내부/외부>는 주체의 개념화 결과로서, 그 주체는 이를 써서 재연된 아이템들을 기억과 구별하고, 실제 구성되고 있는 아이템들을 감각운동 소재와 구별한다. 그 구별은, <‘눈에’ 선한 장면을 갖고 꿈에서 깨어나, 실상, 그것은 꿈이었고, 그 순간 실제 이용 가능한 감각 소재로 구성 가능한 여하한 것과도 결단코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때>, 어쩔 수 없이 하는 구별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내부, 외부 모두 경험이며, 그것들 사이 구분은, 고로, 경험의 두 유형들 사이 구분이지, 경험하기 주체와 (그 어떤 이에 의해 경험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기성의 ‘객관적’ 대상들 사이 구분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기를 알아차릴 정도가 되면, 그 두 가지 경험 유형은 우리가 바로 그것을 행하고 있는 주체라는 확신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가 깨어나 쾌청한 바닷가는 꿈의 일부였고 실제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음을 깨달을 때, 창밖을 지금 내다보는 이가 우리라는 것 못지않게 꿈꾸고 있던 이도 우리, 우리 자신들이었음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어느 쪽도 우리한테 우리 자신들을 ‘여타 물(物)들 가운데 하나의 물(物)로’ 보는 생각을 주고 있지는 않다.

 

-->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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