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관찰자와 관찰된 것들(The Observer and The Observed)

        관찰자와 관찰된 것들

 

삐아제 이론의 전제(先假定)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기 주체는 두 개의 기본 깜냥을 갖고 있다. 첫째, 감각과 운동의 경험 요소들을 정렬시킬 수 있다; 둘째, 그와 같은 정렬(協應)로 얻어진 개념 구조들이 진전된 경험 상황들에서도 ‘바이어블’한 것으로 확인될 경우, 장차 경험 다루기에 도움이 될 주기성과 규칙들을, 그 자신의 조작하기에서, 추상할 수 있다. 생각하기 주체가 정렬시키는 요소들은, ‘경험에서 얻어진’ 것들이기에, 정의상, 그 주체 시스템 안에 현존하는 것들이다. 그 시스템은, 결단코, 관찰자 관점에서 그 시스템 밖에 있는 것들로 보이는 아이템(項)들, 즉, 그 시스템의 경험을 야기한 ‘환경’ 요인들에 접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정렬은 전적으로 내적 사건이며, 고로, 그것은 정렬자한테는 항상 주관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삐아제가 연구하던 아이들한테만이 아니라, 과학자든 순진한 구경꾼이든, 그 어떤 관찰자한테도 해당된다. 그 누구도 이러한 경험의 근원적 주관성은 피할 수 없으며, ‘신의 안목(神瞰圖)’에** 접근할 수 있다고 사칭하는 철학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들도, 모든 인지하기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감각운동 경험과 개념적 경험에서 결론들을 끌어냈으며, 그들 결론들에 대한 여하한 설명, 즉, 그들 ‘지식’ 역시 반드시 내적 사건들에 입각할 수밖에 없으며, 그밖에 설정된 그 어떤 요소들에도 기댈 수 없다.

 

** 이 표현(God’s eye view)은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의 것이다.

 

     한편으로, 살며 경험하는 주체 자신의 관점, 그리고 또 한편으로, 그와 같은 주체가 어떻게 지식을 구성하는지 이해하려 하는 관찰자 관점 사이를, 삐아제는 선명하게 구별했다. 

 

가장 먼저, 개체로서 주체, . . . 그리고 같은 수준에서는 모든 주체들이 공유하는 인식 주체 또는 인지 핵심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 다음, 필히 대비되어야 할 것으로, 한편에는, (항상 파편적이며 종종 일그러지는) 의식에 도달이 있고,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 주체가 결과만 알지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모르는 자신의 지적 활동에서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주체를 그 ‘자아’에서 그리고 그것이 ‘살고 있는’ 것들에서 해리(解離)시키면, 남는 것은 그 주체의 조작들, 말하자면, 그 주체가 자신의 행위들의 일반화로 얻은 정렬(協應)들에서 반성적 추상으로 끌어낸 것들이다. (Piaget, 1970b, p.120)

 

    인지 모델 구성을 위해, 관찰자들이 정렬들로 범주화 한 것, 그리고 관찰된 살기 주체가 그것들에서 반성적 추상으로 얻은 결과들을, 그 주체한테서 ‘해리시키고’ 있는 자는 바로 관찰자들이다. 오직 관찰자들만이, 특정 주체와 그의 환경과 상호작용을 지시할 수 있으며, 그 주체의 (생물학적/개념적) 구조들이, 관찰자 관점에서 관찰된 그 주체의 살며 일하는 세상과 맺는 관계를 특징지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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