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관념론(idealism)

플라톤의 관념론

 

오늘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여하한 세계관, 세상에 대한 그 어떤 사람의 시각도 (동물, 기계, 신의 시각이 아닌) 필히 인간의 시각(見解)이다. 그 어떤 신비한 직접적 계시 형식을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지식이라 부르는 것 - 아이디어나 개념, 이들을 연결하는 관계, 당신 자신과 세상에 대한 당신 이미지 - 모두 인간의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신이 그것을 만들어냈던 방식이 당신 것이며, 그것이 맘에 들든 안 들든, 당신은 그러한 인간 방식들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서양 세계의 위대한 철학자 모두 이러한 논증이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능함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우회하는 방식을 찾으려 분투했다. 형이상학의 가면을 쓰고 이런 저런 형식으로, 공공연히 또는 은밀히, 신비주의나 종교적 계시로 도망쳤다. 

 

플라톤은 지식 개념이 갖는 역설적 특성을 분명 알아차렸고 이를 네 부분으로 나뉜 일련의 은유로 제거코자 했다(The Republic, 509d–517b). 처음 두 분절은 감지(sense)들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지각에서 얻어지는 사물의 형상들, 상상과 추측으로 만들어지는 그림자 이미지들. 이것들은 진짜, 말인즉, 실재하는 사물들이 아니기에, 그는 이를 그 유명한 동굴의 우화로 설명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확실한 지식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억견’[doxa: 통념에 따라 짐작이나 상상으로 하는 생각]만 존재한다. 세 번째 절은, 수학과 같은 사유의 산출물에 대한 이해(episteme:정당화 가능한 참된 믿음)를 주장하고 있다. 넷째 절에, 영구 불멸의 관념들, 미(美), 정의(正義), 그리고 선(善)을 언급하며, 그것들은 신의 우주 창조 이래 인간 개개인의 유산이 된 것들로, 바로 여기서 참된 지혜가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일련의 은유가 암시하는 것은, 누구든 인간 이성의 권능으로 동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신성한 진리(Truth)를 보는 데 이를 수 있다는 바와 같은, 발달 가능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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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천 년이나 앞서, 두 가지 상이한 종류의 지식이 있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그 구분은 플라톤이 제안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플라톤한테, 감각 경험은 ‘억견(通念)’으로, 이성은 ‘확실한 지식’으로 이끈다. 이제, 우리는 명백하나 틀릴 수 있는 경험 지식과 불멸의 신비적 계시 진리들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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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

그가 설명하지 않은 것은, 그는 왜 일차 성질들을 이차들의 실재성보다 덜 ‘상상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건, 경험론의 창시자가 여기서 플라톤의 관념론과 암묵적으로 결탁해 경험에서 비롯되지 않는 관념들이 있음을 전제(當然視)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의 합리적 관념론

 

따라서, 경험이란, 생각하기 주체가 매니폴드의 요소들로 정렬한(구성한) 것이다 - 그리고 오직 특정 사물들만 구성되고 그밖에 것들은 구성되지 않는다는 건, 이성의 구조에 따라 결정된 사실이다; 이 구조가 바로 칸트가 자신의 선험 철학, 제1의 주제로 삼은 것이다. 이 철학을 ‘합리적 관념론’이라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이 철학이 제안하는 모델은, 이성이 자기 자신으로 구성하여, 우주에 대한 견해를 전적으로 관념들로 환원시킨, 고심이 깃든, 독창적 모델이다. 이성 영역 너머 놓이는 그 무엇에 대해서든, 칸트는 용어 누머논(noumenon)을 사용했다; 그리고 단언하길, <누머논들에 대한 전제(當然視)가 합리적으로 불가피할지라도, 그것들은 변함없이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네거티브’ 신학자들의 입장으로 되돌아가, 그의 불가지론 모델로 그보다 앞선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과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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