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과거 경험들 재연하기(Re-presenting past experiences)

        과거 경험들 재연하기 

 

인간 마음이 자신한테, 이젠 아니지만, 실제 경험이었던 것들을 다시 펼쳐 보일 수, 이른바, 재연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아주 흐릿한 관념조차 없지만, 이 순간 나는 40년 전 어느 겨울날 내가 올랐던 스위스 알프스 산길을 나한테 다시 펼쳐 보일 수 있다. 아무도 디딘 적이 없는 눈 위로 스키를 밀며 앞쪽으로 내 몸무게를 싣자, 나는 그 특이한 쓰윽, 빠드득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비탈면과 계곡의 등고선을 따라 이어지고 있는, 앞에는 기획(企劃)으로 뒤에는 산물(産物)로 내가 만들고 있는, 궤적을 볼 수 있고, 나는 이어 안정적 기울기로 이 궤도를 유지하려는 그 지속적 애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한숨 한숨에 배인, 차고 메마른 공기와 눈부신 햇살의 그 비길 바 없는 조합을 맡을 수 있다. 

 

    이 맥락에서 ‘듣다’, ‘보다’, ‘느끼다’, ‘맡다’가 지시하는 것이, 직접 지각 맥락에서 벌어진 활동들과 완전히 똑같은 것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내가 지각할 때, 나는 내 눈, 귀, 코에서 온다고 여겨지는 신호들을 레지스터(記錄)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뭔가를 내 자신한테 재연할 때, 그것은 또 다른 원천, 전적으로 내부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출처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둘 사이 차이는, 대체로, 내가 지각할 때, 내 몸의 운동으로 내 지각물들이 수정될 수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서 생겨난다. 내가 나 자신한테 재연하는 과거는, 그와 달리, 현재 내가 움직이는 방식으로 영향 받지 않는다. 

 

    말했던 것처럼, 재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는 모른다. 사실, 그 누구도, 오늘날, 그것의 작동 방식을 알지 못한다. 인간 의식에 대한 모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인간 기억에 대한 그럴싸한 기능적 모델의 단초마저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의식이라 부르고 싶은 것만이 아니라 기억이라 부르고 싶은 것 또한, 내가 기술하고 있던 과거 경험들에 대한 일종의 re-play(再-上演)에 수반되고 있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내가 40년 전 익숙한 경험이었던 어떤 것을 내 자신한테 재연하는 경우, 그것은 또 다른 시기 경험이었던 어떤 것을 재-상연하거나 재구성하는 것과, 정말이지, 거의 같은 것이다. 변함없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재연된 것은 여하한 여건에서도 내 자신의 경험들의 재-상연이지, 독립적이자 객관적인 세상의 한 조각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re-presentation(再演)을 고집하는 까닭이다. 내가 ‘re-’를 강조한 까닭은, 그것으로 다른 어떤 시기 주체 경험 세계에서 현존했던 어떤 것에 대한 반복임을 분명히 하고 싶기 때문이다.**    단어 재연은 그때, 일반적으로, 이전 경험을 개체 의식으로 가져오는 일종의 심적 작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다. 더 명확히 하자면, 그것은 이전 경험을 조성했던 형상적 소재에 대한 회상(再收集)이다. 그 경험의 최초 발생 이후 그것의 재구성을 안내할 여하한 흔적이나 표식도 남기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회상은 전혀 불가능할 것이다. 

 

** 재연은, 또한, 자체로는 실제 경험된 적은 없지만 하나의 가능성으로 미래로 투사된 (상기(想起)된 요소들로 조성된) 새로운 재구성을 지시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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