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공간과 시간(space and time)

         공간과 시간

 

변화에 대한 구조적 패턴으로 열린 조망들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같음과 다름이라는 두 생각(觀念)의 동시-수반(隨伴)은 모순 현상을 창조하며, 고로, 요동을 발생시킬 수 있다. 다른 한편, 인과성에 대한 첫 관념이, 삐아제가 믿었던 것처럼, 흥미로운 결과를 야기한 행위 반복에서 일어나는 경우, 대상의 새로운 속성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같은 개체로서 간주된 그 대상의 그 속성이 호기심을 일으키리라 보는 것은 그럴법한 일이다. 이러한 호기심은, 이후 특정 발달 시기에, t1의 상황으로, 말인즉, 흥미로운 결과 이전의 상기된 상황으로 되돌아가, 그 이후의 프레임에서 그 대상의 새로운 속성에 대해 인과적으로 책임지울 수 있는 어떤 것을 식별해내도록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탐구는 연구 조사의 시작이자, 주어진 현상의 원인을 확립하려는 과학적 실험들이 노리는 전략으로 빠르게 이어질 것이다.

 

    두 번째  조망은, 차후 하나이자 똑같은 것으로 간주된 대상이 실제 경험 장에서는 현존치 않는 상태로 조성되는 주시 프레임들이 있다는 사실로 열린다. 이로써, 다른 것들에 주목하는 사이, 그것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내 앞서 제안했던 것처럼, 이에 필요한 것은, 대상들이 지각되지 않아도 그들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일종의 휴식처에 대한 구상이다. 내가 이러한 휴식처를 원시–공간(proto-space)이라 칭한 까닭은, 최초, 그것이 그 어떤 분절(分節)도 그 어떤 관계 구조도 갖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작할 때는 무정형의 저장고지만, 경험 장에 영속 대상들이 실제 나타날 때마다 <시각적 그리고 물리적 운동(動勢)들과 관계된 영속 대상들>이 그 저장고에 채워지는 것처럼, 이들 운동들에서 추상된 관계들은 그 저장고에 보다 차원 높은 공간의 영속 구조를 제공한다. 이러한 구성에 대해서는 포앙카레가 상세히 설명했다 (1952, p.51ff). 

 

    그 대상이 단속적(斷續的) 주시 프레임들에서 완전히 같은 개체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그 동일성이 일정 간격을 가로질러 뻗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연속성은 경험 장 밖에 놓이는 것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그 대상에 대한 현재 경험을 과거 어떤 경험과 고리 짓는 연속성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련의 실제 경험들과 평행으로 흐르는 이러한 외부 연속성을, 나는 원시–시간(proto-time)이라 불렀다. 이것 역시 최초에는 여하한 분할도 없는, 사건 없는 연속성이다. 하지만, 이후, 그 간격 동안 겪었던 주체의 실제 경험들의 배열은 그 연속성 위로 맵핑될 수 있고, 그렇게 그 연속성에 대리(代理)시키는 분절을 부여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일련의 실제 경험들이 사건 없는 <그 저장고에 있는 영속 대상들의 연속성(連續性)>에 사영(射影)될 때, ‘시간’ 개념은 창조될 수 있다. 시간 관계들의 구조는, 일련의 실제 경험들을, 그와 같이, 경험 장에 있지 않으며 자체로는 여하한 분절도 없는 연속성에 포개는 것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구조는 이들 경험들에 지속을 부여하며, ‘시간의 화살’로 가끔씩 불리는 방향성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사영된 경험들의 배열이 밤낮, 계절, 별의 운동과 같은 규칙적인 것들일 때, 연속성의 그러한 분절은 균일한 것이 되며, 무정형한 원시–시간은, 그렇게, 시계로 측정될 수 있는 실재하는 시간으로 바뀐다.

 

    이러한 구성은 비트겐쉬타인이 60년 전에 기술했던 것이다:

 

여하한 과정도 ‘시간의 경로’와 비교할 수는 없다 – 그러한 경로와 같은 것은 없다 – 다만, 또 다른 과정(이를테면, 시계 바늘의 운동)과만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

    고로, 사건들의 시간적 배열에 대한 기술은, 오로지, 우리 자신 또 다른 과정에 기댈 때만 가능한 일이다. (Wittgenstein, 1933, par.6. 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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