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경험과 실재(experience and reality)

경험과 실재

 

그래서, 삐아제 모델에서 그 주체가 그 자신의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접촉들은 항상 그리고 필히 같은 종류일 수밖에 없다: 개념 구조는 주체가 그것에 기대했던 결과를 야기하지 못했기에 실패한 것이다. 인지 구조는, 반드시 상기(想起)되어야 하는 바, 행위 그리고 사용과 결부되어 있다. 행위와 사용은 되는대로 움직이고 아무 때나 바꾸는 것 이상의 것이다 – 그것들은 ‘행위 스킴들’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와 같은 삐아제 접근을 행동주의의 자극–반응 접근과 물리학자들의 선형적 인과 사슬들 모두와 근본적으로 차별짓는 것은, 행위 스킴들의 명확한 목표–지향성이다. 삐아제가 틈나는 대로 주장했던 것처럼, 행위 스킴이 피드백 루프(되먹임 폐회로)와 상당히 유사한 까닭은, 그것에 고유한 동화와 조정의 이중 메커니즘들은 그것을 자기–규제(自律)토록 하기에, 고로, 그런 의미에서 순환적이기 때문이다 (이와 흡사한 사이버네틱스는 8장에서 다룰 것이다). 

 

지식과 실재 세상의 관계가, 그와 같이, 삐아제 모델에서 역전되는 것은, 여하한 개념 구조도 어떤 제약과 충돌하면 수정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 환경은 오로지 그와 같은 충돌들을 통해서만 그 자신을, 생각하기 주체한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체는, 고로, 여타 구조와 스킴들의 바이어블한 운영 방식을 확립하는 가운데 몇몇 것들이 제약들과 충돌했다는 것 그 이상을 알 수는 없다. 

 

이는, <어떤 시점에 살아 있는 생물 유기체들은 그때까지 성공적으로 생존했기에 바이어블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관계에서 닮음이나 ‘대응’을 추론해내는 것은 부조리(non sequitur)이며 엄청난 사기(虛說)에 다름 아니다. 장애들과 충돌을 피했다는 것에서, 그것들이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들로 이루어진 실재가 어떻게 구조화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충돌 또는 실패의 경험이 우리한테 말해주는 것은, 그저, 그 특정 경험 여건들에서 그 특정 스킴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더더구나, 그 실패는 그 세상 탓이 아니라 그 스킴에 내재한 암초나 모순 탓일 수도 있다. 역으로, 어떤 스킴이 성공한 경우,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그저, 그것이 ‘작동했던’ 데서 바이어블할 것이라는 점뿐이다. 이러한 바이어빌러티에서는 ‘실재’ 세상에 관한 그 어떤 추론도 끌어낼 수 없는 까닭은, 여타 무수한 스킴들 역시 작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지 모델의 가장 중요한 귀결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리가 ‘환경’ 또는 ‘실재 세상’으로 범주화했던 것과 부딪힌 충돌들에 대한 우리 지식을 명확히 표현하며 재연하는 방식은, 오직, 바이어블한 개념 구조들, 즉, 자체로는 아직 장애들과 접촉한 적이 없는 구조들에 입각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게다가, 충돌과 실패들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기껏해야, 실재를 ‘부정적’ 용어들로만 기술할 뿐이다. 인지 구조들이 존재론적 실재를 반영할 수 있으리라는 여하한 생각도 환상이다: 이를테면, 사물-자체들의 표면을 따라 <우리 감지들을 미끄러뜨리거나 도구들로 가늠하기>로 사물들의 존재적(ontic) 형상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래서 의도적 접촉들을 기도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우리가 움직이며 가늠하는 활동 영역으로서, 특히, 우리 움직임과 조작들이 투사되어 그려지는 영역으로서 시간과 공간은 우리 자신의 구성들이기에, 그것들에 기댄 여하한 설명도 우리 경험 세계를 초월할 수는 없다. 

 

요컨대, 내가 삐아제 작업과 최대한 양립-가능한 것으로 찾은 인식론적 조망은 도구주의적 시각으로, 여기서, 지식은 경험자와 독립된 세상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조망에서, 인지 구조들 – 행위-스킴, 개념, 규칙, 이론, 법칙들 – 은 최우선적으로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되는 것들이며, 성공은, 궁극적으로, 유기체가 요동들에 직면해 그 자신의 내적 평형을 획득, 유지, 확장시키려는 노력들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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