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객관적 실재(objective reality)

1.

 

 

 

 

 

서양 철학 출발부터, 인간 이성이 구성한 지식은 어떤 식으로든 독립된 실재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대다수 사상가한테, 그 관계는 재현(表象)의 일정 형식을 취해야 했다: 십중팔구, 불완전한, 뜬구름 같이 떠올랐다 사라질 재현(表象)일지라도, 실재의 몇몇 측면들만이라도 정확히 해석하는 그림이어야 했다. 이러한 접근 권능을, 버클리와 비코는, 이성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들은 그 곤란을 모면코자, 각자 방식으로, 저 실재 세상과 연결을 인류 모두의 창조자, 신을 경유해서 만들었다. 플라톤에서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관념론과 합리론의 모든 철학자들은 그들 체계들이 유아론으로 미끄러지는 걸, <말인즉, 세상에는 생각(思惟)하는 이의 주관적 마음을 제외한 그밖에 어떤 실존도 없다는 생각(思想)에 빠지는 걸>, 피하고자 신에 대한 생각(觀念)을 어떤 식으로든 끌어들였다. 

 

 

 

 

 

19세기 내내, 과학은 상상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확장되며 기술(技術) 발전을 위한 거대한 터전을 제공했다. 장치 설비와 기계들의 발전은 전에 없이 번창했다. 한편으로, 그것들로 서양과 그 너머 인간 경험 세계는 심대한 변화를 겪었고, 다른 한편, 그것들의 실용적성공은 그것들이 비롯된 이론들이 자체로 실재하는 세상의 재현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환상 강화를 도왔다. 그 세기 말엽, 인기 작가들만이 아니라 과학자들까지도, 중요한 문제들은 풀렸고 남은 일이란 여기저기 사소한 걸 마무리하는 것뿐이라고 공언했다 (see Bernal, 1971; p.665). 세상을 움직였던 이전의 신비로운 방식들은 모두 인과 관계로 환원되었다.

 

 

 

2.

도구주의를 위한 새로운 연료

http://www.cysys.pe.kr/zbxe/RRC/324519

 

 

 

3.                     http://www.cysys.pe.kr/zbxe/RRC/board_9/324431 개념 재연

 

전통적 문헌에서 쓰이고 있는, 특히, ‘representational knowledge(재현적 또는 표상적 지식)’과 같은 조합들에 쓰이는 용어와 관련해,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논리적이고, 둘째는 의미론적이다.

 

서구 인식론적 전통이 시작되었던 소크라테스 이전 학파들 시대, 이미, 상당수 사상가들한테, 실재하는 세상에 대한 대응 지식 구상(構想)이 망상(妄想)이라는 점은, 그와 같은 대응을 검사할 여하한 방식도 없었기에, 명백한 것이었다. 이들 사상가들이 경탄스러울 정도로 명확히 보았던 것은, 그밖에 뭔가를 그리고 있다고 가정된 재현(表象)의 우수성을 판단하려면, 그 재현(表象)은 재현(表象)하기로 한 것과 비교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지식’의 경우, 이러한 비교가 불가능한 까닭은, 경험이지만 별개의 알기를 거치는 바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실재하는’ 세상에 접근할 여하한 방식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또 다른 알기는, 정의상, 단지 또 다른 재현(表象)을 산출할 뿐이다. 그래서, 재현(表象)들을 생성, 비교하는 일에는 여하한 곤란도 없다. 하지만, 그리기로 한 무언가가 우리 경험 경계면 너머에 거하는 실재하는 세상에 실존한다고 가정되는 한, 여하한 재현(表象)도 그 뭔가와 비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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