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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에 대한 의문(Th question of Objectivity)

        객관성에 대한 의문

 

이러한 생각하기 방식을 작업가설로 받아들일 경우, 구성론자들일지라도, 놓치고 싶지 않을 개념적 구성물들 사이 차이 하나를 해명해야 할 것이다: 그 차이는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우리가 믿고 싶은 지식과 노골적 허상은 아니어도 의심스러운 구성물들 사이 차이이다. 이러한 구성론적 ‘객관성’은, 사물-자체들의 세상에 있지도, 그 세상을 가리키지도 않기에, 마땅히 달리 칭해져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현상들을 제한하는 경계 안쪽에 위치한다. 내가 곧이어 설명할 이유들에 알맞게, 내가 잠정적으로 제안한 용어는, 이러한 경험적 실재의 가장 신뢰할 만한 최고 수준을 가리키는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이다 (Glasersfeld, 1986을 보라).   

 

     이 용어가 함의하는 것처럼, 그러한 최고 수준은 그밖에 <생각하기 & 알기> 주체들의 확증을 거쳐 생겨난다. 이러한 ‘타자들’의 도입은, “모든 지식은 주관적이다”라는 구성론적 원리와 노골적으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외관상 모순은, <비록 그 타자들이 개체로서 주체의 구성들이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그 주체의 경험적-실재(現實)에 대한 확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면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타자들’ 구성 방식에 대한 모델은, 사실, 칸트가 그의 순수 이성 비판 초판에서 했던 제안의 확장이다:

 

명백한 바: 그 누구든, 또 다른 생각하기 주체를 구상할 경우, 그 자신을 주체로 특징짓는 속성과 깜냥들을, 필히, 그 타자한테, 귀속(歸屬)시켜야 한다. (Kant, 1781, p.223)

 

    우리 닮은꼴로서 타자들의 창조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가 경험장에 머물지 않는 아이템들에 <자발적 운동 깜냥>을, 전적으로 무해하게, 귀속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늘의 달,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 바람에 흔들이는 나무들에 대해, 아이들 자신의 경험에서 그러듯이, 그것들도 그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이러한 시기는 애니미즘(物活論)으로 특징짓는다. 이어, 동물들한테 시각적, 청각적 감지-깜냥들 귀속시키기가 이어진다. 곧이어 걸음마를 배운 아이는, 개구리를 잡고 싶은 경우 뒤에서 그리고 가능한 조용히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 아이는 개구리가 듣고 볼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 후, ‘사람들’로 칭해진 그러한 여타 경험 대상들이 동반된 무수한 상황을 겪는 가운데, 그 아이는 그 대상들에 목표–지향적 행동, 의도적 생각, 감정들, 그리고 경험적 학습을 귀속시킨다. 최종적으로, 이들 타자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과 비슷한 이들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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