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자율성이 제거된 상호 관계 또는 협력들로 만들어지는 사회란?

 그러한 수준에서, 

우리는 ‘사회’,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상식’에 대한 

‘확증된 사실들’에 대해 말하면서 

정당화시켰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에서 

 

‘정당화시켰다는 느낌’은 

그 말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제약들과 충돌하는 경우, 즉, 

말한 것들에 있는 모순 또는 비일관성에 대한 반박, 또는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질의로 방해받는다면, 

그러한 느낌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필자가 언급했듯이, 

발화자가 우위에 있는 명백히 보이는 권력과 권위가 동원된 폭압적 상황 또는 

상대의 자율적 권능의 미비를 빌미로 삼아 이중구속과 같은 수단들을 동원한 강요된 침묵 상황에서, 

발화자가 느끼는 그러한 정당화는 명백한 망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들이 사회적으로 정당화, 일반화되는 경우, 

그것은 바로 파시즘 탄생의 팡파르에 다름 아니다. 

 

밀어부치거나 강압적인 상황들이 일상화된 문화에서는, 말인즉,

그 반대편, 

개체로서 자율적 권능을 조장, 북돋는 그리고 그에 기반한, 

결단코 ‘너는 해야되’라고 말하고 않고 단지 ‘나는 해야되’라고만 말하는 문화가 

우세를 점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 누구든 파시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  

 

‘경험적 실재’를 현실로 이해할 수 있다고 앞서 말했듯이, 

우리 현실은 크게 두 가지 수준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행위 구역 안에서 

바이어블한 것들로 구성된 현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호주관적 실재’로 언급된 우리가 통상 사회로 지칭하는, 

구성론적 관점에서, 바이어블한 것들로 재구성된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 이 절의 보그다노프 인용문이 결정적으로 맞아들어간다. 

 

천재든 단순 노동자든, 

그들 각각의 인지적 그리고 실용적 창조 과정에서, 

그는 언제나 혼자로서 인간 존재이다. 

(Bogdanov, 1909, p.33)>  

 

 

6장에 이르면, 1장 시작에서,

구성론은 유아론(唯心論)이 아님을 논하겠다는 약속은,

충실히 지켜왔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 대목에 이르러, 한 명의 독자로서 드는 생각은, 

 

한편에, <구성론에 입문하는 것이

회의론적, 상대론적 사고로 인해 유아론으로 이끌릴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한 

충실한 노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놓고,

다른 한편에, <비판적 실재론이 

상식과 지각의 기만적 관념들을 전유한 소박 실재론을 장려, 

그러한 생각하기와 행하기 패턴을 통해 자율의 확산을 저지하면서 

그를 통한 수탈 형식들과 자신의 체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놓고 비교할 경우, 

 

회의론적, 상대론적 사고의 위험성에 대한, 

특히, 파시스트적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상대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구성론에서 윤리 참조)는 식의 제기는, 

사회적 차원에서 보자면, 

악의적 선동에 불과하며, 설사, 

유아론(唯心論)에 삐긋해서 빠져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당한 정도로 권력과 권위, 자산을 갖춘 자가 아니라면, 

매일매일 경험에서 그러한 사고가 부정당하기에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이어,

구성론이 상식과 지각의 기만적 관념들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론적 사고와 태도를 조장하고, 

절대, 객관, 보편, 진리, 죽음과 같은 생각들에 상대론적 비판을 앞세워 

인간 자율적 권능과 삶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을 

자신의 기본 정신으로 하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유아론에 미끌려 잠깐씩 길을 벗어나거나 났다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충실한 노고를 들인 재구성을 통해,

자신의 갈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멘세비키의 핵심적 지도자였던 보그다노프는, 

끝까지 자신은 맑스주의자라고 주장했다. 

레닌이 ‘경험론과 유물비판론’에서, 

당시 개화하던 러시아의 사상적 부흥과 그에 기반한 자율적 문화와 성숙을, 

권력 집중이라는 목표를 갖고 상식과 실재론의 기만적 관념들에 기대 천박하고 폭력적으로 제압한 결과는, 

당시 상황 논리로서 정당화 가능성 유무를 떠나, 

그 부정적 영향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사이버네틱스의 선구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는 보그다노프가, 

당시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해 가졌던 태도와 입장은, 

오늘날 구성론을 자신의 알기 이론으로 선택하고 나서,

자본의 메커니즘에 대한 변화 또는 다른 대안적 메커니즘을 시도하고자 연구하는 이들한테는, 

필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인물 가운데 한 명이리라 생각된다. 

 

RC(1995) 역자 주석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