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dichotomy)은
무언가를 둘로 나누어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상호 배타적인, 반대되는 또는 모순되는
두 항으로 분리, 분할하는 일을 지시한다.
각 영역들에서 보이는
이분법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보자면,
수학, 철학, 언어학에서는, 이를테면,
개념 A가 있고
이것이 부분 B와 부분 –B(B 아닌 것)으로 분리될 때,
그때 그 부분들은 이분법을 형성하며, 이 경우,
각 부분들은 서로 포함하지 않기에,
상호 배타적 이분법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부분들은 결합할 경우,
A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포괄하므로,
그리고 그럴 경우 다시 A가 되므로,
결합 포괄적이라 칭한다.
집합 이론에서,
관계 R을 두고, “aRb, bRa이든 둘 모두든”과 같은 경우.
통계학에서,
측정의 최초 수준들, 즉 측정의 표준 수준에서,
(국적을 조사하는 경우, 최초 기준 하나를 정하고 나머지는 그것이 아닌 것으로 처리하는 경우), 그리고
측정의 통상 수준에서,
(키를 측정하는 경우, ‘크다’ 대 ‘작다’의 경우처럼),
데이터는 이분법적이다.
정신의학 또는 임상심리에서, 정신 이상 분류에 있어,
이분법적 분류, 또는 범주화가 지시하는 것은,
정신 이상을
비정상, 격렬, 장애의 일정 수준에서
정상 상태를 기준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경제학에서,
고전적 이분법은
경제의 실제적 측면과 화폐적 측면 사이 분할이다.
이러한 고전적 이분법에 따르면,
화폐량의 변화는 산출량, 고용, 그리고 실제 이자율과 같은 실제 가치들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화폐는, 고로, 이들 실제 변수들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중립적이다.
생물학에서,
이분법은
특정 특징이 한 집단에는 있고
다른 집단에는 없다는 전형적 기준을 갖고
유기체들을 두 집단으로 분할한다.
그러한 이분법들은
종을 확정짓는 과정의 일부로,
이분법적 핵심의 일부로 사용되며,
유기체 집단의 범위를 좁히는 일련의 질문들로 만들어진다.
이를테면, 질문, ‘등뼈가 있는가?’는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로 분할하는데 사용된다.
신학과 철학, 인문학에서,
인간은 마음(정신 또는 靈魂)과 몸(身體)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분법.
사회학과 기호학에서,
이분법은 관심 주제에 따라 분할을 형성한다.
(이는 때때로 이항 구조(binaries), 이항 대립 구조(binarism)라 불린다.)
이를테면,
가정과 공공(사회)의 이분법은
사회에서 남녀의 역할을 나눈다;
동서양 이분법은
동양적인 것들과 서양적인 것들을 대비시킨다;
일부 사회 과학자들은,
이분법들이 만들어내는 분리와 불평등을
강조할 목적으로 이분법 해체를 시도한다;
이를테면,
주디쓰 버틀러의 성-이분법 해체와 발 프럼우드의 인간-환경 이분법 해체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전통 중국 문화의 음양 이론도 이분법에 해당되지만,
양분된 것들이 일정 편입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원래 정의된 이분법과는 다르다.
이원론에서 언급되는 대치 항들도
이분법에 기반한 것들이다.
주체와 객체, 유기체와 환경, 관찰자와 관찰된 것들,
마음과 몸, 현상과 본질, 물질과 정신,
유신(천사와 악마)과 무신, 자연과 사회, 이론과 실천, 등등,
이 모든 것들을 구별한 것은,
그 어떤 에이전트가 그 어떤 맥락에서 그 어떤 기준으로 분리한 것들이다.
이러한 분리, 구별은,
명백히 분리 구별 주체의 창조물이며,
그것이 쓰이고 있다면 분명 어떤 기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그 기능이 적절하며 충분한가, 또는 기만적이지 않는가 하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것들 가운데 잘못된 이분법의 사용에 해당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잘못된 이분법은,
분리된 하나 또는 둘 모두의 조건 설정에 실패로 인해,
분리된 관계에 오류가 있는 경우다:
결합 포괄적이지도 상호 배타적이지도 않은 경우다.
잘못된 이분법의 대다수 공통된 형식에서,
분리된 것들 둘은, 실상 다른 제 삼의 것들이 있을 수 있음에도,
마치 분리된 둘만으로 결합 포괄적 관계를 충족시키는 것처럼 제시된다.
몇몇 경우에, 넓은 중간 영역이 있음에도
(또는 분리된 양자에 배분되지 않은 중간을 보고 있음에도)
마치 상호 배타적인 것처럼 제시되는 경우다.
먼저, 잘못된 이분법 가운데, 양단 간에 두 가지 입장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논쟁의 상대편을 한쪽 극단으로 몰아갈 의도로 사용되는 전형적 논증으로,
많이 드는 사례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수한 공립학교를 원한다면 세금을 올려야 한다.
세금을 올리길 원치 않는다면 우수한 학교를 다닐 수 없다”
- 현재 있는 세금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 삼의 가능성 배제.
“당신은 문제의 당사자든 아니면 해결의 당사자든 둘 중 하나다.”
- 여기 결백한 방관자가 있을 수 없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리의 적이다.”
- 중립은 선택이 아니다.
잘못된 이분법 또 다른 아주 대중적인 사례들로,
<이론은 실천(관행, 실제)과 일치하는 정도만큼에서만 좋은 것이다...
도덕은 이론의 한 유형이다, 그래서,
비실천적 이론과 비도덕적 실천 모두 아주 위험하다.>
또는
<몸과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몸 없는 마음은 귀신이 되고, 마음 없는 몸은 시체가 되는 것이다.>
먼저 잘못된 이분법들을 깨뜨리는 한 가지 방식은,
양측이 공통으로 갖고 있을 수 있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 그리고
<나한테는 그런 “극단적”인 의도가(뜻이) 없네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끔씩,
양측의 공통점이,
아주 중요한 관계를 지니는 바로 인해,
상반되는 것들이 쌍둥이처럼 보일 것이다.
실상, 현실에서 대립하는 것들 대다수는,
같은 형식을 공유하는 것들이기에,
그러한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
양측의 요구,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딜레마에서,
일종의 이중구속에서 벗어나는 최초 알아차림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대립되는 또는 구별된 양자가
순환적 형식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형식에 대한 고전적 표현은 '상호의존'이다).
실상, 구별 과정에는,
구별된 것들, 둘이 아닌 구별을 행하는
구별 주체가 항상 개입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구별 주체를 의식하는 또는 알아차리는 순간,
그 구별 주체는 것이 된다.
그래서 구별을 알아차리면,
구별 과정에는 셋이 개입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셋이 일정한 이론, 관점에 실려 있는 경우,
삼분법(trichotomy)의 세계가 열리며,
이와 관련된 개념들 또한 이분법 또는 이원론적 개념들 못지않게 많다.
실상,
이분법의 대다수 사례들은
능동적 구별 주체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거나,
그 구별된 것에서 주체를 제거하고 그러한 구별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체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에서는 삼분법이든 사분법이든 마찬가지일 수 있다.
* 이분법에 대한 설명과 사례들은 영어 위키에서 번역되었으며,
폐해에 대응하는 방식은 재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