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의문, <감지(感知)들의 지각이 그 지각을 닮은 외부 대상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아닌가?>에 대한 관점에 따른 재구성

이 의문이,

 

이 의문은 어떻게 결판날 것인가? 단연코, 경험으로다; 자연 자체에 대한 여타 모든 의문들처럼. 하지만, 여기서 경험은 침묵이며, 전적으로 함묵(含黙)일 수밖에 없다. 마음은 지각들 말고는 자신한테 여하한 사물도 제시할 수 없기에, 그 지각들을 대상들과 연결하는 여하한 경험도 결단코 불가능하다. 고로, 그와 같은 연결을 가정하는 건 아무 근거 없는 추리다. (ibid., Essay xii, Part I) 

 

 

 의 맥락에서 제기되고 있는 바,

 

상기 의문을 맥락에 맞게 재구성할 경우,

<감지 깜냥들의 결과물로서 지각이

그 자신을 닮은, '감지 경험 너머'라는, '외부' 대상의 산출물인지 아닌지>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외부'란, 

형이상학의 해체를 목적으로 

그것을 공격하는 흄의 여기 맥락에서는 

침묵해야 할 자연 그 자체와 동의어다.

 

소박 실재론적으로 재구성될 경우, 

그 의문은,

<[감지 깜냥들(senses)이 작동하는(귀속된) 감관들(sensory organs)]의 결과물로서 

지각은 그것을 닮은 외부 대상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아닌가>로 구성될 것이다.

 

하지만, 버클리와 흄이 소박 실재론자가 아니었음을 상기할 때,

이러한 독해는 전적으로 어긋난 것이다.

 

로크의 지식이론에서 발판은 감지-깜냥들(senses)이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감각기관을 전제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직접적 경험 직관에 의거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감지 깜냥들을 전제로 하는 반면, 

후자 관점에서는

구성되어야 할, 구성으로 보여주어야 할 복합관념인 

몸을, 그리고 그 일부인 감각기관을 당연한 혹은 감지 너머 실재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오늘날 발달 심리학에서, 

아이가 자신의 감관(感官)들을 태어날 때부터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재 구성의 일부로서 구성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해석이 납득 가능할 것이다. 

 

또한, 

명상을 통해 침잠해 들어가면서, 

오관과 여타 감지 깜냥이 해체되며 

지각의 분별이 사라지는 것을 

가끔씩 경험했던 이라면,

납득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명상으로 감관의 실재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내, 

일상의 실재성이 덮쳐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RC(1995) 역자 주석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