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그/그녀가 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인지하기 주체가, 그 세상에 들어맞을 목적으로,
개념적으로 진화시켜 왔던 방식과 수단들이다.
이와 함께, 우리가 통상 ‘사실(fact)’이라 부르는 것들은,
관찰자와 독립된 세계의 요소들이 아니라,
관찰자가 경험한 요소들이다.
에서,
우리는 구성론자가,
단어, ‘경험’과
그 경험이 마주하는(vis-a-vis) ‘세상’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구성론자의 경험은,
경험론과 합리론이 거부한 순환적 인과성을 도구로
세상을 마주하는 것이다.
이때,
세상은 경험하기 주체한테는
알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영역이며,
관찰하기 주체한테는
가설을 검증할 관찰들이 획득되어 나오는 영역이다:
메니폴드에서
직관(시간 and/or 공간)을 통해 소재를 구별해 얻는 감각발동 경험은,
관찰 획득에 속하는 경험이다.
경험하기 주체와 관찰하기 주체의 세상은,
경험하기와 관찰하기가 인과적 순환 고리를 형성할 때,
그것이 같은 세상임이 드러난다.
우리는 가설과 관찰로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이랄 수 있는 바에 대해,
그 바를 발견적 허구로 설정하고
구성적 결과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그 결과들, 즉 경험하기 방식과 수단들,
스킴, 개념, 생각들로 <알 수 없는> 세상을 마주한다(vis-a-vis), 즉,
우리가 가진 스킴, 개념, 생각들을 검사 받는다.
다시 말해,
그 세상의 제약들에,
은유로서, 대자연의 체에, 걸리지 않아, 살아남고, 그래서
우리 경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것으로, 재차,
그 세상을 마주볼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것으로 확인한다.
이것은,
윗 구절에서 ‘들어맞는다’에 대한 해석이며,
진화론에서 ‘적자생존’에 대한 스펜서 해석에 대한 대안적,
<다윈의 자연선택과 어울리는>, 해석이기도 하다. 즉,
유기체한테는 자연의 선택을 회피했다는 것으로서
제약들 사이에 맞아들었다는, 적합했다는 의미로,
대자연, 즉 자연의 체한테는, 선택되지 않은,
제거되지 않았다는, 살아남았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들어맞다’와 ‘적자’에는
그 자연, 또는 세상과의 여하한 온틱한(ontic) 접촉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살아남은 결과에는
그 세상에 대한, 설사 간접적이라 할지라도,
여하한 정보도 담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경험 시작하기(이론 사용하기 또는 가설 시험하기), 연이어,
<이론 또는 가설 사용 또는 시험>에 대한 결과 관찰하기, 그리고
이론이나 가설 확증 또는 이론, 가설 평가에 따른 재구성, 재차,
경험 시작하기로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고로, 구성론자한테,
여하한 온틱한 접촉도 없으므로 해서,
여하한 실재도 착상도 가능하고, 그래서,
실재론자들은,
그 가운데 가장 그럴 듯한 후보들 가운데
<영원한, 확고부동한, 고정된, 변할 수 없는> 진리의 속성을 갖는 실재를 추려,
그것을 실재하는 세상의 재현으로, 그 세상에 대한 존재론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성론자한테,
존재란, 그와 달리, 살기, 생활, 삶에 복무하는 것들로,
유용해서 쓰고 있는, 더 우수한 것이 있다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쓰기에 큰 문제가 없어서 쓰고 있는,
함께 더 나은 것들을 고안, 구성, 구축, 확립한다면,
언제든 대체 가능한, 수단 또는 도구와 방식들(스킴, 개념, 생각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세상에 대한 재현적 속성이 아니라,
그 세상의 제약들을 피했다는, 그래서
그 세상에 대해서는 그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