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현실’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나 상태>를,
‘실재’는 <실제로 존재하는 바>를 가리킨다. 그리고
‘실제(實際)로’란, 글자 그대로,
<사실들 사이, 사실들로 관계되어지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 적절하게 보인다.
한편,
이 단어들이 일상어가 아닌 학의 영역에서 사용될 때,
분과에 따라, 관점에 따라,
그 의미들이 다르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구성론적 관점에서,
그 용법들의 경계를, 일상어 용법의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늠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특정 목적을 갖고 <행하고(act, wirken(taten))>,
행한 바가 목적 달성에 들어맞고 있는지 인지한다.
행하기와 인지하기가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동하고 있는 스킴 또는 시스템이 있을 것이고,
그 스킴이나 시스템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이때,
행하기와 결부되는 상황 구성, 행하기 절차에 동원된 도구들, 이어,
인지하기에 구별, 분석, 이해에 동원된 개념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정작, 이 모든 것들을 부분들을 포괄하는 스킴 또는 시스템의 목적이 존재한다.
이 스킴이나 시스템이 한 번 성공하면,
그 스킴이나 시스템은 계속해서 존재할, 다시 말해,
이후 재차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성공한 스킴이나 시스템에 결부된 여타 것(물(物), 개념, 생각)들 또한
계속해서 존재할,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그것들은 <사실(fact)>들로서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다: 사실(事實)이란 한자어는,
글자 그대로, <나/우리 또는 혹자의 행하기로 벌어진 일이 인지하기를 거쳐 맺힌(그 무엇으로 구성된) 바>를 가리킨다.
스킴이나 시스템이 실패할 경우,
즉, 목적 달성을 하지 못한 것으로 인지되는 경우,
그 스킴이나 시스템은 사실로서 자격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스킴이나 시스템에 결부된 여타 것들이 모두 사실들로서 자격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개별적인 것들에 문제가 있을 수도,
그 구성 형식에 문제가 있을 수도,
설정된 목적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문제에 대한 검토로,
사실들과 사실 아닌 것들, 즉, 작동하는 것과 작동하지 않는 것들을 분별하는 일은,
각기 다른 수준들에서 행하기와 인지하기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진행될 것이다.
이상에서,
스킴이나 시스템을 가설에 대한 실험-관찰 시스템으로 여길 경우, 그 때,
성공은 가설과 <맞다(correct, korrekt)>로,
실패는 가설과 <안 맞다(uncorrect, inkorrekt)>로 인지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가설이,
또 다른 전제된 이론에 들어맞는 것으로 또는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성공이나 실패한 경우,
이상과 마찬가지로 가름할 수도 있겠지만,
전제된 바에 <올바른>이란 기준을 부여할 경우,
이때는 <맞다(right, richtig)>와 <틀리다(wrong, unrichtig)>로 가름할 것이다. 이어,
이 기준에 좀 더 강한 인식론적 함의를 부여할 경우,
성공은 <참(true, wahr)>으로, 실패는 <거짓(false, falsch)>으로 대체된다.
덧붙여,
<진짜(real, real)>의 상대어는
<가짜(fake, falsch(unrecht)) 또는 허구(fiction, fiktion)>다.
이 상대어에는 원래의 어떤 것, 원본이 있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또한
한국어, <그거 진짜야(It is real!), 정말이야!>과 같이 사용하는 경우,
<그건 사실이다(It is fact that ...)>가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경우로 쓰인다.
이 사례는 영어 단어 fact가 이태리어 factum(만들다)에서 유래한 것임을 상기하면 도움이 되겠다.
이제, 앞서 말한 것들에 기반해서,
<실재, 현실>이라는 용어들을 살펴보자.
‘실재’는,
실제로, 즉, 사실들 사이에 또는 사실들로 관계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들 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상 쓰인다.
하지만,
실재론적 관점을 택할 경우,
사실들이 우리 경험 경계면 반대편에 거하는 것으로 설정할 경우,
특정 가설에 대해 실험-관찰로 그것을 사실로 판명할 때,
그 성공의 의미는 들어‘맞다’를 넘어 참(眞), 진짜의 자격을 획득한다. 그래서,
성공한 그것은 진리(truth, Wahrheit)의 자격을 획득하고,
그러한 자격을 갖춘 것들이 거하는 곳을
실재(reality, Realitat(wirklichkeit))라 부르게 된다.
관점에 따라,
실재(reality)에 수식어를 붙여 구별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경험 경계면 기준으로,
외재적(external) 또는 내재적(internal) 실재,
사실들에 부여하는 지위와 관련해서,
실재론에서 존재론적(ontological) 실재, 경험론에서 경험적(experiential) 실재와 같은 구별들이 있다.
또한, 특정 철학에서, 실재와 현실을 구별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영어에서는 이 둘 모두에 한 단어(reality)를 사용하지만,
이를 독일어 Realität와 wirklichkeit로 구별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
그것이 그 알기 이론의 맥락에서 무엇을 지시하는가는
그 알기 이론이 짜여진 구조와 방식에 달려 있다.
구성론에서,
‘현실’은, 내가 내릴 수 있는 정의로,
능동적 에이전트로서 나/우리가 경험의 경계면을 마주하고 현재 시점,
그 시점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설정하든, 그리 설정한 기간에,
작동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스킴, 개념, 생각들로 구성한, 통상 사실들로 구성된 네트워크다;
우리는 마주하는 세상을 이 네트워크로 마주한다.(마주하는 세상과 세상과 세계 구별을 참조하시오)
따라서, 현실은,
실재했던, 즉, 사실로 존재했던 것들 가운데,
여전히 현재에도 작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현재의 사실들의 네트워크의 일부로서
(실상,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능하고 있는 것들을 포함해서,
내/우리가 현재로 설정한 기간 사이에 작동하고 있는 것(事實)들로 조성된 네트워크다.
고로,
현실은 나/우리의 경험적 실재의 또 하나의 이름이며,
외재적 실재를 인정치 않는 내재적 실재일 수 있으며,
경험 경계면 너머 Realität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wirklichkeit로 지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텍스트 번역에서,
‘경험적 실재’와 같이 ‘존재론적 실재’와 대비되는 경우,
‘실재’의 의미는,
‘진짜로 여겨져 있는 것들의 총체‘로 독해하면 되고,
수식어 없이 실재(reality)를 사용하는 경우,
두 가지 경우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존재론적 실재를 가리키는 경우로,
다른 하나는,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공해서 작동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진짜로 여겨져 있는 것들의 총체’로 해석될 수 있다.
여하튼,
후자의 의미가 발생적으로 먼저고,
전자는, 그것을 경험 경계면 너머로 투사시켜,
이것이 그것이라고 주장하는(우기는)경우로,
후자를 확장시킨 의미 없는 의미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존재론적 관점과 구성론적 관점을 번갈아 언급하는 경우,
같은 절에서 같은 단어로, 다른 것을 지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고로,
독자가 맥락에서 의미를 감안하는 것이 최우선이겠지만,
번역자로서 혼동을 피하려는 지점,
실재가 경험적 실재를 의미하는, 또는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을 경우에는,
<실재(現實)>와 같은 식으로 병기하는 것을 방침으로 한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 전체에 걸쳐, 몇몇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실재’라 표현되는 것은 ‘존재론적 실재’를 가리킨다.
이와 관련해서, 2장, <도구주의를 위한 새로운 연료>절에서,
윌리엄 제임스의 인용구 주석에서 필자가 언급한 것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아래 구절에서,
형용사, ‘실재하는(real)’ 또한, 위에서 언급한 명사, ‘실재’와 마찬가지로,
‘성공된 것으로 사실로서 확립되어 진짜로 여겨져 있는’의 의미로 해석되지만, 이와 달리,
존재론적 실재를 가리키는 맥락에서, <‘실재하는’ 세계>와 같은 경우도 있다.
경험과 실재 사이 관계에 대해, 제임스는 미묘한 만큼 심오한 거라 말했다: ‘실재하는 모든 건 어디선가는 경험될 수밖에 없으며, 모든 종류의 경험된 물(物)은 어디선가는 실재일 수밖에 없다’(1912, p.159 ; 강조는 내 것). ‘종류’를 이탤릭체로 강조한 건, 제임스의 구별이 쉬이 간과될 것이기 때문이다 : 버클리처럼, 그도 어디선가 경험될 수 있는 그러한 물만을 ‘실재하는’ 걸로 칭한다 ; 그리고 물의 종류들, 즉, 우리가 추상한 개념들은, 그가 정의한 의미로 반드시 ‘실재하는’ 물들에 기초해야만 한다 —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공허(空虛)한 것이, 혹은 비코 말로, ‘시적 은유’가 될 것이다.
이것들 말고,
정말 중요한 또 다른 의미가 ‘reality’에 부가된다.
그것은 ‘실재성 또는 실재’라고 번역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진짜 있다’를 가리키는 용어다. 그래서,
경험 경계면 너머 존재론적 실재는 부정되지만,
경험 경계면 너머 ‘실재성’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The reality of Experience’의 경우, 역시,
‘실재성’이란, 바로 경험이 그러한 바에서 자신의 경험의 결과물들이 검사받거나 제거된다는 점에서,
<없는 것>이 아닌 (어떤 형태 또는 형식으로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닌’ 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로크의 일차 또는 이차 성질들을 언급할 때,
속성들의 ‘실재성’은
‘실재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의미하기에, 오히려,
존재론적 실재의 속성으로서 ‘실재성’이다.
고로,
단어, ‘reality’가 관점에 따라 맥락에 따라 갖는 다의성과 복잡성이 왜 생겨났는가를 고려하면,
이 단어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담론 환경이 요구된다.
이 텍스트를 독해하고 나서,
철학 또는 인식론의 영역에서 존재론적 실재를 다루는 경우가 아닌 상황과 담론에서,
‘실재’라는 단어를 사용할 일은 없게 될 것이다.
구성론의 정신에 완전히 든 경우라면,
이 단어가 실재론에서 지시하는 바과 같은,
경험 경계면 너머에 거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지시하는
객관, 진리, 보편, 등등과 같은 단어들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즉, 무시함으로써,
그 지시의 의도를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 경계면 너머는
신비주의자들의 배경 없는 은유 사용 영역이므로,
그들이 자신들이 합리적이자 진리의 수호자로 자처하지 않는 한,
그들은 구성론자들과 양립 가능하다. 하지만,
경험 경계면 너머 진리, 객관, 보편의 수호자로자 자처하는
종교 또는 종파들의 전도자들과 실재론적 과학의 프로퍼갠다들의 전쟁은,
분명히 말하건데,
권력을 놓고 다투는 실재론자들의 본연의 모습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