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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누머논(noumenon)에 대한 이해

용어 ‘noumenon’은, 

지각, 이해, 마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nous’에서 기원한 

“나는 생각한다, 의미한다”라는 동사 ‘νοεῖν (noein)’의 중간-수동적 현재 과거 분사형이다; 

그래서, 

“생각된 것” 또는 “사고 작용의 대상”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용어는, 

감지들의 사용 없이, 

(알고 있다고 할 경우) 

설정 또는 단정된 대상이나 사건을 지시한다. 

 

이 용어의 일반적 사용은, 

감지들에 나타나진 것 또는 

감지 대상인 어떤 것을 가리키며,

용어 ‘현상(phenomenon)’과 상응하여 사용된다.

 

플라톤 철학에서, 

누머나(누머논들) 영역은, 

철학적 소양을 갖춘 이들한테 알려진 아이디어(觀念) 세계와 동등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한테 알려진 감각 세계와 동등한 현상 세계와 대비된다;

플라톤의 관념(idea)와 형상(form)들은 누머논들이며, 

현상들은 감지들에 자신들을 펼쳐 보이는 것들이다.

 

이 용어가 근대적 용법을 갖게 된 것을 칸트를 거쳐서다. 

현상은, 

인간 감지들 하나 또는 그 이상에 의해 관찰될 수 있는 물리적 현시/출연 또는 관찰 가능한 사건을 가리킨다. 

누머논과 현상은 

칸트 철학에서 상호 관련된 전문 용어로 사용된다. 

  

칸트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누머나<즉, 세상에 대한 탐구, 조사, 또는 분석 작업의 대상들>을 

기술하고 범주화하기 위한 개념을 채택할 때, 

그때 우리는, 실상, 

현상들<즉, 그러한 탐구, 조사, 또는 분석 대상들에 대한 관찰 가능한 현시들>을 

기술하거나 범주화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 

누머논은 특정 대상, 즉 지적 대상을 이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누머논을 이해한다는 건 그 자체로 문제다. 

그걸 범주들로 산만하지 않게 그러나 비감각 직관으로 직관적으로 아는 

그런 이해하기 깜냥이 우리한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칸트 왈, 

"나아가, 누머논 개념이 반드시 필요한 건, 

감각 직관이 물-그-자체들로 연장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 따라 감각 지식의 객관적 타당성에 제한을 두기 위해서다.”

(여기서, 감지 가능한 직관(sensible intuition)은 

시간과 공간에 주여져 수동적으로 나타나, 떠오르는 현상을 

물리적, 심적 형식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깜냥이다.)

 

이상 맥락에서 보건데, 

누머나와 물-그-자체들의 구별은, 

나타나-<<펼쳐져-보이는-것>>(현현/현시/출연/현상)들에 대한 탐구의 지향으로서 

<매니폴드와 같은 온틱한 경험의 경계면>에 누머나를 단정하는 것과 

<<나타나>>-펼쳐져-보이는-것(현현/현시/출연/현상)들에 대해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물-그-자체들을 단정하는 것에서, 차이로 가능하다;

"펼쳐진 것은 무엇"과 "나타날려면 있어야 하는 무엇"과의 차이다.

 

이러한 맥락상 차이 이외에,

두 용어는 발견적 허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아래 인용구를 근거로, 

‘물-그-자체들’을 실존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인용구 역시 허구로서 읽히지 않을 이유가 없다. 

 

 "...비록 우리가 이들 대상들을 물-그-자체들로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최소한 그것들을 물-그-자체들로 생각하는 입장에 서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나타나지는(현시되는) 어떤 것도 없이 

나타남(현시/출연)이 있을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Critique of Pure Reason Bxxvi-xxvii] 

 

RC(1995) 역자 주석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