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세계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겨진 진선미가,
동양세계에서, 특히, 불교 문화권에서는 전복된 의미,
삼독의 기원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대별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정형화된 지각 패턴, 표준화된 형상, 반복된 지각 패턴으로서,
습에서부터 그러한 것들의 일체감, 조화, 그리고 등등에서,
지각적, 형상적, 지적 준거로서 미(美)가
탐(貪)의 원천이 된다는 것,
생각하기와 행하기 주체의 인지 결과물로서
지식이 그 너머 타자들에까지 이른다는 확신(眞)에 따라,
이어, 모든 지식의 기초의 허구성(空)을 진(眞)으로 여김에 따라,
그 기준(正義)이 부정되거나 거슬리는 상황들에서 기원하는 진(瞋),
그리고, 그렇게,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로 기성의 세계가 요청하는 것들에 따르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을 선(善)하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 요청들은,
개체들 그들 자신의 역동적 평형을 위한 기준들로는 쓸만한 것들이 아닌 경우들이 많기에,
그에 부합하고자 노력할수록, 복종과 척하고 체하는 처신들로 일상이 채워지게 된다는 것,
이어, 이러한 치(恥)를 극복하고자, 대다수가 그 치의 반대편이라고 여기는 당당(眞美)을 획득하고자 할 때,
무리하고, 그칠 줄 모르며, 경우가 없어지는 또 다른 치(痴와 侈)의 세상, 말 그대로,
<어리석고 사치스레 살다 그렇게 미쳐 병들어 거들먹거리는 부끄러움도 잊어버린> 세상은 현실이 된다.
정의와 성냄의 중용으로서 평화 (化 for 平)
선과 치의 중용으로서 동적 균형/평형 (中 for 自律(제약) = 隱(회피))
미와 탐의 중용으로서 중화 희열 (中化 for 喜)
Golden mean is for
a peaceful, solitary and joyful life
중용(中庸)이란,
평화를 위해 이해하기의 이해하기로 양립-가능성(化)을 이루는 것이며,
홀로 자율이 침해받지 않기 위해, 충돌과 갈등 없이 잘 지내고자 하는 것이며,
이러한 중화 가운데 적정(寂靜)하기는 온전한 기쁨을 누리고자 함이다.
해서,
평화를 위해서는 성실(言成實)과 협상의 기술이 필요하며,
자율을 위해서는 균형과 보상을 위한 계산 능력과 회피술이 필요하고,
적정을 위해서는 경외 그리고 이를 위한 지속적 알아차림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