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삐아제의 '반사'란 자율성의 기초로서 타고난 성(性)이다.

유추를 사용한 논리(抽納)로 얻은 가설을 경험으로 확증하는 사고는, 

즉물궁리(卽物窮理)<즉, 관찰자 관점에서 사물의 리(理)를 파악, 그것의 성(性)을 분별하는 것>을 너머, 

즉물궁리와 동급의 격물치지가 아닌, 왕수인의 격물치지(格物致知),  그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해석은,

관찰자의 입장이 아닌 관찰 대상의 입장에 서서, 

생명과 사물의 리(理)를 파악, 

관찰자 관점의 리(理)를 바로잡는 것, 

이로써, 자신이 홀로 우주이자 

우주 속 우주라는 성(性)에, 즉, 

심(心)의 지(知)의 성(性)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심에 대한 지란,

<생각하기와 행위하기 스킴>에 대한 지이며, 

이것이 바로 양지이며, 

양지의 원형은 

바로 오늘날 아기들의 반사들이기에, 

(동서양 상당수 (필시 대다수) 현자들이 

적어도 한번쯤은 아이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자였으리라는 점에서 보건데,) 

이러한 인간 마음, 곧 생명의 성(性)에 충실(忠實)하는 것이, 

성리(性理)를 바로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타고난 성(性)이 바로 자율을 기본으로, 

귀납적 배우기로 전개되고 있다는 깨달음이야말로, 

그들 평생의 자신에 대한 반성과 수양의 지침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RC(1995) 역자 주석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