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맞는 해당 번역어가 없고 충분한 어의 전달이 부족해서, 소리나는 대로 단어를 옮겨 적으려 했으나,
'ontic'의 주 번역어로는 '온틱한'보다는 존재적, 본체적, 등등을 사용했으나, '본원적'을 택하고자 한다;
첫째, '존재론적(ontological)'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둘째, 경험 너머 또는 경계에서 없는 것이 아닌 '있다'는 점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본원적(ontic) 형상'과 같은 경우, 뉘앙스의 손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온틱한'을 병행해서 사용한다.
그럼에도, 바이어빌러티 개념에는 선정된 목표들에 이르려는 유기체의 방식을 방해, 가로막는 장애과 제약들이 있고 또한 있을 것이라는 점이 함축되어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Anything goes)’는 단연코 실상이 아니다. 폴 파이어아벤트(1975, p.23)가 이 구절을 썼을 때 맥락은, 상당수 그의 비판가들이 그에게 전가하고 있는 바 ‘여하한 방식의 여하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유용하게 여기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이라는 뜻이 분명하다.
본원적(ontic) 실재가 우리 행위들 일부를 방해하며 우리 노력들 일부를 헛되이 만들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상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온틱한 실재는 오로지 우리의 행하기 <그리고/또는> 생각하기의 실패들 가운데서만 자신을 현시할 것이며, 우리는 성공치 못한 행위와 생각들에 대한 용어들이 아니라면 이러한 실재를 묘사할 그 어떤 방식도 갖고 있지 않다.
에서,
'실체적 또는 본체적 혹은 존재적 실재'로 번역되기도 하는 본원적(ontic) 실재는,
경험의 경계면에서,
우리의 행위와 생각하기 방식에 대한 방해, 제약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진짜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가리킨다.
고로, 본원적(ontic) 실재는
우리의 구성된 것들의 바이어빌러티를 제약하며
경험적 실재(現實)를 제한하는 실재성을 띤 실재이다.
이런 점에서,
구성론자는 존재론적(ontological) 실재는 거부하지만
실재, 실재성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과학적 지식과 시적 지식의 역할이 가름되는 지점이며,
각 지식의 양태 또한 결정된다.
고로,
오늘날 신비주의자 혹은 종교에서
신비와 관련된 바는,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말 할 것들이 극히 제한된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해진 것들에는
귀 기울여 반성, 숙고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