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하자면,
‘sensory’가 ‘물리적인 신체의 감각 과정’과 관련된 것들을 지시하는 형용사인 반면,
‘sense’는 ‘보기, 듣기와 같은 오감을 비롯한 여타 인간의 감각 능력 또는 그 능력의 행위’을 지시하는 단어다.
그렇기에,
영어에서, ‘sense’의 확장된 용례들로,
‘sensor(감지기)’, ‘common sense(공통된 감지, 즉, 상식)’,
‘in a sense of(~라는 의미에서)’, ‘it make sense(말 되네)’,
‘non sense(터무니없군)’ 등등이 있다.
용례들에서, 'sense'는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들어 맞추는 과정>, 이른바,
지각의 동화 과정과 <알 수 있도록 새롭게 정렬과정>에 대해,
알아차리는 상태, 즉, 그 과정들을 의식(意識)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말이 된 ‘센스 있네’는, 말 그대로, 감지 능력이 좋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용어에 대해,
대다수 번역서들에서는,
이제껏 나 또한 비판 없이 수용했던,
감각기관의 준말 ‘감관(感官)’을 인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감끔씩 감각(感覺)을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다):
<sense data, sense impression, sense perception, sense fact, sense experience>, sense(sensory) organ>.
이것이 단연코 수정되어야만 하는 까닭은,
‘senses’는 로크가 ‘우리 자신의 능력들을 검토하고 우리 이해하기(悟性)들이 다루는 것에,
<즉, 존재론이 아닌 지식이론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어떤 대상들이 적합한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라고 말할 때,
그 ‘능력들’에 해당되는 것이다.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서,
그림자 세계를 가리키는 ‘the world of the senses’ 또한,
감관들이 아닌 감지나 감각(感覺)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말인즉,
<보기, 듣기와 같은 오감 능력을 포함하여 여타 다른 깜냥들>을 지시하는
<감지(感知) 깡냠들> 또는 <그 결과(感覺)들>로 이루어진 세계(世界)를 지시한다;
플라톤을 소박 실재론자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러한 발판(前提)에서 출발한 탁월한 철학가들로,
18세기에는 흄과 칸트가, 19세기에는 쇼펜하우어가, 20세기에는 러셀, 비트겐쉬타인, 그리고 포퍼가 있다.
고로, 철학의 문턱을 넘는 이들이 몸과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점은,
이상 철학자들 모두 소박 실재론자는 아니라는 점, 따라서,
그들은, 몸을 ‘senses’들을 갖고 있는 당연시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시된 ‘senses’로 얻어진 단순 관념들의 복합 관념, 즉,
반성, 추상으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구성된 몸에 대한 실재성, 또는 재현성을 거론하는 것은,
그 구성 이후, 판단, 주장들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감지들’로 번역된 용어 ‘senses’는
우리, 인지 주체들이 구성, 구축할 관념, 개념, 구조들의 원자재를 얻어내는
그리고 그것들의 실효성을 확인하는 우리가 소지한 깜냥들로,
경험론 전통에서, 그리고 오늘날 실험관찰적 과학에서, 발판(基礎)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삐아제는 이상 철학자들이 그들 발판으로 삼았던 감지들을
반사(reflex)들로 교체한다.
이것이 다른 점들로는,
첫째, 감지들, 이를테면, 피험자의 보기, 듣기, 맡기, 맛보기, 만지기, 그리고 근운동감각지와 자체발생감각지, 등등은
관찰 가능한 것들이 아닌 반면,
피험자의 반사는 관찰 가능한 것이라는 점,
둘째, 인간 발달 과정에서 인간이 갖고 태어나는 가장 단순한 시스템(스킴)이라는 점,
셋째, 첫째와 둘째의 귀결로 감지들은 반사들의 분화, 발달로 구성, 확립된다는 점이다.
이로써,
실재론자들은 감지들에서 실재, 혹은 재현을 증거할 근거를 찾지만,
구성론에서 ‘reflex’가 갖는 지위는 도구(假設) 구성의 최소 단위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