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에 관하여

 

 

글라저스펠트는 고명한 철학자이자 사이버네티션이었으며, Radical Constructivism(이하 RC)의 알기이론(인식론)에서 주요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 페이지는 필자의 이해 한계를 전제로 편집, 가감한 것들이다. 여타 사이트들에서 깨지거나 공격당한 링크가 있는 경우, 한글 번역이나 해석이 맘에 안드는 경우, 무시하고, 비엔나 대학이 유지하고 있는 가장 신뢰할만한 Ernst von Glasersfeld 웹 사이트로 가면 된다. 

 

 

전기

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는1917년, 독일 제국의 일부였던 바바리아 수도,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시민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바바리아 오스트리아 대사관 일원이었으나, 일년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었을 때, 그의 가족 자산이 있던 프라하가 그의 아버지의 공식 주거지였기에 그의 가족은 자동으로 체코 시민권을 받았다. 어린 시절 이태리 북부와 스위스에서 자랐고, 1935년, 스위스 쭈오츠  컬리지를 "스위스 과학 Matura(이수증)"을 받고, 이후 2년간, 쮜리히, 비엔나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공 직전, 남은 학업을 마치고 싶었지만  빠리로 이사했다. 거주 허가증을 받기 전, 그의 가족 재산은 나찌한테 몰수당했고 그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1939년, 아일랜드로 갔고, 농부로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아, 1945년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철학, 논리학, 그리고 심리학을 계속 공부했다. 1946년 이태리로 돌아와 저널리스트로 일했고, 1961년까지 케카토의 이탈리아 조작주의 학파(언어분석과 기계번역)에서 함께 일했다. 1962년부터 미국 지원 프로젝트에서 컴퓨터 언어학 책임자였다. 1970년부터는 미 조지아대학에서 인지심리학을 가르쳤고, 1987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1987년부터 매사츄세츠대학, 과학적-추론 연구소(SRRI) 연구원이었으며, 1997년, 클라겐푸르트대학 명예철학박사였다. 1970년대 radical constructivism으로 알려진 인식론(그는 '알기 이론'이라 불리길 원했다)의 정식화를 시작했다. 그는, 고대인들에 대한 비꼬의 통찰력, 삐아제의 발생론적 인식론, 버클리 주교의 지각 이론,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스 웨이크 그리고 그밖에 중요 텍스트들을 갈고다듬어(RC(1995, 2장) 참조), 그의 모델, 근본적 구성론(RC)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미국 사이버네틱스 협회 이사회 회원이며, 1991년 이 협회에서 맥쿨럭 기념상을 받았다. 또한 리스본에 있는 삐아제 연구소, 과학 이사회 임원이었다. 또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Constructivist Fouundations에 지속적으로 기고하였다.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미국 암허스트 시간 오전 7시, 에른스트는 그의 침대에서 평화로이 영면에 들었다. 그는 93살로 장수를 누렸다.  그의 자서선: Sketches from an Improbable Life by Ernst Von ...그리고 빈센트 케니의 추모사: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를 기억하며에서 그 삶을 엿볼 수 있다.

 

 

최고의 통찰력

삐아제 평생 작업의 근저에 깔린 것, 그리고 근본적 구성론(RC)의 시작과 끝은 형이상학과 결별이었다. 2500년 서양 사상사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다시는 되돌아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형이상학 없이 모든 인간 구성물들과 인간들이 지속,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인간 구성물들의 기초들을 재구성하고 그것들의 작동과 실패에 대한 형이상학 없는 통찰 그리고 얽힘에 대한 새로운 도덕적 이해를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둘은 같은, 완벽히 같은, 노선에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실상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인류가 생겨난 지, 어느 시점에선가, 경험과 반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취득한 지혜로서 사고 방식이자 삶의 기예는 어느 지역, 어느 문화, 어떤 이한테서도 존재했고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로지 인습적 사고와 형이상학적 사고에서 벗어난 적도 벗어나지도 않은 이들한테만 새로운 것일 뿐이다. '형이상학 없는 알기', 존재론과 인식론의 이분법에 대한 거부 그리고 행위 책임의 전적인 행위자 귀속이라는 도덕적 귀결은 붓다의 가르침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은 일이다. 사이버네틱스와 AI 기술이 일반화 한 시기에,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우리 시대 인간성이 어떻게 회복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방향타를 모두가 함께 잡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글라저스펠트의 사이버네틱 생각하기가 어떻게 붓다의 것과 다르지 않은 지 보여준다

"의도된 은유임을 강조한다. 상호적/순환적 평형/조화의 유지/변화들에서 생겨나는, 은유로서, 불변(invariant) 개념은, 자아 개념에 접근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사이버네틱스에서, 이러한 은유가 충족되는 지점은, '폐회로(closed loop)'에서, 즉, 최소최대 설정 값을 유지하는 피드백 메커니즘들의 순환적 배열 가운데서다. 그 메커니즘들은 설정 값에 근접하기 위해 작동하지만, 그러한 불변의 성취는, 바람에 바위처럼 버티는, 꾸준한 저항이 아니라, 점차적 상쇄(혹은 보상)을 거쳐서다. 우리가 피드백 회로를 들여다볼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인접 과거에 맞서지만 인접 미래로 이미 보상/상쇄받고 있는 현재 행위다.  따라서, 시스템이 획득한 불변이란, 결코 단 하나의 요소로 발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겨난 바대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관계(relationship)들 사이에 있다: 관계란 사물이 아닌 사물(事物)들* 사이에 있다.

*사물이란, 행위와 행위 결과를 총칭하는 용어다; 하나의 행위에 부속, 수반되는 일련의 행위들과 그러한 행위의 결과들에서 비롯된 관계들 사이에서 목하 행위의 목적,  일정 불변치를 발견한다 한들 그것은 이내 잠시 후 또 다른 새로운 일련의 행위들, 즉 상황 속으로 진입한 이후, 시스템을 보존하기 위한 또 다른 목하 행위에 요소로 쓰일 것이다. - 역주

아가, 나의 제안처럼, 관계적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경험 대상 세계에 자리 잡을 수 없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심장에 있지도, 오늘날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것처럼, 머리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그 어디에도 자리할 수 없지만, 그저, 구별, 관계짓는 우리 행위의 연속성에서만 그리고 우리 경험은 진정 우리 것이라는 직관적 확실성에서만 자신을 현시할 뿐이다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 p.p.186-7: ‘사이버네틱스, 경험 그리고 자아 개념’ [1970]  원본:  http://vonglasersfeld.com/056

 

 

용어와 개념들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의  radical constructivism은 통상 급진적 구성주의로 옯겨진다. '급진적'은 영어 'radical'을 정치, 사회 운동적 차원에서 선취하게 한다; 이론적, 사상적 차원에서는 '근본적'이 선취된다.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이라면, 어떤 것으로 옮겨도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RC의 방식과 기풍, 방향성은, 구도자의 수행과 다르지 않게, 모든 차원,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일관되게 관철시키는 것이다. 용어, 'radical'은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보다는 '근본적'이 더 나아보지만, 모국어 중심주의에서 자유롭다면, '래디컬'이라 쓰는 것이 좋다. (용어 ‘Radical Constructivism’의 번역어 선택에 관해)

또한, 저자의 RC는 통상 인식론의 한 종류로 가름된다. 이러한 가름이 갖는 의도를 회피하기 위하여 폰 글라저스펠트는 자신의 RC에 대해 '알기 이론'이라 칭했다. 이것은 존재론의 전제가 불필요하고, 존재론을 불러들임으로써 피할 수 없이 형이상학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RC라 부른 것은 구성론은 기술될 수 있는 모든 차원들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개념 구성이 어떤 식이든 독립된 '객관적 실재/현실"의 재현일 수 있고, 재현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명백하게 단념하지 않은 .... 이들은 여전히 전통적 지식 이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Glasersfeld 1991)  이와 관련해서, 그의 아티클 '형이상학 없는 알기 이론'과 '객관성이여 안녕'을 참고하기 바란다.

폰 글라저스펜트의 RC를 조성하는 개념들의 네트워크에서, 학습자들은 그의 개념들이 전통적 지식이론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용어들을 달리 사용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의 근원, 구성에 필요한 요소들, 구성의 한계, 구성물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반성, 구성 행위자의 책임에 이르기까지 낱낱히 선명하게 자신의 구성들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붓다의 빤야를 듣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이것을 모든 차원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적어도 7년은 걸린다고 썼던 것을,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어디선가 읽었다; 붓다 수행에 평생을 보내고서도 빤야를 얻지 못했다면, RC가 많은 도움이 되리라. 

RC의 두 개의 원리는, 명확히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과 일치한다:

1. 지식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지 주체가 쌓아 올리는 것이다.

(사띠하고 챙긴 가운데 움켜진 것들로 스스로 만든 고된 삶의 세계) 

2. 인지의 기능은 적응이 목적이며, 그래서 경험 세계 조직화에 복무하는 것이지,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실재/현실의 발견이 아니다.

(수행은 다행중 복된 삶을 위한 것으로 빤야에 입각한 경험세계의 재조직화가 목적이다.)

 

 

논문과 에세이들

 

근본적 구성론 입문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구성론은 왜 근본적일 수밖에 없는가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구성론적 접근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근본적 구성론의 외관들, 그리고 이 접근이 주는 교육적 권고들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An Exposition of Constructivism: Why Some Like it Radical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08.04.03] 

과학적 지식과 시적 지식 사이 통약불가능성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01.15.98] 

개척자에 대한 회고 (실비오 케카토, 1914-1997)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01.15.98] 

관찰자 구별하기: 마투라나 해석하기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12.19.97]

쟝 삐아제에 표하는 경의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12.12.97]

시간 개념 구성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10.06.97]

사이버네틱스와 살며 쓰는 슬기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10.06.97]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반성들 by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이외의 것들은 

을 참조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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