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발생적 인식론

 GENETIC EPISTEMOLOGY

(발생론적 인식론)

Jean Piaget
 

TRANSLATED BY ELEANOR DVCKWORTH

WOODBRIDGE LECTURES
DELIVERED AT COLUMBIA UNIVERSITY

IN
OCTOBER OF 1968
NUMBER EIGHT
 

* 표시는 저자 주; 아라비아 숫자는 역자 주

 

               

*   1   *

 

  발생론적 인식론은 지식, 그리고 특히, 과학적 지식을 그것의 역사와, 그것의 사회 발생, 그리고 특히, 그것의 기저를 이루는 조작들과 관념들의 심리학적 기원에 바탕해서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들 조작들과 관념들은 상식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들로, 그래서 이것들이 어느 정도 더 높은 수준의 지식으로 결과되는 바들을 이것들의 기원들에 입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생론적 인식론은, 또한, 정식화를, 다시 말해, 명확한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지를, 가능한 곳이면 어디서든, 고려합니다 - 특히, 평형 상태에 놓인 사고 구조들에 적용된, 그리고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사고 발달의 형식 변환의 몇몇 사례들에 적용된, 논리적 정식화에 대해 고려합니다. 발생론적 인식론의 본질에 대해 내가 했던 기술은 인식론의 중대한 문제, 즉 인식론에 대한 전통 철학의 견해와 맞서고 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인식론자들에게, 인식론은 현재 시점에 실존하고 있는 바로서 지식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 인식론은, 지식의 발달은 무시한 채 지식을 위한 지식을 위해 그리고 지식 그 자체의 틀 안에서, 지식을 분석합니다. 이러한 사람들한테, 관념의 발달 또는 조작의 발달을 되밟는 것은 역사학자나 심리학자의 관심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인식론자들과는 직접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기서 약술했던, 그들이 발생론적 인식론 분과를 반대하는 주요 이유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러한 반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지식은 끊임없이 계속 진화 중에 있습니다: 어제의 과학적 지식은 오늘 자신이 변했음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에는 지식의 역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오늘 통용되고 있는 지식, 여하튼 그것의 현재 상태가 명확하거나 안정된 상태에 있는 것 같은 지식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식의 현재 상태란, 그 역사의 한 순간으로, 과거 지식의 그 상태가 변했던 것처럼 빠르게, 허다한 경우 오히려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사상 또는 사고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입니다. 더 명확히 말하면, 지속적 구성과 재조직의 과정입니다. 이는 거의 모든 과학적 탐구 분야에서 진실입니다. 한 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첫째 사례는, 현대 물리학, 더 명확히 말하면, 미시 물리학 분야에 관여된 것으로, 이 영역에서, 지식의 그 상태는 다달이 변하고 있으며 한 해만 지나더라도 그 내용이 뚜렷히 수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주제 사안에 대해 탐구가 계속되는 동안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한 연구자의 작업에서조차 자주 벌어지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파리에 있는 Louis de Broglie 예를 들어봅시다. 몇 해 전만 해도 de Broglie는 Niels Bohr의 불확정론에 대한 견해를 고수했습니다. 그는, 코펜하겐 학파와 의견을 같이하여, 미시물리학적 사건들의 불확정성 이면에서 그 어떤 확정성도 발견될 수 없다고, 불확정성은 아주 뿌리 깊은 실재이며, 이러한 불확정성의 필연성에 대한 근거들은 제시될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새로운 사실들은 de Broglie의 마음을 돌리게 했고, 그래서 이제 그는 정반대의 관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기서 말한 과학적 생각하기에서 일어나는 형식 변환에 대한 한 예는, 이어지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 창조적인 한 사람의 이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수학 분야에서 들어보십시다. 몇 년 전, Bourbaki 그룹 수학자들이 모든 수학의 토대를 이루는 구조들을 격리시키려, 즉 어떤 것과도 결합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얻으려,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세 가지 모체(母體) 구조들을 확립시켰습니다: 대수 구조, 순서 구조, 위상 구조. 이들 구조는 수학의 구조주의 학파의 바탕을 이루었고, 모든 종류의 수학적 구조들의 토대로 알려졌으며, 그밖에 다른 구조들도 이로부터 얻어졌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그토록 많은 결실을 보았지만, McLaine과 Eilenberg가 범주들에 대한 나름의 개념 <즉, 해당 요소들 위에서 정의된 모든 함수들의 집합을 갖는, 그 함수들과 함께 처리된 그 요소들로 이루어진, 집합들>을 발전시킨 이후로, 이제 어느 정도는 쇠퇴했으며 또한 적어도 방향에서는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Bourbaki 그룹은 더 이상 정통과 일치하지 않으며 범주들에 대한 아주 최근의 나름의 개념들을 참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기서 든 또 다른 예는 매우 빠르게 변한 과학적 생각하기의 아주 근본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내 다시 한번 더 반복하는 바로, 우리는 한편에 과학적 생각하기의 역사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 오늘날 과학적 사상 또는 사고의 본체가 자체로 따로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지속적인 형식 변환과 지속적인 재조직의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이 함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러한 변화들의 역사적, 심리학적 요인들은 과학적 지식의 본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에 중요하게 수반되는 것들이란 점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또 하나의 견해는, 철학적 서클들에서 자주 인용되는 바로, 지식 이론은 본질적으로 과학의 타당성, 이러한 타당성의 기준들, 그리고 이의 정당화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바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일 경우, 이때 과학 그 자체에 대한 연구는, 사실, 토대에 있어서는 적절치, 즉 타당치 못한 것이라고 논증된다. 발생론적 인식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러한 규준과 사실의, 그리고 평가(판단)와 기술(설명)의 분리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오로지 과학들이 실제 발달하는 가운데서만 과학들을 이끌고 고무시키며 규제하고 있는 암시적 가치들과 규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밖에 다른 태도는 고립된 관찰자의 개인적 견해들을 지식으로 온당치 못하게 강요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현대 과학적 관념들의 발생이 심리적 또는 사회논리적 요인들에 비추어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한 두 영역의 예들을 들겠습니다. 첫째 예는 집합 이론에서 Cantor가 성취한 발달입니다. Cantor는 이 이론을 매우 기본적인 조작, 일대일 대응 조작에 바탕해서 발달시켰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연수 전체와 짝수 전체를 차례차례 일대일로 대응시키게 되면, 우리는 자연수도 짝수도 아닌 첫번째 초한 기수, aleph zero(농도=A0)를 얻습니다. 이러한 일대일 대응이라는 아주 기초적인 조작은, 바로, Cantor로 하여금 그의 시대에 이르러 이미 완벽히 활용된 유일한 수였던 유한한 수 계열들을 초월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일대일 대응 조작이 어디서 나왔는지 묻는 것은 흥미있어 보입니다. 기원, 또는 뿌리까지 따져들어가는 경우 누구든 새로운 구성을 발명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Cantor가 그것을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자신의 생각하기 가운데서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수학에 몰두하기 훨씬 전에 이미 갖추어진 장치의 일부였습니다; 그 까닭은 가장 기초적인 종류의 사회학적 또는 심리학적 관찰로도 일대일 대응이 원시적 조작임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류의 초기 사회들에서 그것은 경제적 교환의 바탕이었고, 어린 아이들한테서 우리는 구체적 조작 수준 이전에서조차 그 조작의 기원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겨나는 의문: 이러한 가장 기초 조작인 일대일 대응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어 바로 관련된 다음 질문으로 이끌립니다: 일대일 대응과 자연수에 대한 나름의 개념의 발달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일대일 대응 조작이 널리 퍼져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수란 (類들에 속한 성원들 사이 일대일 대응이란 의미로) 동등한 類들의 類라고 하는 Russell과 Whitehead의 테제를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일대일 대응에 추가된 그밖에 어떤 조작들에 바탕을 둔 실제하는 수들이 있는가? 이는 이후 우리가 더 자세히 검토할 문제입니다. 그것은, 나름의 어떤 개념에 대한 심리학적 토대들에 대한 지식이 이러한 나름의 개념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함의들을 갖고 있음을 보이는 매우 놀라운 사례입니다. 아이들한테서 나름의 수 개념이 발달하는 바를 연구할 경우, 우리는 수 개념이 동등한 류들에 대한 류들이라는 나름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또는 그밖에 어떤 다른 조작이 마찬가지로 수반되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다른 영역에 속하는 예를 들어 다음 질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Einstein은 <떨어진 상태에서 동시성>에 대한 새로운 조작적 정의를 어떻게 내놓을 수 있었을까요? Newton의 보편적 시간 개념을, 물리학 내 심각한 위기를 야기시키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비판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의 비판은, Michaelson-Morley 실험과 같은, 전적으로 자명한 실험적 발견들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건들이 아주 멀리 떨어져서 동시에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재정의하는 과정이 우리가 쓰는 논리와 조금이라도 어긋났다면, 물리학 내에 상당한 위기가 도래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였어야 했을 것입니다: 물리적 세계가 합리적이지 않든 아니면 인간 이성이 외부 실재를 포착하기에는 무능한 깜냥이든. 그렇지만, 사실 이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러한 위기의 뒤를 이을 격변도 없었습니다. Bergson(1859-1941)이나 Maritain(1882-1973) 같은 소수의 형이상학자들이 이러한 물리학에서 일어난 혁명에 놀라 얼이 빠졌지만(이러한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 오늘날의 철학자들한테는 사과합니다), 거의 모든 영역의 사람들한테 그리고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것은 그토록 심각한 위기는 아니였습니다. 요컨데, 그것은 왜 위기가 아니었을까요? 동시성이란 최초 발달 시기 관념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최초 발달 시기에 속하는 원시적 또는 초보적 개념도 아니며 그러한 미숙한 지각도 아니었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이 주제를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실험을 거친 발견물들이 보여주는 바로, 인간 존재들은 동시성을 정확히는 지각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다른 속력으로 움직이는 두 개의 대상들을 보고 있다가 그것들이 동시에 멈출 경우, 우리는 그것들이 동시에 멈추었다는 바를 만족시킬 지각을 갖지는 못합니다. 유사하게, 아이들이 동시성이 무엇인지 아주 정확한 관념을 갖고 있지 않을 때, 그 아이들은 대상들이 움직이는 빠르기 또는 속력과 관련짓지 않고는 동시성을 구상하지 못합니다. 동시성은, 그렇기에, 최초 발달 시기의 초보적인, 또는 미숙한 직관이 아니라, 지적 (다시말해, 지능의) 구성물입니다.

  Einstein 훨씬 전에, Henri Poincare는 동시성에 대한 나름의 관념을 분석하고 그 관념의 복잡성을 파헤치는 데에 많은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연구들은, 사실상, 상대성을 발견하기 바로 직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러한 주제에 대한 <말이 났으니, Einstein의 후반 작업에 비추어 고려될 때 더더욱 흥미로운> Poincare의 에세이들을 읽을 경우, 우리는 그의 성찰들이 거의 전적으로 심리학적 논증들에 바탕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후 계속해서 시간과 동시성에 대한 나름의 관념들이 보다 더 이른 시기의 초보적 직관인 빠르기/속력 관념에 바탕하고 있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와 같이, 상대성 이론으로 초래된 위기가 왜 물리학에 치명적이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근거들, 심리학적 근거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 일은 <들어맞추기 위해 새로이 배열하기라는 뜻의> 재조정하기였고, 이러한 재조정에 필요한, 실험적이며 논리적 바탕만이 아닌, 심리학적 경로들 또한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사실, Einstein은 심리적 요인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보고 있었고, 내가 1928년 처음으로 그를 만날 기회를 가졌을 때, 그는 나한테 아이들한테서 시간에 대한 나름의 개념 특히 동시성에 대한 나름의 개념의 기원들을 연구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라고 제안했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말했던 것들로 여러분은, 지식의 본성에 대해 숙고할 때 심리학적 자료들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그것이 도움 그 이상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인식론자들은 그들의 분석에서 심리적 요인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심리학에 대한 그러한 언급들의 대부분은 사색 또는 명상에 속하는 것들로 심리학적 실험연구에 바탕하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내 확신하고 있는 바로, 모든 인식론은 형식적 (즉, 타당성을 보증하는 절차 또는 그러한 형식들을 갖춘) 문제들 뿐만 아니라 사실적 (즉, 사실에 바탕한) 문제들을 제출하고 있으며, 사실적 문제들에 맞닥뜨릴 경우 심리학적 발견물들은 관여되어지며 그렇기에 세심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심리학의 경우 유감스런 것은 모두가 다 자신들을 심리학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물리학이나 철학 분야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불행히도 심리학에서는 진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심리학자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인식론자는 심리학적 측면들을 관여시킬 필요가 생길 때, 심리학적 실험연구들을 참조하지도 심리학자들과 상의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반성 혹은 성찰들에만 의존합니다. 그는 생겨난 심리학적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려는 가운데 그 자신의 생각하기 안에 있는 몇몇 관념들과 연관들을 함께 고려할 뿐입니다. 나는 심리학적 발견물들과 연관되어 있을 수 있는, 그 발견물들이 언뜻 보기에는 문제된 것과 거의 별개의 것들로 보일지도 모를, 인식론의 몇 가지 사례들을 들겠습니다.

  첫째 예는 논리 실증주의 학파와 관련된 것입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심리학을 그들 인식론에 넣어 고려한 적이 결코 없음에도, 논리적 존재들과 수학적 존재들이란 단지 언어적 구조들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단언을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논리학이나 수학을 할 때, Morris가 말한 의미에서, 단지 우리는 언어 사용의 일반 규칙인, 일반적 구문론, 일반적 의미론, 또는 일반적 화용론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일반적 입장은 논리적이자 수학적인 실재는 언어에서 얻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학과 수학은 단지 전문화된 언어적 구조들일 뿐입니다. 이제 사실적 발견물들을 검토하기에 적절한 곳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언어가 발달하기 전 아이들한테서 논리적 행위들이 나타나는지 여부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이 행위들을 정렬시키고1 있는 과정들이, 類에 대한 논리를 드러내고 있는지, 질서잡힌 체계 또는 시스템을 드러내고 있는지, 대응 구조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언어가 발달하기 전 어린 아이들이 보이는 행위들의 정렬들 가운데서 논리적 구조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이들 논리적 구조들이 언어에서 얻어지고 있다고 또는 유래하는 것들이라고 말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에 대해 묻는 입장으로 사색 또는 명상으로가 아닌 물음에 대한 객관적 발견물들을 갖는 실험적 방법론으로 접근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발생론적 인식론의 첫째 원리는, 그래서, 심리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심리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심리학적 사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 진행되는 심리학적 실험연구를 사색이나 명상으로 사사로운 추정을 거쳐 답을 발명하려는 것이 아닌 관련된 충고나 정보들을 찾아보고 참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이 났으니, 언어학 분야에서는 논리 실증주의가 번성했던 시절 이후로는 이론적 입장이 역전되었음을 지적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Bloomfield는, 그의 생애 동안, 논리 실증주의의 견해를, 논리에 대한 이러한 언어학적 견해를, 철저하게 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널리 유포되어 여러분도 아다시피, Chomsky는 정반대 입장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Chomsky는, 논리가 언어를 바탕으로 해서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언어가 논리, 이성에 바탕하고 있다고 단언하며, 이러한 이성을 선천적인, 타고난 것으로까지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성을 타고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이것 또한 사실들을 참조하고, 실험연구를 거쳐 결정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심리학 분야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요즘 Chomsky가 방어하고 있는 합리주의<그에 따르면, 언어는 이성에 바탕하고 있으며, 그 이성은 사람한테는 타고난 것으로 생각된다>와 실증주의자들의 언어에 대한 견해<그에 따르면, 논리란 그저 언어를 쓰는 인습 또는 (사회적) 계약이다> 사이에 선택 가능한 모든 해들이 있고, 이 해들 가운데 어떤 것을 고르는 일은 사실에 바탕해서, 즉 심리학적 실험연구에 바탕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 문제들은 사색이나 명상 비슷한 추정으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나는 발생론적 인식론이 전적으로 심리학에만 바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논리적 정식화는 우리가 어떤 정식화 과정을 밟을 수 있을 때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고 발달을 거쳐 완성된 어떤 구조를 예기치 않게 맞닥뜨리거나 알아차리게 될 때마다, 우리는 논리학자들이나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분야의 전문가들의 협력을 받아 이러한 구조를 정식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가설은, 심리적으로 형식을 갖추는 한편의 과정과 정식화라는 또 다른 한편의 과정이 일치 또는 대응하고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식론에서 정식화의 중요성을 인정할지라도, 우리는 정식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 인식론적 문제들을 밝히기 위해서는 심리학적 실험들을 행하는 것이 필히 요구되고 있는 영역들이 어떤 영역들인지를 지적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지만, 정식화가 행해지는 곳들에서조차 왜 정식화 그 자체로는 충분할 수 없는가에 대한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논의하고 싶은 것들은 이들 이유들 가운데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단 하나의 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허다하게 상이한 논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논리도 그 하나만으로는 인간 지식 전체에 대한 구성을 떠받칠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뜻하고 있는 것은, 상이한 모든 논리들이 종합될 때 그것들이 인간 지식의 토대로 기능하기 위해 서로서로 충분히 일관되게 맞물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하나의 논리만으로는 너무 약하고, 그러나 모든 논리들을 종합하면 (필요한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풍요로워져 논리학은 지식에 대한 단 하나의 가치 또는 평가 기저를 형성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왜 정식화만으로는 충분치 않은지에 대한 첫째 이유입니다. 둘째 이유는, Godel의 정리에서 찾아진다. 정식화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기초적 산술을 포함하기에 (필요한 요소들을 갖춰) 충분히 풍요로운 어떤 일관된 시스템도 그 자신의 일관성은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의문들이 생겨납니다: 논리란 그 어떤 것에 대한 정식화, 공리화한 것인데, 도대체 그 어떤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논리가 정식화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진지하게 숙고할 문제입니다. 이곳에서도 동등한 두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어떤 공리 체계든, 처음부터, 증명할 수 없는 명제들 또는 공리들<이것들로부터 그밖에 다른 명제들은 증명될 수 있다>과 정의할 수 없는 토대를 이루는 관념들<이것들에 바탕해서 그밖에 다른 관념들은 정의될 수 있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논리 또는 논리학의 경우, 증명할 수 없는 공리들과 정의할 수 없는 나름의 관념들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것이 바로 논리학에서 구조주의가 제기한 문제이고, 이 문제는 정식화가 토대를 이루는 기저로서는 적당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공리화된 논리 체계들을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논리 체계들의 발달과 그것들의 변함없는 직관적 특성은 인간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사고 그 자체를 숙고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식화로 충분치 않은 세째 이유는, 인식론은 과학의 영역들 안에 사실로 실존하는 지식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이러한 지식은, 실상, 전적으로 형식적이지만은 <즉, 타당성을 보증하는 절차 또는 그러한 형식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에는 또 다른 측면들이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나는 고인이 된 나의 친구, 논리학자, Evert W. Beth를 인용하겠습니다. 그는 아주 오랫 동안 심리학 일반에 대해 그리고 심리학적 관찰 결과들을 인식론 분야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 작업이 심리학에 바탕을 두기 시작한 이래 내 작업에 대한 반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지적 대치의 진전을 위해, Beth는 발생론적 인식론에 대한 한 심포지움에 찾아와 참석해 주었고, 발생론적 인식론이 고심하는 문제들에 대해 세심하게 살펴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심포지움 말미에, 심리학자들을 혐오했음에도, 수학과 심리학적 인식론이란 저작의 공동 저자가 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이 저작은 프랑스어로 출판되었고, 영어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책의 그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인식론이 대면한 문제는, 실제하는 (즉, 사실을 다루는 진지한) 인간 생각하기가 어떻게 과학적 지식을 산출하는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논리 또는 논리학과 심리학 사이에 적절한 연관를 확립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그의 공표가, 심리학이 직접 논리학에 끼어들어야 하는 것을 <이는 물론 잘못하는 일입니다> 주장하고 있지 않지만, 인식론에서, 인간 지식이 갖는 형식적 측면들과 경험에 의존하는 측면들 양자 모두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기에, 논리학과 심리학 둘 모두는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발생론적 인식론은 지식의 형성과 그 뜻 모두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다음 용어들로 정식화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써서 인간 마음은 다소 충분치 않은 <다시 말해, 해당 목적들에 쓰기에는 다소 적합치 않은> 지식의 상태에서 더 높은 지식의 상태로 나아가는가? 어떤 지식이 더 낮거나 다소 적합치 않은 지식인지, 그리고 어떤 지식이 더 높은 지식인지에 대한 결정은 말할 것도 없이 형식적이고 규범적인 측면들을 갖고 있습니다. 지식의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보다 더 우월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심리학자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한 결정은 논리학자들 또는 주어진 과학의 권역 내 전문가들 몫입니다. 이를테면, 물리학 영역에서, 주어진 이론이 다른 이론에 비해 어떤 진전을 보이고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물리학자들의 몫입니다. 우리의 문제란, 심리학의 관점에서 그리고 아울러 발생론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지식이 낮은 수준에서 더 높다고 판단되는 수준으로 어떻게 옮아가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이렇게 옮아가는 전이들의 본성은 사실에 바탕해 논할 문제입니다. 이 전이들에는, 이후 내가 보여주겠지만, 역사가 관여되거나, 또는 심리학이 또는 가끔씩은 생물학이 관여되고 있습니다.

 발생론적 인식론의 토대를 이루는 가설은, 지식의 논리적 합리적 조직화에서 이룬 진전과 이에 대응하여 형식을 갖춰가는 심리학적 과정들이 나란히 병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설이라고 할 경우,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연구할 분야는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고 누가 보아도 명백한 연구 분야는 인간 역사<역사가 있기 전 사람 속 인간 생각하기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확립시키는 것일 것입니다. 불행히도, Teilhard de Chardin(1881-1955)의 호모사피엔스에 대한 심리학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심리학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생물 발생학 분야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생물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개체발생학 쪽으로 선회했습니다. 이들 나름의 관념들에 대해 개체발생학 이상으로 더 쉽게 연구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아이들이 있습니다. 논리 지식, 수학 지식, 물리학 지식, 여타 등등의 발달을 연구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우리는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이 책의 뒷 장에서 논할 것들입니다. 이러한 연구 분야에 진입하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논리적 구조들의 발달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겠습니다. 서로 보완하는 것들이지만, 생각하기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들을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는 모양 또는 띰새를 수반하는 측면을 갖고, 다른 하나는 조작을 수반하는 측면을 갖습니다. 띰새를 수반하는 (생각하기의) 측면은 순간적이자 정적인 특징을 취한 상태들에 대한 모방입니다. 인지 영역에서, 띰새를 수반하는 기능들은, 무엇보다, 지각, 모방, 그리고 <실상 내면화된 모방인> 심상 형성을 들 수 있습니다. 조작을 수반한 사고의 측면은 상태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형식 변환를 다룹니다. 이를테면, 조작을 수반하는 사고의 측면은, 어떤 대상 또는 상태의 형식을 스스로 변환시키는, 행위들을 포함하며, 또한 본질적으로 형식 변환의 체계들인, 지적 조작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들은 (자신들을) 다른 행위들과 비교할 수도 거꾸로 나아갈 수도 있으며, 다시 말해, 행위들은 순방향과 역방향 모두 밟아갈 수 있으며 <이것은 뜻하는 것은, 행위 A의 결과들이 또 다른 행위 B로 인해 제거될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동일성 조작을 야기하는 행위 B를 수반한 행위 A는 변치 않는 상태를 남긴다>, 내면화될 수 있기도 하다; 행위들은 표상, 즉 다시떠오름을 경유해서 밟아나갈 수는 있지만 실제로 드러난 행동을 경유해서는 밟아나갈, 이행될 수 없습니다. 띰새를 수반하는 외관들은 언제나 조작을 수반하는 측면들보다 더 낮은 수준 또는 위치에 자리잡게 됩니다. 상태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오로지 일정한 형식 변환들의 결과로서, 또는 그밖에 다른 형식 변환들의 출발점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 달리 말해, 내 생각하기 방식으로 사고의 본질을 이루는 측면은 조작을 수반하는 사고의 측면이지 띰새를 수반하는 사고의 측면이 아닙니다.

 이 같은 관념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인간 지식이란 본질적으로 능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다는 것은 실재를 형식 변환들로 조성된 체계에 동화시키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어떤 특정 상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해할 목적으로 실재의 형식 또는 구조 혹은 그 외양을 바꿔보는 것, 즉 실재를 변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힘입어, 나는 나 자신이 지식을 실재에 대한 모사, 수동적 모사로 보는 견해에 대립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관념은 순환 논법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사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모사하고 있는 모델(또는 대상)을 알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지식 이론에 따르면, 그 모델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그 모델에 대해 우리가 모사한 것이 그 모델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 결코 알 수 없을, 순환 고리에 우리가 사로잡힐 그때, 혹은 그날까지> 그것을 모사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하기 방식으로,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게 대처하는 또는 행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대상을 안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또는 그 대상을 수반하며, 이행될 수 있는 형식 변환 체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실재 알기란, 더도 덜도 없이 그 목적 또는 요구에 적합하게, 실재에 상응하는 형식 변환 체계들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구성물들은 실재의 형식 또는 구조 혹은 그 외양의 변환들과 더도 덜도 없이 동형 관계에 있습니다. 지식을 구성하는 형식 변환 구조들은 실재에 있는 형식 변환들을 모사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가 경험으로 고를 수 있는, 실재와 동형을 취하는 가능한 모델들일 뿐입니다. 지식은, 그래서, 점점 적합해지는 형식 변환 체계들입니다.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이 추상적인데 반해, 물리학 지식<일반적으로 경험에 바탕한 지식>은 구체적이라는 점은 의견 일치를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논리적, 수학적 지식은 무엇에서 추상된 것인지 물어봅시다. 가능한 대답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우리가 어떤 대상에 맞서 행위할 때 우리의 지식은 그 대상 자체에서 얻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경험론 일반의 관점이며, 실험과 경험에 의존하는 지식의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타당합니다. 또 하나 가능한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맞서 행위할 때 <형식 변환은 마음 속에서 이행될 수 있기에> 우리는 행위 그 자체, 또는 당신이 원한다면 조작, 또한 고려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설에서, 추상은 맞서 행하는 대상에서 끌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에서 끌려나옵니다. 이것이, 내 보기에, 논리적, 수학적 추상의 바탕입니다.

  물리적 세계가 수반되는 경우들에서, 추상은 대상 그 자체에서 얻어진 추상입니다. 이를테면, 아이는 대상들을 손으로 들어올려 그것들의 무게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통은 큰 것들이 작은 것들보다 무겁지만 가끔씩은 작은 것들이 큰 것들보다 무거울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 아이는 경험으로 알아내며, 그의 지식은 대상들 그 자체에서 추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식이, 대상에서가 아니라, 행위들에서, 그리고 정렬된 행위들에서 추상되는 최초 발달 시기 사례와 꼭같은 한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하며 아주 철저히 연구했던 이러한 예는, 원래는 나의 수학자 친구가 자신이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된 출발점으로 들어보이며 처음으로 나한테 말했던 것입니다. 그 친구가 어린 아이였던 어느날, 돌멩이들을 세고 있었다; 그것들을 한 줄로 늘어 놓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어 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재미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면 몇일까 하고 세었더니, 놀랍게도, 열이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둥그런 원 모양으로 놓고 다시 세었더니, 또 다시 열이었습니다. 원 모양에서 반대 방향으로 세어도 열이었습니다. 돌멩이들을 어떻게 놓든, 그것들을 세면, 수는 열에 이르렀다. 그 친구가 여기서 발견했던 것은, 수학에서, 가환성 또는 교환성, 다시 말해, 합계는 순서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성질로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는 이것을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이러한 가환성은 그 돌멩이들의 속성일까요? 그 돌멩이들이 있었기에, 말하자면, 그 돌멩이들이 그 친구가 그것들을 여러 방식으로 놓도록 한 것은 사실입니다; 물방울들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그 친구의 지식에는 물리적, 또는 물리학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서는 돌멩이들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돌멩이들을 한 줄로 또는 원형으로 놓은 것은, 주체, 그 친구였습니다. 더더구나, 합계 또한 돌멩이들 자체 속에 있지 않았다; 그 돌멩이들을 (하나의 전체로) 결합시킨 것은 그 친구였습니다. 이 미래의 수학자가 그날 발견했던 지식은, 그렇기에, 돌멩이들의 물리적 속성에서 끌어낸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들로 이행했던 행위들에서 끌어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내가 논리적 수학적 지식이라 부르는 것이지 물리학적 지식이 아닙니다.

  단순 추상이란 말로 부를, 대상들에서 얻어지는 추상의 첫번째 유형이 있고, 두 가지 뜻으로 쓰이는 용어 reflective를 붙여 부를 두 번째 추상 유형이 있습니다. 여기서 "reflective"는 물리학에서 갖는 뜻 외에도 심리학 분야에서 적어도 두 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reflection은 빛줄기가 한쪽 표면을 떠나 다른 쪽 표면에 이르는 '반사' 같은 현상을 지시할 때 쓰이고 있습니다. 심리학적 첫째 의미로, reflection은 하나의 위계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이를테면, 행위 수준에서 조작 수준으로> (위치, 순서, 또는 잇달은 것들이) 投射 또는 옮겨지는 것입니다. 심리학적 둘째 의미로, reflection은 마음 속 반성 과정, 다시 말해, 사고 수준에서 재조직화가 벌어지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행위들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별하겠습니다. 한편에는, 던지기, 밀기, 만지기, 문지르기와 같은 개별 행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별 행위들은 대다수가 대상들에서 얻어지는 추상에서 생겨납니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단순한 유형에 속하는 추상입니다. 그러나 투사 또는 반성을 수반하는 추상은 개별 행위들에 바탕하지 않고, 정렬된 행위들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행위들은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정렬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합쳐질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것을 가법 정렬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들은 시간에 따라 서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순서 또는 순차 정렬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선과 후가 있다; 이를테면, 특정 행위들이 어떤 목표 달성에 수단들로 없어선 안될 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 특정 행위들을 조직하는 가운데서 앞과 뒤가 있습니다. 행위들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정렬 유형은 하나의 행위와 다른 행위를 대응시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정렬 형식은 행위들 가운데 교차(또는 곱해진) 부위를 확립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정렬 형식들은, 논리 구조들 속에서 서로 맞물리는 일없이 각각의 방향으로 연장되며, 바로 그와 같은 행위 수준에서 정렬이 나한테는 이후 사고 속에서 발달하는 논리 구조들의 기저로 여겨집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가설입니다: 즉 논리적 사고의 기원, 뿌리들은 언어 정렬들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전적으로 언어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투사 또는 반성을 수반하는 추상의 기저인 행위들을 정렬하는 과정에서 더 일반적으로 발견됩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우리는, 당연한 것이지만, 개별 행위들과 정렬된 행위들을 구별하는 과정은 단지 점차로 일어나는 것이지, 칼로 베듯 가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밀기, 만지기, 또는 문지르기와 같은 단순한 유형들조차도 더 작은 하위 행위들을 조직화한 결과로 생긴 것들입니다.

  이것은 더 진행할 수도 있는 (더 복잡한 구조들에서 더 작고 단순한 구조들로 나아가는) 퇴행 분석의 시작일 뿐입니다. 발생론적 인식론에서는, 발달 심리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절대적 출발점이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단코 "여기가 바로 논리 구조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으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위들에 대한 일반적 정렬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생물학 영역으로 되돌아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McCulloch이나 Pitts가 논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즉시 신경망과 신경계 속 정렬들이 이루어지는 권역으로 진입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권역의 원리와 법칙에 입각해 논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이들이 논했던 바와 같이 신경계의 논리의 기원 또는 뿌리들을 찾을 경우, 또 한 단계 더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즉 보다 바탕에 가까운 유기적 정렬들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비교 생물학의 권역으로 더 나아갈 경우, 우리는 어디서나 대응 관계를 규제하는 어떤 것이 포함된 구조들을 발견합니다. 나는 생물학으로 진입할 의도는 없다; 단지 이러한 퇴행 분석을 심리학에 있는 그 출발점까지 진행시켜, 인간 생각하기에서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의 형성은 언어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그것들의 형성은 행위들에 대한 일반적 정렬에 그 기원, 뿌리들이 있음을 다시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 2 *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의 기원, 뿌리들은, 언어가 발달하기 전에조차도, 행위들을 정렬하는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음을 보였으니, 이제 행위들에 대한 이러한 정렬들이 어떻게 심적 조작들이 되며 이러한 조작들이 어떻게 구조들을 형성하는지를 보겠습니다. 토대에 속하는, 근본적인, 네 가지 특징들에 입각해서, 나는 내가 조작이라는 말로 뜻하고 있는 바를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작은 내면화될 수 있는 행위다; 즉, 물질, 소재, 질료들로 실행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 속에서도 이행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조작은 거꾸로 진행할 수 있는 행위다; 즉, 한 방향으로 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모든 행위들이 가역적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파이프 담배를 다 피우고, 이 행위를 역으로 되돌려 똑같은 담배를 파이프에 다시 채울 수는 없습니다. 다시 시작해서 새로운 담배로 파이프를 채워야만 합니다. 한편, 더하기는 조작의 한 예입니다. 나는 하나에 하나를 더해 둘을 얻을 수 있고, 둘에서 하나를 빼 다시 하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빼기는 단순히 더하기의 역이다 - 정확히 말해, 같은 조작을 반대 방향으로 밟은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구별할 가역적 유형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상반 또는 부정으로 인한 가역성이다; 이를테면, +A -A = 0, 또는 +1 -1 = 0. 둘째는 역으로 인한 가역성이다; 이것은 부정이 아닌 단순히 순서만 바꾼 것입니다. 이를테면, A = B이면, B = A도 참입니다. 조작의 세 번째 특징으로, 조작은 언제나 어떤 보존, 어떤 불변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조작은, 하나의 행위이기에, 말할 것도 없이 형식 변환의 과정이지만, 단번에 모든 것을 변환하지는 않는, 또는 어떤 곳에서는 가역적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는, 형식 변환의 과정입니다. 이를테면, 산술 덧셈의 경우, 우리는 부분들로 묶어 합치는 방식의 형식을 변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5 + 1, 4 + 2, 3 + 3으로 할 수 있지만 불변치는 그 합입니다. 네 번째 특징으로, 어떤 조작도 그 자체로 실존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조작은 조작들의 체계, 또는 우리가 전체 구조라 부르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구조라는 말로 뜻하는 바를 정의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구조는 총체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 구조란 하나의 체계로서 그 안에 있는 어떤 요소나 몇몇 요소에만이 아니라 그 자체에 적용되는 법칙들에 통제받는 체계입니다. 정수 체계는, 잇따르는 수들 그 자체에 적용되는 법칙들이 있기에, 구조의 예가 됩니다. 수많은 상이한 수학적 구조들이 잇따르는 정수들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덧셈으로 특징지어지는 구조, 이른바 가군(加群)이 있습니다. 결합, 교환, 추이, 그리고 모든 덧셈에 대해 닫혀 있다는 법칙들은 잇따르는 정수들 내에서 유지됩니다. 이들 법칙들(로 이루어지는 구조)의 두 번째 특징은 그것들이 형식 변환의 법칙들이라는 점이다; 그 법칙들은 정적인 성질들이 아닙니다. 정수의 덧셈의 경우, 우리는 하나의 수에 어떤 수를 더해 또 하나의 수로 변환시킬 수 있습니다. 세 번째 특징으로, 구조는 자신을 스스로 조절하고 있다; 즉, 이들 변환 법칙들을 이행하기 위해 우리는 그 체계 밖으로 나가 외부의 어떤 요소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비슷하게, 변환 법칙이 일단 적용되면 그 이행 결과 또한 그 체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가군(加群)을 다시 언급할 경우, 하나의 정수를 또 다른 정수에 더할 때 우리는 잇따르는 정수들 안에 있지 않는 어떤 요소를 찾아 잇따르는 정수들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두 정수를 더하면 그 결과는 변함없이 잇따르는 정수들 내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또한 닫혀 있다고 부를 수 있지만, 이것이 하나의 전체로서 구조가 전체로서 다른 구조 또는 여타 구조들과 관계될 수 없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 어떤 구조든 더 큰 체계의 하부-구조일 수 있습니다. 정수가, 분수를 포함하는, 더 큰 체계의 일부라는 것은 아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여기서 어떤 독자는 "구조들"은 실재하는, 객관적인 실존를 갖고 있는지, 또는 단지 우리가 실재를 분석할 때 쓰는 도구들에 불과한 것인지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더 일반적인 질문의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관계들이란 객관적인 독립된 실존을 갖고 있는가? 우리의 답은, 우리 지식의 타당성을 이해하는 것과 정당화하는 것은 관계들의 실존을 전제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은 단어 실존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이제 Bourbaki 학파 수학자들의 모체 구조들을 검토하고, 이들 모체 구조들이 자연적이자 심리학적인 어떤 것과 대응하는 것인지 또는 공리적 방법으로 확립된 철저한 수학적 발명품들인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

  여러분도 잘 아다시피, Bourbaki의 목표는 수학의 다양한 모든 분야들을 동형 관계로 묶는 구조들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수론, 미적분학, 기하학, 위상학과 같은 분야들은 각기 구별되고 서로 관련이 없었습니다. Bourbaki가 하고자 했던 것은 이 모든 다양한 내용들에 공통된 형식들 또는 구조들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시도했던 절차는, 각각의 분야에 있는 각각의 구조에서 시작해서 각 구조를 그것이 가진 가장 기본 형식으로 변형, 환원시키는 일종의 퇴행 분석이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그 어떤 선험적인(a priori: 경험 또는 관찰과는 독립해서 실존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실존했던 수학에 대한 귀납적 실험연구와 검토의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실험연구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독립된 세 가지 구조들을 끌어냈습니다. 세 가지 구조들 각각의 내부에 차이들을 만들거나 둘 또는 그 이상의 구조들을 결합해서, 그밖에 모든 구조들을 생성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 구조들을 모체 구조들이라 불렸습니다. 이제 인식론과 관련해 제기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 구조들은 자연수들이 당연시 되듯이 자연적인 것들일까요? 아니면, 이것들은 전적으로 인공적인, 단지 공리적 방법으로 이론을 형성해서 얻은 결과들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려는 시도로 이들 세 가지 모체 구조들을 더 상세히 살펴봅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여기서 이 문제를 분석하지는 않겠지만, 앞서 언급했던 "범주"라는 더 일반적 개념도 마찬가지로 심리학적 대응물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Etudes d'epistemologie genetique: Epistemologie et psychologie de la fontion (1968)의 Vol. XXIII을 참조하라고 권합니다.

 

  첫째는 Bourbaki가 대수 구조라 불렀던 것입니다. 이 구조를 형성하는 원형은 군(群)이라는2수학적 개념입니다. 온갖 종류의 수학적 군들이 있습니다: 기하학에서 발견된 것으로 변위 또는 변환 군; 잇따르는 정수들에서 내 앞서 언급한 가군; 그리고 그밖에 수많은 다른 군들. 대수 구조들은, 그것들이 갖는, 내가 앞서 기술한 상반 또는 부정의 뜻을 지닌, 가역성의 형식으로 특징지워진 것들입니다. 그 형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습니다: "P · P-1 = 0, 이것은 "조작 P에 P의 역조작 P-1을 곱하면 0이다"라고 읽습니다. *

  구조의 둘째 유형은 순서 구조입니다. 대수 구조가 본질적으로 류와 수들에 적용되는 것에 반해, 이러한 순서 구조는 관계된 상태들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순서 구조를 형성하는 원형은 속(束)이며3 , 순서 구조가 갖고 있는 가역성의 특징적 형식은 역입니다. 우리가, 이를테면, 명제 논리를 살펴볼 경우 순서 관련성들이 취하는 이러한 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명제 논리 내 어떤 한 구조에서, P and Q는 형식 변환의 하한이며, P or Q는 상한입니다. 연언(連言) P and Q는 선언(選言) P or Q에 앞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관련성들은 역의 방식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P and Q는 P or Q에 앞서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쉽게 우리는 P or Q는 P and Q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역이라 불렀던 가역성의 형식입니다 ; 이것은 상반 또는 부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는 여하한 것도 부정되고 있지 않습니다.

  구조의 셋째 유형은 위상구조이며, 이 구조는 근방, 경계들, 근접 극한들과 같은 개념들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는 기하학 뿐만아니라 수학의 다른 많은 분야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 세 가지 유형의 구조들은 고도로 추상된 것들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일곱 먹은 아이들의 생각하기에서 우리는 이들 세 가지 유형 각각을 닮은 구조 하나하나를 발견할 수 있으며, 나는 여기서 이것들을 논하겠습니다. 그러기 전에, 모체 구조들과 아이들의 조작 구조들 사이에 있는 이러한 대응에 대한 나의 묘사가 전적으로 개인적 판단에 입각한 주관적인 것이 아님을 보이고자 짧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수 년 전 나는 "마음의 구조와 수학적 구조"라는 주제로 파리 외곽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었습니다. 이들 문제에 대한 토론을 위해 심리학자와 수학자들이 함께 초청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나의 수학에 대한 무지는, 지금 내가 인정하는 것 보다 훨씬 더했습니다. 한편, Bourbaki를 대표하고 있었던 수학자 Dieudonne는 심리학과 관련된 것들은 어떤 것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Dieudonne는 세 가지 모체 구조들을 묘사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어 나는 내가 아이들의 생각하기에서 발견했던 구조들을 묘사하는 연설을 하고나자, 우리는 이들 세 가지 수학적 구조들과 아이들의 조작적 생각하기의 세 가지 구조들 사이에는 아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음을 알아보았으며, 서로 굉장히 놀라워했습니다. 우리는 물론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Dieudonne은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심리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요. 게다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번이 정말 처음이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등가 관계들로 정의된 집합으로서 대수 구조에 대해 내린 유용한 정의는 우리가 여기서 쓰고 있는 정의와 같은 속성들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등가 관계들에 대한 모든 이론들에는 류(類) 이론이 대응될 것이다).

2. 하나의 연산으로 정의된 집합의 원소들이, 그 연산에 대해 닫혀 있고, 결합 법칙이 성립하며, 단위원과 역원이 존재할 때, 그 집합은 그 연산에 대한 군(群)이라 한다.

3. 집합의 원소들 사이에, 두 연산이, 이를테면 E, C, 정의되고, 멱등, 교환, 결합, 흡수 법칙이 성립할 때, 이 집합을 속(束)이라 한다. 

4. ( P C Q ) ⊆ ( P E Q ) ; ( P C Q ) ≤( P E Q ) 

5. 집합에 적당한 구조를 주어 극한이나 연속 개념이 정의될 수 있을 때, 그 구조를 위상이라 한다. 이를테면, 집합족으로 위상을 정의하는 경우: 집합 S의 부분 집합족 T가, i) ÆIT, SIT ii) vi IT인 이들 vi들의 합집합, E viIT iii) viIT인 이들 vi들의 교집합, C vi I T 일때, T를 집합 S의 위상이라 한다. 

 

아이들의 생각하기에서 대수 구조들은 아주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들이지만, 류의 논리, 분류에 대한 논리에서는 바로 발견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변수들을 만족시키는 다중적인 복잡한 분류 절차에 따라 일단의 대상들을 더미들로 나누기 보다는 유사성에 따라 나누는 단순한 분류(또는 유별하기) 조작들에 속하는 보기를 하나 들겠습니다. 아이들은 일곱이나 여덟살이 되면, 내 앞서 정의했던 용어 조작의 뜻을 갖는, 조작들을 써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조작적 시기에도 온갖 종류의 더욱 원시적인 분류하기 시도들이 있습니다. 너댓살 먹은 아이들한테 다양한 모양으로 잘려진 조각들, 이를테면 원, 사각형, 그리고 삼각형들 같이 간단한 기하학적 형상들을 주면, 그것들을 모양에 바탕해서 (나름의 범주로 조직된) 일군의 작은 묶음들 속으로 끼워넣을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내가 모양, 띰새를 형성하고 있는 묶음들이라 부르고 있는 것들을 묶어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아이들은 온갖 원들을 갖고 조그만 것 하나를 디자인 하고 있을 것이며, 온갖 종류의 사각형들을 갖고 또 다른 조그만 것 하나를 디자인하고 있을 것이며, 그리고 이들 디자인들은 분류하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디자인한 것이 바뀐 경우 분류하기도 바뀌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나이가 조금 더 들면 띰새들을 형성하는 이러한 방식은 자제할 것이며 비슷한 모양들을 모아 조그만 더미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러한 종류의 분류를 이행할 수 있는 반면, 류 포함으로 관계된 상태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그 아이의 분류하기 능력이 여전히 전조작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이러한 뜻에서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하위 류들 사이에서 그것들을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있겠지만, 이를테면, 전체 류를 조성하는 그 어떤 하위 류도 결코 전체 류만큼 크거나 그 보다 클 수는 없다는 점을 연역할 수는 없다. 이 또래의 아이는 오리들은 모두 새지만, 모든 새가 다 오리는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숲에 새가 더 많을까 오리가 더 많을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 아이는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할 것입니다. 분류라는 조작적 구조를 초래하는 것은 바로 류 포함 관련성이며, 그 구조는 실상 그 기능에서는 수학자들이 쓰는 대수 구조들과 같은 것들이다. 류 포함 구조는 다음의 형식을 취한다: 오리와 오리가 아닌 그밖에 모든 새들의 합은 모든 새라는 류를 형성한다; 새와 새가 아닌 그밖에 모든 동물들의 합은 모든 동물이라는 류다; 등등. 또한 다른 용어로 표현하면, A + A´ = B, B + B´ = C, 등등. 이러한 관련성은 즉각 역으로 뒤집힐 수 있음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에서 새를 제외한 모든 동물들을 빼면, 새가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부정을 사용한 가역성입니다: A - A = 0. 이 구조는 정확히 말하면 군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역은 있지만, 토톨로지, A + A = A 또한 있습니다. 새에 더 많은 새를 합해도 새입니다. 이는 이 구조에서는 결합 법칙이 유지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A + A - A 라고 쓰고, 괄호들을 칠 경우 결과가 달라집니다. (A + A) - A = 0, 반면에 A + (A - A) = A. 그래서 이 구조는 완전한 군이 아닙니다; 이 구조를 나는 군짓기라 부르고 있으며 이것은 유사-대수 구조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류(Klass)란 유별하기(Klasseneinteilung)로 얻어진 각각의 짝을 류라 한다'. 유별하기란 어떤 집합 S의 원소들 가운데 어떤 동치 관계를 택해 서로 동치인 원소들끼리 짝을 나누는 것이다; 이때 동치 관계란 반사율(a~a), 대칭률(a~bab~a), 추이율(a~b, b~caa~c)을 만족시키고 있는 관계며, 이 관계에 따를 경우 다른 짝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원소는 있을 수 없다. ~는 원소들 사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음을 뜻한다. 이를테면, 평면 위의 두 직선은 대칭률만을 만족시키고 있으며, 실수의 대소 관계는 추이율만을 만족시키고 있다.

7. 어떤 논리학자들은 용어 "류(class)"와 용어 "집합(set)"를 서로 바꾸어 쓰고 있으며; 또 다른 논리학자들은 (이를테면) 집합을 '그 자체가 어떤 류의 원소인 류"로 정의하고, 적합한 류를 '어떤 류의 원소도 아닌 류"로 정의하여 둘 사이를 구별한다. 이에 따라 류 논리는 집합론에 다름아닐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Russel의 역설을 참조하시오.

8. 'collection' 어떤 목적을 위해 또는 어떤 과정의 결과로 한 장소에 모은 소재나 物들의 묶음; 그렇게 묶기;수집. 

9. 아동 심리학에서 이 용어를 '유목 포함'이라고, 분류를 '유목화'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 단어를 쓰는 사람을 제외한 그 누구도 '유목'이란 단어가 이런 뜻으로 쓰이리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기에, 아무 생각없이, 이를 일어에서 차용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고 생각된다.

 

   비슷하게, 아이들의 생각하기에는 분류 구조만큼이나 원시적 또는 초보적인 매우 원시적인 순서짓기 구조가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예는 (가공된 한 묶음의 사물들을 시간의 잇따름에 따라 배열하는) 순차배열(seriation) 구조입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다음과 같은 문제를 부여했습니다. 먼저 길이가 다른 막대 묶음을 줍니다. 막대 길이의 차이는 주의깊이 비교할 때에야 알아볼 수 있도록 작게 합니다; 이는 쉽게 지각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닙니다. 길이의 차이는 1/8에서 1/4 인치 정도고, 막대는 10개 정도, 그리고 가장 작은 막대의 길이는 2인치 정도입니다. 그리고나서, 아이들한테 막대들을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으로 순서대로 놓아보라고 합니다. (아직 조작할 수 없는) 전조작기에 있는 아이들은 (내가 기술했던 구조에 대한 의미에서) 그 어떤 구조적 틀 없이 이 문제에 접근합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큰 막대 하나, 작은 막대 하나를 집어낸 다음, 이어 다시 큰 막대 하나, 작은 막대 하나를 집어내고, 또 다시 큰 막대 하나, 작은 막대 하나를 집어냅니다. 하지만 이들 막대 쌍들을 정렬시키지는 못합니다; 혹은 한 번에 <작은 것, 중간 것, 큰 것> 세 개씩 집어내어 여러 개의 트리오들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전조작적 단계의 막바지에 있는 아이들은 모든 막대들을 일렬로 놓는 것을, 시행착오를 거치기는 하지만, 해냅니다; 그 아이들은 여하한 체계적 접근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략 일곱 살 정도 아이들부터는 이러한 문제에 착수하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그 방식은 아주 철저하게 체계적인 접근입니다. 그 아이들은 가장 먼저 가장 작은 막대를 찾아낸 다음, 남은 막대들을 훑어 그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을 찾아내고, 이어 다시 남은 막대들을 훑어 그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을 찾아내고,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로, 전체 구조, 완벽한 일렬을 만들 때까지, 계속됩니다. 여기에 함의된 가역성은 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남은 막대들 가운데 가장 작은 막대를 찾을 때, 그 아이는 이 막대가 이제까지 골라낸 것들보다는 크고, 이후 고르게 될 남은 막대들보다는 작다는 것을 단번에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여기서, 관련성 “보다 크다”와 관련성 “보다 작다”를 동시에 정렬시키고 있습니다. 

   이 구조의 조작적 본성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하는 증거가 있으며, 그것은, 그와 동시에 아이들이 추이성에 바탕을 두고 추리, 따지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막대A가 막대B 보다 작은, 두 개의 막대를 아이한테 보여주고, 그 다음 막대A는 숨기고 막대B보다 큰 막대C를 막대B와 함께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아이한테 A와 C는 어떻게 비교되는지 묻습니다. 전조작기의 아이들은 그것들을 함께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 그들은 그것들을 비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조작기의 아이들, 막대들을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아이들은, 이를테면, C가 B보다 크고, B가 A보다 크기 때문에, C가 A보다 크다고 바로 대답할 것입니다. 논리학자들에 따르자면, 순차적 배열은 비대칭적 추이로 관계된 상태들의 묶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린 아이들의 생각하기에서 비대칭적 관련성들과 추이성이 실상 긴밀하게 협력하며 발달하고 있다는 점을 아주 선명히 보고 있습니다. 더더구나, 여기 이 구조는, 아주 분명히, 상반 또는 부정이 아닌 역을 자신의 가역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가역성은 다음과 같은 종류입니다: A가 B보다 작다는 것은, B가 A보다 크다는 것을 함의하고, 이것은 상반 또는 부정이 아닌 단순히 (순서만 바꾼) 역 관련성입니다.

    Bourbaki 수학자들에 따르자면, 구조의 셋째 유형은 위상 구조입니다. 아이들의 생각하기에 이 구조가 있는지 여부는 아주 흥미로운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하학 발달의 역사에서 엄밀한 형식을 갖춘 최초의 유형은 초기 그리스의 유클리드, 측량 기하학입니다. 그 다음으로 발달한 것이 사영 기하학이며, 이 기하학은 그리스 시대에 제안은 되었지만 17세기가 되서야 충분히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위상 기하학은 한참 후인 19세기에서야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세 가지 기하학 유형들 사이에 이론적으로 관련된 것들을 살필 경우, 우리는 가장 원시적 또는 초보적 유형은 바로 위상 기하학이며, 나머지 유클리드나 사영 기하학은 위상 기하학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들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달리 말해, 위상 기학학은 다른 두 유형의 기하학들의 공통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생각하기에서 발달하는 기하학도 그 역사적 또는 이론적 순서를 따르고 있는지 여부는,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유클리드 기하학에 입각한 직관과 조작들이 먼저 발달하고 위상 기하학에 입각한 직관과 조작들은 나중에 발달하고 있음을, 우리가 발견할까요? 아니면, 그 관계된 상태가 반대 방향임을 발견할까요? 사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최초의 직관들은 위상학적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조작들 또한 마찬가지로 공간 나누기, 공간에서 순서짓기 조작들이며, 그 조작들은 유클리드나 측량 기하학의 조작들보다는 위상 기하학의 조작들과 훨씬 더 유사합니다. 

   전조작적 수준에 실존하는 위상학적 직관들의 보기를 두 개 들겠습니다. 전조작기의 아이들은, 물론, 다양한 Euclid 기하학의 대상이 되는 모양들을, Binet가 보여주었듯이, 사각형들에서, 삼각형들에서, 등등에서, 원들을 구별해낼 수 있습니다. Binet의 기준에 따르면, 아이들은 4살 정도면 이를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살 이전에 아이들이 하는 것들을 살펴봅시다. 아이들한테 원을 보여주고, 그것과 똑같이 직접 그려보라고 하면, 그 아이들은 어느 정도 원형의 닫힌 형태를 그릴 것입니다. 사각형을 보여주고, 다시 똑같이 그려보라고 하면, 다시 어느 정도 원형의 닫힌 형태를 그릴 것입니다. 한 번 더, 삼각형을 보여주더라도, 비슷한 같은 형태를 그릴 것입니다. 이들 모양들에 대한 그 아이들의 그림들은 거의 구별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 것들과 달리, 십자가를 그리라고, 십자가를 모사하라고 하면, 그들의 닫힌 띰새들에 대한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것을 그릴 것입니다. 그만그만하게 서로 교차하거나 만나게 되는, 열려진 띰새, 두 개의 선을 그릴 것입니다. 이들 그림들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아이들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상이한 모양들에 입각해 유클리드적 구별들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하지만, 위상학적 구별들은 유지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닫힌 모양들은 닫혀진 대로 그려졌으며, 열린 모양들은 열려진대로 그려졌습니다.

  지각적으로, 다시 말해, 지각의 수준에서, 아이들은 유클리드적 모양들 사이에 있는 차이들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그 모양들을 자신들한테 다시 떠올리려(혹은 표상하려) 할 때 그것들을 구별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단지 근육을 제어하는 문제로 보아 아이들이 사각형을 그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육 제어만을 더 많이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문제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들한테 작은 원과 큰 원으로 형성된 세 가지 상이한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작은 원이 큰 원 안에 있는 것이고, 둘째는 작은 원이 큰 원 바깥에 있는 것이고, 세째는 작은 원이 큰 원의 경계 위에 있는, 다시 말해, 반은 안에 반은 바깥에 있는 것입니다. 사각형을 원과 구별해서 아직 그리지 못하는 세 살 먹은 아이는, 그럼에도, 이들 그림들을, 최소한 안, 바깥, 경계라는 관계된 상태들을 보존하며, 정확히 모사(模寫)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셋째 그림를 가리키며, 이를테면, “작은 원 반이 바깥에 있네요”라고 말하는 묘사(描寫) 방식까지 찾아내기도 합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는, 그 아이들이 작은 원을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계 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며,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위상학과 관계된 것들입니다. 

   어떤 저자들은 직선으로 이루어진 도형들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도형들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안, 바깥, 경계 사이를 구별하는 것만큼이나 원시적 또는 초보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위상학에서는 도형이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만 구별됩니다. 이들 저자들에 대한 응답으로, 몬트리올의 두 심리학자 Monique Leurendau와 Adrien Pinard의 작업을 인용하겠습니다. 이들 심리학자들은, 각 연령별로 20개의 주제들을 잡고 각 주제별로 모두 실험하여, 기하학과 공간 표상에 관한 우리의 모든 실험연구를 반복했으며, 이는 우리가 결코 했던 적이 없는 성과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들 각각의 행동에 대해 질적으로 통계적으로 아주 철저한 분석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Gutman이 개발한 순서(ordinal) 통계학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분석에서 밝혀진 것은, 아이들은 가끔씩 곡선 도형들을 직선 도형들과 구별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 모든 경우 그 아이들은 모든 경우의 구별하기에서 실제로 위상학적 관련성들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도형들은 <유클리드 공리들을 채택해서 형성된> 직선 또는 곡선에 대한 관련성들에서 보아도 상이했을 뿐만 아니라 위상학적 관련성들에서 보아도 상이했으며, 그 아이들은 그들의 판단 기준을 그 도형 또는 띰새들이 갖는 <위상학적> 측면들에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나는 세 가지 수학적 모체 구조들이 개체로서 사람들 속 생각하기의 발달에 그 자연적 뿌리, 기원들을 두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습니다. 이제 아이의 생각하기에서 그밖에 다른 구조들이 어떻게 둘 또는 그 이상의 기본 구조들이 조합된 결과들로부터 발달할 수 있는가를 보이고자 합니다. 내 앞서 지적했듯이, 이것이 바로 수학의 상이한 모든 분야들의 많고 다양한 수학적 구조들의 원천입니다. 심리학에서 예를 하나 가져다 들자면, 나름의 수 개념이 그러한 경우인데, 이 개념은 세 가지 원시적 또는 초보적 구조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만 바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구조들의 조합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나는 Cantor가 초한수 구성에 사용한 조작, 즉, 일대일 대응을 언급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조작이 아이들의 생각하기에서 어떻게 발달하는지 살피는 것에서 시작합시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아이 앞에, 이를테면, 여덟 개의 빨간 토큰을 일렬로 늘어놓고, 그 다음 아이한테 파란 토큰들을 한 뭉큼 주며 빨간 토큰들이 있는 만큼 파란 토큰들을 내놓아 보라고 합니다. 아주 초기 단계에 있는 아이는 빨간 토큰들이 만든 선의 길이만큼 파란 토큰들을 한 줄로 놓겠지만, 실제로 빨간 토큰들과 파란 토큰들의 수가 같은지 같지 않은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일대일 대응에 바탕을 두고 조작하는 일, 즉, 빨간 토큰들 바로 밑에 파란 토큰을 하나하나 갖다 놓는 일은, 조금 더 정교하고 세련된 행동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시각적 대응이라 칭하는 까닭은, 그 아이가 그 일대일 대응을 빨간 것들과 파란 것들 각각 사이에 형성된 밀접한 공간 관련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토큰 수는 변함없이 이러한 공간 배치를 바꿀 경우 <단지 토큰들 간격을 늘이거나 줄일 경우>,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아까와 달라서 이제는 더 이상 파란 것들이 빨간 것들과 같지 않아요”. 우리가 한 줄을 세어 여덟까지 센 다음 그 아이한테 간격을 늘여놓은 다른 쪽 줄에 몇 개나 있냐고 물을 경우, 그 아이는 “틀림없이 아홉이나 열개일 거예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짧은 줄을 여덟까지, 긴 줄을 여덟까지 각각 센다할지라도, 그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맞아요, 이 줄도 여덟, 저 줄도 여덟, 하지만 저 줄에는 더 있어요; 더 길잖아요”. 마침내, 일대일 대응이 조작되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때에야, 공간 배열이 변함에도 수는 변치 않음을 깨닫고 있다는 뜻으로, 수의 보존이 있게 됩니다. 이 경우, 그 아이가 일단 그 어떤 파란 토큰이든 빨간 토큰 하나하나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김으로써 일대일 대응을 확립하면, 우리가 줄의 모양을 어떻게 바꾸든, 그 아이는, 세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도, 출발부터 확립했던 일대일 대응 때문에 수는 변함없이 반드시 같아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대일 대응은 수 개념의 바탕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곧바로 Russell과 Whitehead의 작업, Principia Mathematica에서 수를, 일대일 대응을 거쳐 확립된 숫적 등가의 또는 그러한 뜻에서, <동등한 류들의 류>로 정의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를테면, 다섯 명의 사람으로 구성된 류, 다섯 그루의 나무로 된 류, 다섯 개의 사과로 된 류가 있다면, 이 세 가지 류들이 공통으로 가진 것은 수 5입니다. Russell과 Whitehead가 수를 동등한 류들의 류라고 진술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 수 관념의 바탕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내가 방금 전에 말했듯이 실상 수는 일대일 대응에서 얻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정당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일대일 대응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고, Russell과 Whitehead가 사용했던 유형이 어떤 유형인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첫째 유형으로, 요소들의 성질들에 바탕한 일대일 대응이 있습니다. 두 류들이 공통으로 가진 어떤 성질들로 하나의 류의 원소와 다른 류의 특정 원소가 대응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방금 전에 언급했던 류들, <다섯 명의 사람, 다섯 그루의 나무, 다섯 개의 사과>가 종이를 오려 만들어진 다음 다섯 가지 색깔로 칠해졌다고 가정해봅시다. 따라서 다섯 명의 빨강, 오렌지, 초록, 노랑, 파랑 종이 사람들; 각각 똑같은 색깔을 가진 다섯 그루의 종이 나무들; 마찬가지로 각각 똑같은 색깔을 가진 다섯 개의 사과들이 있습니다. 질적인 일대일 대응은 빨간 사람은 빨간 나무, 빨간 사과와 대응으로, 초록 사람은 초록 나무, 초록 사과와 대응으로 형성됩니다. 실상 이것은, 한번에 두 차원을 감안한 분류하기로 하나의 행렬을 구성하고 있는 이중 분류의 절차에 다름아닙니다. 

   일대일 대응의 둘째 유형은 개별 요소들이 갖고 있는 성질들에 바탕하고 있지 않습니다. 동등한 또는 등가 류들에 대한 Russell과 Whitehead의 유명한 예는 일 년의 12개월, 나폴레옹의 12장군, 예수의 12제자, 황도 12궁 사이에 대응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기에는 한 류의 어떤 요소와 다른 류의 어떤 요소 사이에 특정 대응을 야기하는 개별 요소들의 성질들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테면, 성 베드로가 일월에, 일월이 네이 장군에, 네이 장군이 게자리에 대응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 네 그룹들이 서로 대응하고 있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한 류의 어떤 요소가 그와 다른 류의 어떤 요소와도 대응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일대일 대응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요소는 하나로 세어지며, 그것이 갖고 있는 구체적 성질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요소는 그저 하나인 어떤 상태, 하나의 산술적 단일체 또는 단위가 될 뿐입니다.

   자 이제, 이러한 일대일 대응 조작은, 내가 앞서 묘사했던 대로, 분류에 쓰이며 행렬들을 생기도록 하는 성질들에-기초한-일대일-대응-조작과는 전혀 다른 조작입니다. 한 류의 어떤 요소가 그와 다른 류의 어떤 요소와도 대응될 수 있는 일대일 대응은 전혀 다른 조작입니다. 요소들은 그들의 성질들이 제거되어 산술적 단일체 또는 단위가 됩니다. 이제, Russell과 Whitehead가 분류에 쓰이는 질에 바탕한 일대일 대응을 사용하지 않았음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들은 대응되는 요소들이 단일체들 또는 단위들이 되는 그러한 대응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그러므로, 수의 바탕을 그들이 의도한 대로 단지 분류 조작들에만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실상 순환 논법에, 문자 그대로 악순환에, 빠져들었던 까닭은, 그들이 일대일 대응에 바탕을 둔 나름의 수 개념을 구축하고자 했기 때문이며, 바로 이러한 대응을 확립하기 위해서 그들한테는 산술적 단일체, 또는 단위를 요청하는, 다시 말해, 그러한 일대일 대응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성질이 제거된 요소라는 나름의 개념을 도입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류들로부터 수들을 구성하기 위해서, 수들을 류들에 도입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해결 방안은, 곧바로,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나름의 수 개념의 바탕에 대한 문제, 인식론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다른 해결 방안을 찾아야만 합니다. 심리학의 실험연구가 해결 방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생각하기에서 나름의 수 개념 발달을 연구하고 있을 때, 우리가 발견한 것은, 그 개념이 단지 분류하기 조작에만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라는 점과, 그 개념은 두 가지 다른 구조가 종합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수는 Bourbaki의 대수 구조들의 실례인 분류하기 구조들과 더불어 순서짓기 구조들에도 또한 바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류가 나름의 수 개념에 수반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류 포함은 둘은 셋에, 셋은 넷에, 등등으로 포함된다는 의미로 수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순서 관련성들 또한 필요한데,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우리가 류들의 요소들을 동등한 것들로 간주할 경우 <이러한 간주는 물론 나름의 수 개념에 바탕이다>, 그때 바로 이러한 사실로 우리는 하나의 요소를 다른 요소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 요소들을 따로따로 말하거나 표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토톨로지 A + A = A를 얻습니다; 우리는 잇따르는 수 계열 대신 논리적 토톨로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각기 구별되는 성질들을 갖고 있는 이 모든 요소들이 주여질 때,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단 하나 가능한 방법은 일정한 순서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공간에 요소들이 하나 그리고 뒤이어 또 하나씩 배열되거나, 시간에 따라 하나 그리고 뒤이어 또 하나씩 주의가 집중되거나 하나 그리고 뒤이어 하나씩 세어집니다. 이러한 순서 관련성은, 다른 상황에서라면 동일한 것들로 간주되고 있는 요소들이 서로 구별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결론으로, 수란 류 포함과 순서로 관계된 <상태 또는 것>들의 종합체, 즉 그러한 결합으로 형성된 복합체입니다. 수란 대수 유형의 구조와 순서짓기 유형의 구조 둘 모두에 그리고 동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한 유형의 구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수가 상이한 두 가지 조작 유형들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은, 쉬이 보이는 흔한 것은 아닐지라도, 정말이지 아주 명백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수에 대한 그 어떤 이론적 정식화를 살펴보더라도, 우리는 순서배열(ordination)에 바탕을 둔 수 이론들에서는 언제나 포함이라는 요소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슷하게, 양적배열(cardination)에 바탕하고 있는 수 이론에는 언제나 순서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논리적 생각하기에 쓰이는 조작 구조들의 유형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마치기 전에 마지막 영역 하나를 논하겠습니다. 검토되고 있는 구체적 조작들의 수준에서는, 다시 말해, 6 또는 7살에서 11 또는 12살 사이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가역성이 있다: 부정과 역. 그러나 그것들은 결단코 하나의 체계로 종합될 수 없으며, 그렇기에 같은 체계 내에서 한 유형의 가역성에서 다른 유형으로 가역성으로 이어 진행되는 것이 가능하다. 11 또는 12살 정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형식적 조작들의 수준에서는, 내 말했던 것처럼, 새로운 논리구조들이 구축됩니다: 이를테면, 두 가지 유형의 가역성이 모두 쓰여질 수 있는 명제 논리가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다음 함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P는 Q를 함의한다(P⊃Q)’; 이것의 부정은 ‘P이며 Q가 아니다(P∧~Q)’입니다. 그러나 그 역, Q는 P를 함의한다(P⊂Q) 는 이미 그 체계 내에서 쓰여질 수 있으며, 그 부정(Q∧~P) 또한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은 첫 함의와 관계해서 새로운 관련성을 갖으며, 우리는 이렇게 관계된 상태를 ‘대우(對偶) 또는 상관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더 복잡한 유형의 구조는 아이들한테 준거틀과 공간틀이 이중적으로 수반되는 문제들, 이를테면, 상대적 운동에 대한 문제들을 줄 경우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달팽이 한 마리가 작은 판 위에 있다고 해봅시다. 달팽이가 오른쪽으로 움직일 경우, 그것을 양의 조작이라 합시다. 그리고 그 상반 또는 부정은 달팽이가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달팽이의 오른쪽으로 움직이기의 역은 판의 왼쪽으로 움직이기일 것이며, 그때 대우 또는 상관적 항은 판의 오른쪽으로 움직이기일 것입니다. 만약 달팽이가 판 위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동시에 판이 왼쪽으로 움직일 경우, 외부 준거틀에 입각해서 보자면 달팽이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외부 틀에 입각해서 볼 경우, 달팽이의 운동을 역전시키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달팽이가 다시 되돌아 움직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판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나의 체계에서 두 가지 유형의 가역성을 종합할 수 있기 이전, 다시 말해, 11 또는 12살 이전에는, 두 가지 준거틀을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상이한 운동 유형들 사이에서 정렬 과정을 요구하는 이러한 종류의 문제들을 풀 수 없습니다.

 

 

*  3  *

 

이제까지 나는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을 논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제기했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들 구조들과 언어 사이의 관련성, 그리고 이들 구조들과 감각발동 활동들 사이의 관련성에 관해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이 오로지 언어적 형식에서만 유래된다는 입장에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는, <그 어떤 개체 속 지적 발달 과정에서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은 언어가 나타나기 전에 실존하는 것들이다>라는 점입니다. 언어는 두 살 반 정도 어딘가에 나타나지만, 그 전 24개월을 전후로 해서, 행위 논리라는 자신의 논리를 갖는 실용적 지능인 감각발동 지능이 있습니다. 감각발동 지능을 형성하는 행위들은 반복될 수도, 일반화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담요 위에 있는 장남감을 잡기 위해 담요를 자기 쪽으로 당기는 것을 배웠던 아이는, 그때부터, 담요를 끌어당기는 깜냥으로 그 위에 있을 수 있는 그밖에 어떤 것이라도 잡을 수 있습니다. 그 행위는, 마찬가지로, 줄 끝에 매달린 것을 잡기 위해 줄을 당기는 것을 배우도록, 또는 멀리 있는 대상을 움직이기 위해 막대를 쓸 수 있도록, 일반화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의 행위로 반복되며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을 scheme이라 불렀으며, 그러한 scheme들에는 논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주어진 scheme 그 자체로 논리적 성분을 갖지는 않지만, scheme들이 서로서로 정렬될 수 있으며, 그래서 행위들의 일반적 정렬을 함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렬은 논리적 수학적 구조의 출발점이 되는 행위들의 논리를 형성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scheme은 하위 scheme들 또는 하위 체계들로 형성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대상을 움직이려 막대를 움직일 경우, 그 scheme 내에서는, 첫째, 손과 막대 사이 관련성을 형성하는 하위 scheme이 있고, 둘째, 막대와 그 대상 사이 관련성을 형성하는 하위 scheme이 있고, 셋째, 그 대상과 공간 속 그 대상의 위치 사이 관련성을 형성하는 하위 scheme 있으며, 기타 여러 하위 scheme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함이라는 관련성의 시작입니다. 하위 scheme들은, 하위 류들이 분류라는 논리적 수학적 구조에서 전체 류 안에 포함되는 것처럼, 전체 scheme에 포함됩니다. 좀 더 이후 단계에서 이러한 류 포함 관련성은 개념들을 생겨나게 합니다. 감각발동 단계에서 scheme은 일종의 실용적 개념입니다.

  scheme들의 정렬에 수반되는 또 다른 유형의 논리는 순서 논리입니다: 이를테면, 목적한 바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특정 수단들을 빈틈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예를 보면, 수단들과 목표 사이에는 하나의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재차, 이후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에 속하는 순서의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실용적 순서 관련성들입니다. 또한 원시적 또는 초보적 유형의 일대일 대응 또한 있습니다. 이를테면, 유아가 어떤 모델을 모방할 때, 한편에 그 모델, 그리고 다른 한편에 그 유아가 모방한 것 사이에 어떤 대응 관계가 있습니다. 유아가 그 자신을 모방할 때조차도, 말인즉, 유아가 어떤 행위를 반복할 때조차도, 대응 관계가 있습니다: 한번 이행했던 바로서 행위와 그 다음에 이행했던 바로서 행위 사이에 말입니다. 

   달리 말해,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감각발동 지능에 있는, 내가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의 토대들이라 주장하는, 그 어떤 포함 논리, 그 어떤 순서 논리, 그 어떤 대응 논리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분명 조작들이 아니지만, 나중에 조작들이 될 것들의 발단입니다. 우리는, 또한, 조작들에 필수적인 두 가지 특징들<보존의 형식과 가역성의 형식>의 발단을 이러한 감각발동 지능에서 발견합니다. 

   감각발동 지능이 갖는 보존 특징은 대상 영속이라는 나름의 개념 형식을 취합니다. 이 개념은 유아가 첫돌 막바지 근처에 이를 때까지는 실존하지 않습니다. 7에서 8개월 정도된 유아가 호기심을 갖는 어떤 대상에 닿으려고 할 때 유아와 그 대상 사이에 갑자스레 가로막이를 우리가 칠 경우, 그 유아는 그 대상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또한, 이제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그 유아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손수건 같은 앏은 가로막이일지라도, 그 가로막이를 옆으로 밀쳐내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유아가 첫돌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 대상에 닿으려 계속해서 그 가로막이를 옆으로 밀쳐내려 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위치를 바꿀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 대상을 상자에 넣어 의자 뒤쪽으로 가져갈 경우, 그 아이는 이러한 계속된 위치 변화들을 쫓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감각발동 수준에서 이러한 대상 영속이라는 나름의 개념은 이후에 조작적 수준에서 발달하는 보존이라는 나름의 개념과 등가인 것입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가역성의 발단을 공간 위치들과 위치 변화들을 이해하는 가운데, 즉, 감각발동 지능이 절정에 이른 시점에서 아이가 움직이고 있는 공간 내의 움직임(動勢 또는 무브망)을 이해하는 가운데, 볼 수 있습니다. 두 살 초반 아이들은, 기하학자들이 변위 또는 변환 군이라 부르는, <한 방향의 움직임은 다른 방향의 움직임으로 인해 취소될 수 있다는, 공간 속 한 점에는 수없이 많은 상이한 길을 거쳐 다다를 수 있다는 점으로 납득되는> 것을 포함하는 나름의 실용적 공간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자들이 침팬지와 유아들한테서 자세히 연구했던 우회(detour) 행동입니다.  

   그래서 이것 또한 실용적 지능입니다. 이것은 사유, 사고 또는 생각의 수준에 있지 않으며, 어떤 식으로도 그 아이의 표상 즉 다시떠오름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이 정도의 지능을 갖고도 공간에서 할 바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조직화는, 의사 표현을 위해 언어를 쓰기 전 6에서 12개월 정도 되면 실존합니다. 이것이 나의 첫째 논거입니다.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이 오로지 언어적 형식에서만 유래된다는 입장에 반대하는) 나의 둘째 논거는, 생각하기는 논리적이지만, 쓰일 수 있는 언어는 갖지 못한 아이들, 말인즉, 청각 장애아들과 농아들을 다룬 것입니다. 청각 장애아들과 농아들의 지능에 관한 실험적 발견물들을 논하기 전에, 표상의 본성을 간략히 논하겠습니다. 대략 한 살 반에서 조작들이 출현하는 일곱 또는 여덟 살까지, 감각발동 지능의 실용적 논리는 내재화되는 <즉, 오직 행위들이 실제 이행되는 속에서만 자리잡고 있기보다는 표상 수준의 사고 속에서 형태를 갖추는> 기간을 겪습니다. 나는 여기서 너무 자주 잊혀지곤 하는 점 하나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표상 또는 다시떠올리기에는 상이한 많은 형식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행위들은 많은 상이한 방식들로 다시 떠올릴 수 있는데, 언어는 단지 그 방식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언어는 표상을 일으키는 유일한 수단이 분명 아닙니다. 언어는 Head가 상징적 기능이라 불렀던 매우 일반적 기능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나는 언어학자들의 용어를 더 좋아합니다: 기호로 쓰이는 기능(semiotic function)이 그것입니다. 이 기능은 표시나 표지로, 기호나 상징으로, 혹은 다른 어떤 대상으로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는 능력을 말합니다. 언어 말고도, 기호로 쓰이는 기능에는, 개인에게만 독특한, 또는 수화와 같은 체계화된, 몸짓이 포함됩니다. 그 기능에는 연기된 모방 또한 포함되는데, 이 모방이란 모델이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즉 눈 앞에 없는, 때에 벌어지는 모방을 말합니다. 그 모방에는 묘사하기, 그리기, 모형 만들기가 포함됩니다. 그 모방에는, 내가 다른 곳에서 내재화된 모방이란 말로 특징지웠던, 마음 속 이미지나 인상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경우 기의되는 것을 표상하는 기표가 있으며 (다시 말해, 의미로서 지시된 것을 다시 떠올리는 상징이 있으며), 이 모든 방식들은 개체로서 아이들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지능>에서 <생각되는 (즉, 알아차리는 또는 깨닫는 마음을 갖는) 지능>에 이르는 그들의 여행에서 쓰이는 것들입니다. 언어란, 들었던 대다수 사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기호로 쓰이는 기능을 갖는 수많은 방식들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청각 장애아와 농아들한테서 우리가 언어 없는 생각과 언어 없는 논리적 구조들을 발견하고 있다는 사실로 확인됩니다. 프랑스의 Oleron은 이 분야에서 흥미로운 연구 작업을 한 바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특히 Hans Furth의 작업과 그의 훌륭한 저서 언어 없이 생각하기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Furth 선생은 청각 장애아와 농아들에게서 논리적 구조들의 발달이 정상아들에 비해 더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청각 장애아와 농아들이 받는 사회적 자극이 정상아들보다 훨씬 제한되기 때문에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렇다하더라도, 이러한 지체를 제외하면, 그 논리적 구조들이 발달하는 과정은 비슷합니다. 그는 앞서 논했던 분류들을 발견했고; 앞서 논했던 순차 배열도 발견했으며; 대응도 발견했으며; 수의 크기(양) 속성도 발견했고; 그리고 공간 표상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해, 언어를 쓰지 않는 이들 장애아들한테도 아주 잘 발달된 논리적 생각하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청각 장애아와 농아들이 정상아들에 비해 지체되기는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가 있는 아이들보다는 훨씬 덜 지체된다는 점입니다. 시각 장애아는, 정상아가 한 두살 때 해낼 수 있는 공간에서 정렬하기를 똑같이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굉장히 불리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각장애아는 감각발동 지능과 이 수준에서 행위들을 정렬하는 발달이 심각하게 지체됩니다. 이를 근거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표상으로 생각하는 수준에서 시각장애아들의 발달에는 더욱 심각한 지체들이 있게 된다는 점과, 언어로 그러한 행위들의 정렬에서 생긴 결핍을 메꾸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러한 지체가 결국에는 메꾸어지지만, 시각장애아들의 지체는 청각 장애아와 농아들의 논리 발달 지체에 비하면 (질적으로) 두드러지며 (양적으로) 훨씬 더 주목할 정도입니다.

  (논리적 수학적 구조들이 오로지 언어적 형식에서만 유래된다는 입장에 반대하는) 나의 셋째 논거에 접근하며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Chomsky가 논리와 언어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물음과 관련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입장을 완전히 뒤엎었다는 점입니다. Chomsky에 따르면, 논리가 언어에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 언어가 이성의 중핵(中核)에 바탕하고 있다고 합니다. Chomsky가 지도적 역할을 하며 발달시켰던 변환 문법들은 나한테는 흥미로와 보이며 이제까지 논했던 지능의 조작들과 매우 분명한 유사성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Chomsky는, 언어 문법이 구성되는 바탕인 이성의 중핵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그것은 내가 기술했던 대로 유아의 행위들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되어 타고난 것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가설은, 어찌 보아도, 불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상, 아이들이 감각발동 지능을 고만고만 성취한 이후에야 언어가 출현한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나는, 14에서 16개월 사이에 있는 아이한테 쓰일 수 있는 구조들이 바로 언어가 발달할 수 있는 지적 기저, 바탕이라는 바에는 동의하지만, 이들 구조들이 타고난 것들이라는 바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가 그 구조들이 발달의 결과들임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것들이 타고난 것이라는 가설은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내가 Chomsky의 입장에서 강조하고 싶은 주된 것은, 그가 언어란 지적 구조들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논리가 언어에서 얻어지고, 또는 유래되고 있다는 고전적 견해를 완전히 뒤엎었다는 점입니다. 

   나의 마지막 논거는, 5에서 8살에 이르는 아이들에게서 조작 수준과 언어 수준 사이 관련성들을 연구한 Hermine Sinclair 여사의 작업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Sinclair 여사는 제네바에서 심리학을 연구하기 전에는 언어학자였고, 우리의 작업을 처음 접한 시점에서는 아이들의 조작 수준은 단지 그들의 언어 수준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나는, 이 문제가 결코 깊이 있게 탐구된 적이 없기에, 그녀한테, 그녀가 이 문제를 연구하여, 아이들의 조작 수준과 언어 수준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실존하는지를 알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Sinclair 여사는 다음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먼저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그룹은 보존자들이었습니다; 일정한 양의 물을 A 모양의 물컵에서 B 모양의 다른 물컵에 부을 때, 물컵의 외양은 다름에도 그 양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둘째 그룹은 비보존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물 양의 변화에 대한 판단은, 물컵의 높이나 넓이 사이 상관 관계에 입각하는 것, 또는 그 양이 더해지거나 버려진 적이 없다는 사실에 기초하는 추리에 따르지 않고, 물컵의 외양에 따르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Sinclair 여사는 아이들한테 간단한 대상들을 주고 묘사해 보라고 하여 두 그룹 각각의 언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아이들이 대상들을 비교하며 묘사할 수 있도록, 또는 대상들을 각각 자체로 묘사할 수 있도록, 보통 하듯이, 대상들을 쌍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를테면, 서로 다른 길이와 폭을 가진 연필들을 주었습니다. 그녀가 발견했던 것은, 아이가 보존자인가 비보존자인가에 따라 이들 대상들을 묘사하기 위해 쓰이는 언어가 굉장히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비보존자들은 언어학자들이 ‘스칼라’라고 부르는 각도에서 대상들을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즉, 한번은 하나의 대상을, 그리고 한번은 하나의 특징을 묘사하는 식이었습니다 - “저 연필은 길어요”; “ 저 연필은 두꺼워요”; “그것은 짧아요”; 그리고 이와 비슷한 관찰들이었습니다. 보존자들은, 그와는 달리, 언어학자들이 ‘벡터’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했습니다. 단번에 두 대상들을 그리고 단번에 하나 이상의 특징들을 마음에 품으려 했습니다. “이 연필이 저 연필보다 길어요, 하지만 저 연필이 이것보다는 두껍네요”와 같은 종류들의 문장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실험으로 조작 수준과 언어 수준 사이 관련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향이 어느 쪽으로 미치고 있는지를 아직 알지 못합니다. 언어 수준이 조작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조작 수준이 언어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답을 얻기 위해, Sinclair 여사는 이 실험의 다른 측면에 주목했습니다. 비보존 그룹에 언어 훈련을 시켰습니다. 고전적 학습 이론 방법들로, 그녀는 이 아이들한테 보존자들이 썼던 똑같은 용어들로 그 대상을 묘사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이러한 훈련이 그 아이들의 조작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알고자, 앞서는 비보존자들이었지만 곧이어 더욱 진전된 언어 형식들을 배웠던 아이들을 다시 검토했습니다. (그녀가 이러한 실험을 조작들이 행해지는 <보존 뿐만 아니라, 순차 배열 그리고 다른 영역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상이한 영역들에서 행했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경우들에서, 언어 훈련 이후 단지 아주 미미한 진전만이 있었을 뿐임을 발견했습니다. 그 아이들 가운데 단지 10%만이 아랫 단계에서 윗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이 비율은, 그 아이들이 이미 어떤 중간 국면에 가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다음 단계의 바로 문턱에 가 있지는 않은지 여부에 의구심을 갖기에는 너무 적은 비율입니다. 이 실험에 바탕한 Sinclair 여사의 결론은, 지적 조작들이 언어의 진전을 야기하고 있다고 보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논리와 언어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고, 내가 전조작기라 부르고 있는 단계에 있는, <다시 말해, 논리적 조작들의 개시 또는 발달 전에 있는>, 4, 5, 그리고 6살 먹은 아이들이 해낼 수 있는 생각하기 유형, 논리적 추리 유형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조작기에 논리적 구조들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준논리라 불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나의 초기 작업들에서는, 하지만 우리가 이 영역에서 훨씬 더 많은 작업을 했기에, 나는 이것을 분절된 직관이라 부르며 사용했습니다. 이 나이들 또래의 아이들의 생각은 문자 그대로 준논리(semi-logic)로 특징지워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는 아주 명백해 보입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가역성이 결여된 조작들입니다; 그 조작들은 한 방향으로만 작동합니다. 이때 이러한 논리는, 그 용어에 대한 수학적 의미인, 함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y = (f)x. 이러한 의미에서 함수는 순서지워진 한쌍, 또는, 늘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적용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생각하기는 의존 관련성들을, 그리고 공변이 또는 공변분들<즉, 하나의 대상 속 변이 또는 변분들이 다른 대상 속 변이 또는 변분들과 상관되어 있는 변이 또는 변분들>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이들 함수들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이들 기능들이 보존 또는 보존하기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작은 스프링에 줄이 하나 달려있습니다. 수평으로 늘여가다, 회전축에 걸쳐, 수직으로 매달아 놓습니다. 이제 줄 끝에 무게가 나가는 것을 달거나, 앞에 것에다 더 달아 무게를 증가시킬 때, 줄은 당겨지고 그래서 수직으로 매달린 부분은 수평으로 걸쳐진 부분과 관련해서 늘어나게 됩니다. 다섯 살 먹은 아이들은, 무게가 늘어나면 수직 부분이 길어지고 수평 부분은 짧아진다는 관련성을, 수직 부분이 짧아지면, 수평 부분은 길어진다는 관련성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로 보존에 다다르지는 못합니다. 이 아이들한테는 수직 부분과 수평 부분의 합이 똑같은 것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적용이란 뜻에서, 또 다른 함수의 예를 들겠습니다. 아이들한테 카드 한장한장에 하얀 부분과 빨간 부분이 있는 여러 장의 카드와 또한 여러 장의 상이한 모양들로 자른 조각들을 줍니다. 그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은, 카드의 빨간 부분에 들어맞을 조각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정확히 맞출 필요는 없지만 그저 빨간 부분에 들어맞는 것이라면 됩니다. 이들 아이들이, 빨간 부분에 들어맞을 수 있는 여러 장의 상이한 모양 조각들이 있음을 깨닫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대일 관련성을 이해하고 있음은 흥미로운 점이지만, 이러한 이해로 일대다 관련성에 바탕을 둔 나무랄 데 없는 분류 체계를 구성하는 데까지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반쪽 논리적 구조의 또 하나의 예입니다. Bourbaki 수학자들의 언어에서, 다대일은 함수지만, 일대다는 함수가 아닙니다. 

   더 일반적으로, 함수들이 그렇게 흥미로운 이유는, 함수들이 전조작기의 생각하기에서 순서 관련성들의 중요성을 한층 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한테 굉장히 많이 쓰이는 거리 또는 측정과 관련된 것들은 아이들한테는 단지 순서를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측정은 그 아이들의 판단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길이 보존이 아주 멋진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나란히 있는 두 개의 막대가 같은 길이일 때 누가 하나를 밀어 한쪽 끝을 넘어가도록 할 경우에도, 우리는 양쪽 끝을 모두 참작하고 있기에 그것들은 변함없이 같은 길이라고 판단하며, 아울어 우리는 중요한 것은 각각의 경우 왼쪽 끝과 오른 쪽 끝 사이의 거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조작기 아이들은 끝점들의 순서에 바탕을 두고 판단합니다. 그 아이들이 막대들의 한쪽 끝을 주시하고 있을 경우, 길이에 대한 그들의 판단은 그 한쪽 끝이 그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가 있다는 것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반응 또는 반작용이 양적 관련성들보다는 오히려 순서 관련성들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이는 실험들은 굉장히 많이 있으며, 나는 아이들이 완벽한 조작 논리보다는 오히려 함수 논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준논리의 또 다른 특징은 동일성이라는 나름의 개념이며, 이 개념은 보존이라는 나름의 개념에 앞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감각발동 지능에 특정 동일성 개념이 있음을 보았고, 그 아이는 어떤 대상이 어느 정도의 영속성을 갖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경우는, 그 대상이 그 형태를 어떤 식으로도 바꾸지 않고 있기에 <단지 그 위치만 바꾸고 있을 뿐이기에>, 우리가 용어 보존에 대해 썼던 의미로, 보존의 사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체성 또는 동일성(즉, 여건들이 변함에도 똑같은 하나로 남아 있는 것, 조건, 성질, 또는 상태)의 한 사례로, 이후 나름의 보존 개념을 형성할 출발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또한 대략 네 살부터 시작되는 전조작기 아이들의 생각하기에서 나타나는 나름의 동일성 개념을 연구하였습니다.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나름의 동일성 개념보다 더 쉽게 변하는 개념은 없으며, 그것은 한 아이의 지적 발달 과정에서 처음에서 끝까지 결코 똑같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이 자신의 정체성 또는 동일성을 지키고자 가리키는 것은, 그 아이의 나이에 따라 그리고 문제가 제시된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맨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동일성은 나름의 질적 개념이지 나름의 양적 개념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물의 양이 용기의 모양에 따라 변한다고 고집하는 전조작기의 아이는, 그럼에도, 물은 물이라고, 단지 그 양만 변했다고 우길 것입니다. 나의 동료 Jerome Bruner는 보존 개념의 토대로서 동일성 원리라는 개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생겨납니다. 동일성 원리란, 누구든 주어진 형식 변환 속에서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기만 하면 갖고 있는, 또는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액체를 부을 경우, 아이들은 그릇 형태와 담긴 것을 구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보존이라는 나름의 개념에서는 더 많은 것들이 요구됩니다. 어떤 것의 양 결정하기가 좀 더 복잡한 개념인 까닭은, 특히, 우리가 보았듯이, 가장 원시적인 또는 초보적인 나름의 양적 개념들은 다름아닌 방금 기술했던 <모든 양적 비교를 행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나름의 순서 개념들이기 때문입니다. 보존이라는 나름의 양적 개념은, 아이들이 보상과 가역성을 조성하는 조작들을 마저 발달시킨 이후에라야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먼저, 나름의 정체성 또는 동일성 개념이 발달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몇가지 새로운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는 상이한 많은 실험들을 행했으며, 그 실험들에 참여했던 공동연구자들 가운데 한 명은 Gilbert Boyat였습니다. 이 연구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동일성이 반 정도만 개체의 특징을 갖고 반 정도의 류 구성원들만을 가리키는 최초 수준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대상들을 갖고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한 그 대상들은 동일한 것들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책상 위 한 묶음의 구슬들을 목걸이 꿰인 구슬들과 같은 것들로 알아보는 것은, 누구든 목걸이를 잘라 한 더미의 구슬로 만들거나 다시 그것들을 끈에 꿰어 목걸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굽은 모양의 철사를 반듯할 때와 같은 철사로 알아보는 것은, 그것이 굽은 모양으로 구부려질 수 있기에 또는 직선으로 반듯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동일성을 얻고자 자신의 기준들에 조금 더 추가될 것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어떤 대상이 특정 scheme에만 동화되는 것으로는 이제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게 됩니다. 정체성 또는 동일성은 개체로 될 특성을 더 많이 부여받게 됩니다. 이 단계에 이르러 그 아이는 철사 조각이 굽혀지면, 더 이상 같은 형태가 아니기에, 더 이상 같은 철사 조각일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흥미로운 실험 하나가 또 하나의 실험 과정에서 다소 우발적으로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정사각형들을 크기에 따라 순서짓고 있었는데, 이 활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 아이가 정사각형을 모서리 쪽에 놓지 않고 꼭지 쪽에 놓고, 이어 더 이상 그것은 정사각형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곧이어 우리는 이를 더 자세히 탐구할 실험을 또 하나 시작했습니다: 정사각형 조각 하나를 상이한 위치들에서 보여준 다음 이어 다음과 같은 유형들로 질문합니다. 그것은 같은 정사각형인가요? 그것은 변함없이 정사각형인가요? 그것은 조각맞추기 판의 조각과 같은 것인가요? 그것의 변들의 길이는 변함없이 같은가요? 대각선의 길이는 변함없이 같은가요? 물론 우리는 우리가 인터뷰하고 있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들로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는 동일성을 부인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정사각형이 아니어요; 그것은 더 이상 같은 정사각형이 아니어요; 그것은 이제 이 쪽으로 더 긴데요; 각도들이 더 이상 직각이 아니어요; 등등. 

   지각 영역에서도 비슷한 실험들이 행해졌습니다. 우리 모두 겉보기 운동이나 스트로보스코프로 포착되는 운동 같은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이 나타났다 사라지며, 사라지자 다른 대상이 나타나고, 이어 두 번째 대상이 사라질 때 다시 첫번째 대상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적당한 빠르기로 행하면, 하나이자 똑같은 대상이 두 위치 사이를 나왔다 물러섰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과 정사각형, 두 대상들 가운데 어떤 하나가 스트로보스코프로 포착되는 운동 현상으로 동일성을 연구하면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대상이 한쪽으로 움직일 때는 원이 되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한쪽으로 움직일 때는 정사각형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위치가 바뀌면서 모양도 바뀌고 있는 그 대상은 하나 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겉보기 운동을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아주 쉽게 또는 전혀 의심없이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볼 수 있는 경계 폭이 훨씬 더 넓습니다. 거의 모든 교체 속력에서 또는 교체 속력들의 차를 아주 크게 하더라도 아이들한테는 이러한 겉보기 운동의 인상이 생겨나는 반면에, 어른들한테는 그 한계 폭이 훨씬 더 좁습니다. 이러한 우리 실험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이들이 스트로보스코프로 포착되는 운동을 보는 이러한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은 그 대상의 동일성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곳에 이를 때까지는 원이었고 곧바로 정사각형이 되었어요”, 또는 “그것은 더 이상 같은 것이 아니어요 - 하나가 다른 하나의 자리를 차지했어요”. 반대로, 어른들은 사각형으로 바뀌는 원을 보고, 원으로 바뀌는 사각형을 봅니다. 어른들은 이것을 기이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보고 있는 것, 똑같은 대상이 그 모양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험에서 나름의 정체성 또는 동일성 개념은 아주 분명히 나이의 함수로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실험은 우리가 비슷한 결과들을 얻은 허다한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실험은 Boyat가 이행한 식물 성장에 관한 실험입니다. 그는 콩과 식물의 성장으로 실험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대신 단 몇 분 안에 해초같이 보이는 수지상(樹枝狀) 모양으로 자라는 용액 속 화학 물질을 사용했습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이 식물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아이한테 그것을 그리라 하고 이어 그 그림들을 기억을 일깨우는 것으로 써서 그 식물이 성장하는 여러 시점에서 그것은 변함없이 똑같은 식물인지 아닌지를 묻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가 그 식물을 가르킬 때 쓰는 용어를 <그 용어가 식물, 해초, 마카로니, 등등 어떤 것이든> 그대로 사용합니다. 곧이어 그 아이한테 그 또는 그녀가 아가일 때 모습을, 조금 더 컸을 때 모습을, 한층 더 컸을 때 모습을, 그리고 지금 있는 그대로 자신을 그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그림들이 모두 같은 사람을 그린 것인지, 그 인물은 언제나 그 또는 그녀인지 하는 질문들을 던집니다. 비교적 나이가 어린 아이는 같은 식물이 자신이 그린 여러 그림들로 표상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 아이는 이것은 작은 식물이고, 저것은 큰 식물이라고, 그것은 같은 식물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그린 그림들을 가르키면서는 십중팔구 모두 같은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그 식물 그림들로 돌아갈 경우, 몇몇 아이들은 자신들을 그린 자신들의 그림들에 관한 그들 생각들에 영향을 받을 것이며, 이제는, 모든 그림들 속에 있는 것은 똑같은 식물임을 그들이 알아차리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밖에 아이들은 그 식물은 너무 많이 변해서 지금은 다른 식물이라고 우기며 계속해서 그것이 같은 식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들의 논리적 생각하기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이 정체성 또는 동일성 개념 그 자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실험입니다. 정체성 또는 동일성조차도 계속되는 형식 변환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장 또는 터(field)에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 4 * 

 

  이제 속력과 시간이라는 나름의 개념 발달을 더욱 자세히 살펴봅시다. 속력과 시간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우리를 악순환, 순환논법에 빠뜨립니다. 빠르기 또는 속력은 시간과 공간이 관계된 상태로 정의되며, 그렇지만 시간은 오직 일정한 빠르기에 바탕해서만 측정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발생론적 인식론에서 행하는 연구를 위한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그 연구란, 이들 나름의 두 개념 가운데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인가, 그리고 다소 덜 근본적인 관념을 더욱 원시적 또는 초보적인 관념에서 얻어냄으로써 우리는 순환논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탐색입니다. 내가 여기서 방어하려는 가설은, 나름의 더 원시적 또는 초보적 개념은 더 복잡하고 덜 분화된 것이라는 점, 즉 움직임(動勢)이란 빠르기를 포함하는 나름의 개념이란 점입니다. 나는, 공간을 위치 변화들의 정렬로 보는 것과 같은 식으로, 시간을 움직임들 또는 빠르기들의 정렬로 정의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합니다. 위치 변화들이란, 물론, 움직임의 빠르기에 대한 헤아림없이 고려된 움직임들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공간은 빠르기들을 헤아리지 않는 움직임들에 대한 정렬이며, 반면 시간은, 내 가설에서, 각각의 빠르기들을 포함하는 움직임들에 대한 정렬입니다. 

   우리는, 이제, 시간과 공간 사이 실존하는 도드라진  평행 관계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뉴튼, 칸트,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철학자들의 저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성이론에 이르기까지 <그곳들에서, 두 개념들은 부분적으로 융합되어 있습니다> 두루 발견되는 고전적 평행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 사이에는, 이러한 평행 관계 즉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중요한 차이들이 있으며, 나는 그것들을 여기서 논하겠습니다. 우선, 시간은 가역적이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일단 하루를 살고나면 돌아가 그 하루를 다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공간에서 움직임(動勢)들은 가역적입니다; 우리는 점 A에서 점 B로 갈 수 있고 곧바로 점 B에서 점 A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로, 공간은 그것이 담고 있는 것들과 분리해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실로, 공간의 한 측면은 그 내용물들과 결박되어 있어, 상대성 이론에서처럼, 공간 즉 물리적 공간과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간을 그 내용물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립된 공간에 대한 학이, 어떤 식으로도 물리적 공간의 제약은 받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순수인, 순수 기하학입니다. 반면, 시간은 그 내용물과 분리해서는 생각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항상 빠르기들에 결박되어 있고, 빠르기들은 변함없이 물리적 실재성 뿐만 아니라 심리적 실재성 또한 갖고 있습니다. 순수 기학학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식으로, 우리는 시간에 대한 순수 과학, 또는 순수한 시간 측정술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심리학적으로 굉장한 중요성을 갖는 세 번째 차이는, 기하학적 도형을 우리는 통째로 지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직선처럼 간단한 도형을 생각할 경우, 우리는 선 전체를 동시에 지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 지속 또는 시간의 길이는, 아무리 짧다 해도, 단번에 모두 포착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일단 시간의 한쪽 끝에 있게 되면, 그 첫머리는 더 이상 지각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해, 지속의 첫머리는 이미 잃어버렸으며 그것을 다시 찾으러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는 없기에, 시간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알기 주체가 행한 재구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간에 대한 지식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시간에 대한 지식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간단한 것입니다.

   이제, 빠르기 관념과 지각 양자에 수반된 것들을 검토함으로써, 나름의 빠르기 개념이 나름의 시간 개념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시간은 빠르기들의 정렬이라는 나의 가설을 전개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내가 말하려는 바에서 중요한 것 하나를 분명히 구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나름의 시간 개념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거기에는 두 가지 다른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시간을 형성할 나름의 순서 개념, 또는 사건들의 연접입니다 (A사건 이후 B사건이 일어났고, B사건 이후 C사건이 일어났고, C사건 이후 D사건이 일어났고, 등등). 두 번째는 두 사건 사이 간격, 즉, A사건에서 B사건에 이르는 시간의 길이, 그리고 B사건에서 C사건에 이르는 시간의 길이입니다. 아주 분명한 것은, 시간을 형성할 사건들의 순서는 시간의 지속 또는 그 간격에 주의를 두지 않고도 생각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용어 지속은 시간을 형성할 사건들 사이 간격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고 용어 순서는 우리가 시간 간격들에 주의를 두지 않을 시 사건들의 단순한 연접을 가리킬 때 사용할 것입니다.

   공간 간격과 시간 지속이 관계된 상태로서 고전적인 나름의 속력 개념은 아이의 발달 과정에서 매우 늦게, 아홉 살 또는 열 살 정도에,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반면, 이러한 비율에 바탕을 두지 않는 빠르기에 대한 직관들은, 전조작기처럼 이른 시기에, 다시 말해, 여섯 살 이전에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원시적 또는 초보적 직관은 연접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서(로 야기된) 직관이지, 지속들에 바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 지속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는 이러한 나름의 빠르기 개념은 순환논법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시도에 중요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초기 직관은 지나가기 현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어떤 대상이 움직이는 또 다른 대상을 따라잡아 앞지르고 있는 경우,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도 전자가 후자보다 빠르다고 말할 것입니다. 앞지르기에 바탕을 둔 빠르기에 대한 이러한 원시적 또는 초보적 직관은*, 여하한 단위나 측정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순서로 야기된 공간 형성 관계들과 순서로 야기된 시간 형성 관계들에서 얻어지고 있습니다. 시간 속 한 점에서 자동차 A가 자동차 B 뒤에 있었는데, 얼마후 시간 속 다른 점에서는 자동차 A가 자동차 B 앞에 있었습니다. 아이의 빠르기에 대한 최초 직관 형성에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빠르기에 대한 이러한 직관이 공간 간격과 시간 간격 사이 관련성으로서 고전적 의미의 속력 개념에 선행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이러한 직관이 선행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했던 두 가지의 실험을 언급하겠습니다.

  첫번째 실험에서, 우리는 두 개의 터널을 준비해 나란히 놓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길며, 아이들은 이것을 보고 더 긴 것을 지적하는 것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 각 터널 쪽에 소형 인형을 하나씩 놓습니다. 인형들은 정해진 속력으로 트랙위를 움직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실험의 첫번째 단계로, 정확히 같은 시점에 터널에 들어가게 한 다음 정확히 같은 시점에 터널에서 빠져나오도록 했습니다. 긴 터널 속에 있는 인형이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점은 분명한 것이지만, 나의 가장 어린 주체들한테서 얻은 만장일치의 답변은 두 인형들은 같은 빠르기로 움직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인형들이 같은 시점에 터널로 들어갔다 같은 시점에 터널에서 빠져나왔다는 것과 둘 가운데 하나가 더 긴 터널을 통과했다는 것을 모두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들은 그것들이 같은 시점에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것들은 같은 빠르기로 움직였다고 우겼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순서와 관련된 논증입니다. 그 실험의 다음 단계로, 그 아이들이 인형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도록 터널을 걷어냈습니다. 그리고 재차, 인형들을 같은 시간에 실험의 첫 단계에서 지났던 거리를 지나게 했으며 둘 중 하나는 더 긴 거리를 지났습니다. 실험의 첫 단계에서 함께 했던 그 아이들이 이번에는 긴 거리를 지나간 인형이 더 빠르다고 대답했는데, 그것은 그 인형이 다른 인형을 지나가는 것을 그 아이들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이 상이한 길이들을 갖는 일정한 빠르기들을 정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들은 그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앞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반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험의 세 번째 단계로, 터널을 트랙에 다시 설치를 하고 첫 단계 실험을 반복합니다. 우리의 네다섯 살 먹은 굉장히 많은 주체들은 첫 단계에서 말했던 바로 되돌아가, 같은 시점에 터널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인형들은 같은 빠르기로 움직였다고 응답합니다. 우리가 그들한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빨랐다고 그들이 말한 두 번째 단계를 일깨울지라도, 그들은 "네 기억해요" 하고 말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인형들이 같은 시점에 터널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같은 빠르기로 움직이고 있다고 응답합니다. 

   아주 간단히 할 수 있는 또 다른 실험으로, 이른바, 경륜 선수들이 움직이고 있는 동심원을 형성하는 두 개 트랙을 준비합니다. 아이들은 바깥 트랙이 안쪽 트랙보다 더 길다는 것을 알아볼 것입니다. 경륜 선수들은 같은 시점에 출발점으로 돌아오도록 나란히 달리게 합니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같은 시점에 같은 지점으로 돌아왔기에 경륜 선수들은 같은 빠르기로 달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바깥쪽 트랙이 더 길다는 것과 그래서 바깥쪽 트랙 선수가 더 많이 가야한다는 사실은, 그 아이들의 빠르기에 대한 판단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입니다. 빠르기 또는 속력에 대한 정의에 해당하는 유일한 것은 앞지르기며, 경륜 선수들이 계속해서 나란히 달리는 한 앞지르기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아이들의 빠르기에 대한 판단들은, 분명, 공간의 길이와 그 공간을 지나는 데 걸린 시간의 길이가 맺고 있는 그 어떤 관련성에도 바탕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환논법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리키고 있으며, 나한테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은 공간 단위와 시간 단위가 맺는 고전적 관계와는 전혀 다른 나름의 빠르기 또는 속력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나름의 빠르기 개념이 갖는 다른 측면들과 나름의 시간 개념이 갖는 몇몇 측면들을 다루기 전에, 빠르기 지각에 대한 몇몇 실험들을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하나의 대상이 다른 하나를 지나가거나 또는 지나치지 않는다할지라도, 그것이 빠르거나 느리다는 것을 우리가 지각할 수 있다는 점은 아주 명백합니다. 움직이는 자동차가 빠른지 느린지 알기 위해 다른 자동차와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판단은 무엇에 바탕하고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우리는 빠르기에 대한 지각을 연구했습니다. 지각은 지능보다 나이에 따라 훨씬 덜 변하기 때문에 어른들과 아이들 모두를 대상으로 연구했습니다. 미국 심리학자 Brown의 작업을 인용하며 시작하겠습니다. 얼마 전 그가 연구하여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빠르기 또는 속력에 대한 우리의 지각들은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들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들>, 말인즉, <공간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인상들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인상들> 사이 관련성에서 결과되는 것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주장해오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입장으로, 나는 이 논쟁에 적합한 우리의 실험에서 얻어진 발견물들을 언급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실험들의 기초로 삼았던 고전적인 지각적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지각 주체는 선 하나를 주시하고 있으며, 그 선을 따라 하나의 대상이 일정한 속력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선의 왼쪽 반은 작은 표시들을 수직으로 그어 잘게 잘려 있고, 반면 오른쪽 반은 선 그대로 깨끗합니다. 움직이는 대상이 왼쪽 반을 지날 때가 오른쪽 반을 지날 때보다 더 빠르게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지각 현상입니다. 이와 똑같은 실험 상황에서, 우리는 주체들한테, 자동차가 왼쪽 반을 통과할 때 빠르기에 대한 판단 뿐만 아니라 그때 걸린 시간의 길이를 오른쪽 반을 통과할 때 걸린 시간 길이와 비교해서 판단하라고 요구할 수 있고, 우리는 그들의 판단들을 그 선의 두 부분의 길이들에 관한 것으로 물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한테 그 선의 반은 수직 표시가 있고 반은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수직 표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상대적 길이들에 대한 판단만을 묻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Brown의 입장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당 주체가 행하는 빠르기, 공간 거리, 그리고 시간 간격에 대한 판단들>이 <빠르기란 공간을 시간으로 나눈 것과 같다는 관련성>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실험들을 다 성장한 주체들에 대해서도 행했으며, 물론 그 주체들도 서로 다른 세 번의 실행으로 검사받았습니다. 그 어떤 주체도 같은 실행에서는 <시간과 동시에 빠르기> 또는 <거리와 동시에 빠르기>를 판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각 주체가 행한 판단들을 비교했을 때, 그 주체들의 60%가 일치되지 않는 판단들을 내리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주체는, 이를테면, 움직이는 대상이 왼편을 지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른편을 지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실행에서, 그 주체는 왼편의 거리가 오른편보다 더 짧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위의 같은 실행에서 그 주체는 자동차가 오른편에서보다 왼편에서 더 빠르게 움직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 판단들은, 그 주체가 빠르기란 공간을 시간으로 나눈 것과 같다는 관련성으로 조작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 양립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아이들한테서 일관되지 않은 횟수들은 훨씬 더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아이들 가운데 75에서 80% 가까이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여하튼, 어른들과 아이들 양자에서 얻어진 결과들이 Brown의 관점과 부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빠르기 또는 속력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설명할 다른 가설을 찾아야만 합니다. 나의 가설은, 빠르기 지각은 나름의 빠르기 개념과 같은 종류의 순서 형성 관련성들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이것을 세 가지 상이한 상황들에서 드러나는 사례로 알아차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상황에서는, 움직이는 두 개의 대상이 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다른 것을 지나갑니다. 사실상, 우리의 실험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앞지르는 순간 움직이는 그 하나의 빠르기에 가속이 붙는 착각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앞지르기는, 이와 같이, 빠르기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서 뿐만 아니라 빠르기에 대한 우리의 지각에서 또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상황에서는 움직이는 대상은 단 하나 뿐이며, 그래서 여기서는 앞지르기의 순서 형성 관련성이 끼어들 또는 생겨날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우리 눈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움직이는 것은 다시 두 개, 하나는 우리가 주시하고 있는 그 대상, 다른 하나는 우리의 눈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를 들어, 방금 논한 실험에서, 그 대상은 선을 따라 움직이며 수직 표시들과 마주치고 있는 것을 고려할 경우, 우리가 알아차리는 것은, 그 눈이 움직이는 그 대상을 쫓는 동안 그 눈은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수직 표시들 각각에서 멈추며, 바로 이 짧은 정지 사이에 그 대상은 앞으로 움직이게 되고 그래서 그 눈의 움직임은 언제나 뒤에서 따라잡아가야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으로, 그 대상이 수직 표시가 있는 부분에서 그렇지 않은 부분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는 듯이 보이는 까닭이 설명될 것입니다. 

   세 번째 상황은 움직이는 대상이 다시 하나만 있고, 우리 눈은 정해진 점 하나를 주시하며 고정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를테면, "금연"이라는 표지에 나의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고, 눈의 움직임 없이도 나는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대체로, 빨리 걷는지 느리게 걷는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대상 하나가 빠르기에 대한 우리 판단의 기저로 기능하는 다른 하나를 앞지르는 경우를, 하나 더, 발견하는 것은 우리한테 힘든 일로 보입니다. 이러한 경우, 자동차는 시각 장을 가로질러 움직이며, 일정한 수의 망막 세포들을 동시에 흥분시킵니다. 나는 주어진 어떤 순간 자극된 한 묶음의 세포들을 흥분 열차라고 부르며,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상황에서 움직이는 두 대상들, 즉 그 흥분 열차의 첫번째의 세포와 마지막 세포, 이름하여 기관차와 차장차의 원천입니다. 하나의 대상이 우리의 시각 장을 더 빨리 가로지르면 지를수록, 첫번째 세포와 마지막 세포의 거리는 더 멀어지며, 그래서 이러한 거리의 증가로 우리는 속력의 증가에 대한 판단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설명이, 또한, 세 번째 상황에서, 자동차가 우리 시각 장을 가로질러 움직이고 우리 눈은 고정되어 있을 경우 그 자동차가 울퉁불퉁한 지역을 지나고 있다면 속력이 빨라진 듯이 보인다는 사실에 주어집니다. 세포들은 이러한 지역에서는 더 조밀해져, 자동차가 거기에 다다를 때면, 흥분 열차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더 많은 세포들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대상이 이러한 지점에서 속력이 빨라지는 듯이 보이는 인상을 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빠르기에 대한 우리의 지각들과 직관들이 순서로 형성되는 본성을 갖는 것에 대해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하나는 MIT 공대에 있는 Letvin의 심리학적 작업과 관련된 것입니다. Letvin은, 많은 것들 가운데서 특히, 개구리의 망막 민감도를 연구하다가, 빠르기 또는 속력에 대한 원시적 또는 초보적 지각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에 대한 그와 같은 원시적 또는 초보적 지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는 두 명의 프랑스 물리학자들의 작업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들은 상대성 물리학의 기저로 기능할 물리학의 새로운 공리들을 확립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속력과 시간에 대한 관념들이 야기하는 순환논법의 문제를 피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두 물리학자는, 시간과 속력에 대한 관념과 지각을 심리학적으로 연구 탐색하는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고, 우연히 우리의 작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빠르기라는 순서 형성 관념에 대한 우리의 가설에서, 그들이 발견했던 것은, 시간 형성 지속과는 독립된 빠르기라는 관념을 그들의 엄밀 형식 구조로 도입하는 방식이었고, 이것으로 그들은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탐구의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끼치는 영향이 완전한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다는 점은 나에게는 흥미로운 것입니다. 우리한테 우리 작업을 제안했던 이는 바로 상대성 이론의 저자였으며, 우리 작업은 이어 또 다른 물리학자들의 상대성 이론의 공리적 기저 구축에 유용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제 나름의 시간 개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빠르기 또는 속력에 대한 원시적 또는 초보적 직관이 있음을 우리는 보았지만, 시간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름의 시간 개념은 지적 구성물입니다. 시간 개념은, <하게 되었던 어떤 것인> 행위와 <그것을 끝낸> 빠르기가 맺는 관련성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나름의 시간 개념의 발달 과정에서, 이러한 관련성이 원시적 또는 초보적 직관이 아니라는 것은 아주 쉽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시간에 대한 판단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성취되었는가에 또는 하나의 행위가 얼마나 빨리 일어났는가에 바탕하고 있으며, 그 둘이 필연적으로 서로 관련되지 않고도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동시성 관념의 발달 과정을 살펴봅시다. 우리의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서, 실험자가 두 개의 작은 인형을 두 손에 하나씩 쥐고 탁자를 따라 걷도록 합니다 (실제로 걷는 것이 아니라, 인형의 발을 바닥에 닿을 때마다 통통 튀면서 걷도록 합니다). 아이가 가라고 말하면, 두 인형은 정확히 같은 시점에 같은 속력으로 출발합니다. 아이가 멈추라고 말하면, 두 인형은 정확히 같은 거리까지 간 뒤 나란히 멈춥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두 인형이 같은 시점에 출발했고, 같은 시점에 멈췄음을 인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조금 달리해서, 둘 가운데 하나를 다른 것보다 매번 약간 더 멀리 뛰게 할 경우, 그 때 그 아이가 멈추라 말하면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멀리까지 나가 설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아이는 두 인형이 같은 시점에 출발한 것에는 동의하겠지만, 두 인형이 같은 시점에 멈추었다고 인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하나가 먼저 멈추었다고 <그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덜 갔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곧바로 아이한테, "그 하나가 멈추었을때, 다른 하나는 계속 가고 있었니?" 라고 물을 경우, 그 아이는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시 아이한테 "다른 하나가 멈추었을때, 그 하나는 계속 가고 있었니?" 라고 물으면, 그 아이는 다시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지각에서 야기된 착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그 아이한테, "그러면, 두 인형이 동시에 멈추었니?" 하고 물으면, 변함없이 그 아이는 "아니요, 하나가 다른 하나만큼 가지 못했기 때문에 동시에 멈추지 않았어요" 하고 말할 것입니다. 두 가지 일 또는 사건이 같은 시점에 일어나는 나름의 동시성 개념은, 이 개념이 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운동을 가리키고 있을 때라면 이들 아이들한테는 결코 납득될 수 없습니다. 첫번째 상황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질적으로 비슷한 두 운동이 같은 빠르기로 벌어지는 것이라면 납득될 수 있지만, 종류가 다른 두 운동이 수반될 경우에는 결코 납득될 수 없습니다. 동시성에 대해서는 원시적 또는 초보적 직관이란 있을 수 없으며, 두 개의 움직임들이란 질적으로 다른 것들입니다. 동시성이란 지적 구성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조금 더 든 아이들은 두 인형이 같은 시점에 멈추었음을 인정하겠지만 두 인형이 걷거나 움직인 시간이 같은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변함없이 곤란을 느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시간 간격 또는 시간 지속에 대한 질문들에는 곤란을 느낄 것입니다. 그들은 두 인형이 같은 시점에 출발했고 같은 시점에 멈추었지만, 둘 중 하나가 더 멀리 갔기 때문에 더 오래 걸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분명한 점은, 시간 관념은 이행된 행위의 양 또는 행위가 이행될 때의 빠르기에 바탕하고 있지만, 아직은 이들 두 가지 바탕이 시간 형성 지속이라는 나름의 일관된 개념을 야기시키고자 서로 관련성을 맺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시기를 그 기간 동안 성취된 것들에서 연계를 끊어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것들과 같은 관념들을 연구하는 데에 한층 더 간단한 실험이 있습니다. Y형 튜브를 써서, 튜브 몸통을 수도 꼭지에 연결시키면 갈라진 관 양쪽으로 똑같은 양의 물이 흐름니다. 갈라진 각 관들을 타고 물은 각 용기들 안으로 흘러듭니다. 두 개의 용기가 크기와 모양이 같고, 우리가 수도 꼭지를 켜고 물의 흐름에 관해 그 아이들한테 물으면, 그 아이들은 같은 시점에 물이 용기들 안으로 흘러들었음을 인정할 것이며, 같은 시점에 꼭지를 잠그고 물으면, 두 용기로 같은 시간 길이만큼 흘러들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용기 모양을 달리해 주어진 시간 이후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물이 더 높이 차 오를 경우, 그 아이들은, 물이 더 높이 차오른 용기로 더 오랜 시간 동안 물이 흘렀다고 말하며, 다시금 같은 곤란을 겪는다.

   이와 같은 많은 경우, 우리는 그 아이한테, 시계나 그밖에 시간 측정 도구들을 주고나서, 수반된 시간 일관성들을 가리킬 수는 있지만, 이리해도 그 아이들한테는 측정 기구의 빠르기가 일정하다는 그들 나름의 관념이 없기에 우리는 그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아이들이 그 상황을 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게, 그 시계가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이 갔어도, 그 이유를 그 시계가 이번에는 더 빨리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주 당연시 한다. 또한, 두 개의 모래 시계에서 각각 같은 길이의 시간에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지만, 그 아이는 두 사건에 서로 다른 시간 길이가 걸렸다고 정말로 생각하여, 다만 다른 쪽 시계보다 한쪽 시계에서 모래가 더 빨리 흘러내렸다거나, 혹은, 한쪽 시계에서 다른 때보다는 이번에 더 빨리 흘러내렸다고 우길 뿐입니다. 그저, 빠르기 또는 속력이 이들 도구들에서는 변함없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나름의 개념이 없을 뿐입니다.

  전조작기의 시간 관념에 관한 마지막 언급으로, 나는 어떤 아이들은 더 빠르다를 시간의 기간이 더 길다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학교에 걸어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봅니다. 한 아이가 15분이라고 말합니다. 곧바로 그 아이한테 학교까지 뛰어가면 15분보다 더 오래 걸릴지, 더 짧게 걸릴지 물어봅니다. 그 아이는 자주 15분보다 더 오래 걸린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 아이가, 또 다시, 했던 일의 양과 그것이 행해질 때의 빠르기 사이에서, 경과한 시간의 상대적 양을 산출해낼, 적절한 관련성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아이가 다음과 같이 추리하고 있는 말입니다: 더 빠르다는 것은 더 많은 일을 한 것을 뜻하며, 더 많은 일을 한 것은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을 뜻합니다. 

  주관적 시간 또는 심리적 시간에 관해 한두 마디 하는 것도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우리는 주관적 시간에 대해 직접적 인상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보면,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보이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 같은 관련성이 여기서도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인상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행위들 또는 성취한 일의 양에 달려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 일이 성취되고 있는 빠르기 또는 속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흥미로운 일을 할 때는 왜 시간이 더 짧게 느껴질까요?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Dewey는 오래 전에, 그리고 Claparede도 또한, 흥미는 일이 행해질 때 수반되는 빠르기를 강화 또는 가속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 나는 시간에 대한 심리학 전문가인 나의 동료 Fraisse와 부분적으로 (단지 아주 부분적으로만)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시간에 대한 주관적 인상은 사건들의 수의 함수 또는 주체가 주목한 변화들의 수의 함수라고 믿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우리 경험의 내용들이 다양하면 할수록,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이 가설이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정해진 시간 단위와 관련된 가운데 일어난 사건들의 수라는 나름의 개념, 즉 그 사건들의 빈도수라는 나름의 개념입니다. 속력의 한 형식인, 빈도수라는 이러한 요소가 Fraisse의 뼈대에서는 숨겨져 있습니다. Fraisse가 최초로 했으며, 우리가 반복했던 다음의 실험을 살펴봅시다. 다양한 그림들을 1분 길이의 시간 동안 보여줍니다. 하나의 상황에서는 1분에 16개의 그림을 보여주고, 다른 상황에서는 1분에 32개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7살 아래 어린 아이들은, 1분에 32개의 그림을 볼 때가 1분에 16개의 그림을 볼 때보다 시간이 더 길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은 Fraisse의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약간 더 먹은 7 또는 8살 아이들과 같은 실험을 할 경우, 역전된 결과들을 보게 됩니다. 이 아이들은 32개의 그림을 보는 상황에서 시간이 더 짧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아주 분명한 것은, 여기서 사건들의 빠르기는 아이들의 판단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실상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시간 개념은 논리적 수학적 생각하기에 수반된 조작들과 평행 관계에 있는 (즉, 본질적 측면에서 동일한) 조작들에 바탕한 구성(아이들한테 있어서는 지적 구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말로, 시간 개념에 대한 나의 언급을 맺습니다. 세 가지 종류의 조작들이 시간 관념에 수반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순차 배열 조작들, 즉 시간 속에서 사건들을 순서짓는 조작들이 있습니다: A 다음 B가 오고, B 다음 C가 오고, C 다음 D가 오고, 등등. 두 번째로, 류 포함이라는 조작들과 비슷한 조작들이 있습니다: 사건 A에 잇달아 사건 B가 일어나고, 사건 B에 잇달아 사건 C가 일어날 경우, 그때 우리는 시간 간격 AC를 시간 간격 AB보다 더 길다는 것을 조작적으로 결론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류들에 대한 논리에서,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또는 전체 또는 총체 류는 하위 류보다 크다는 개념과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를 수반하는 조작들이 순서짓기 조작들과 분류 조작들의 합인 것처럼,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조작들이 합쳐진 시간 측정 조작들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 가역적 구조들로 지능을 정의하는 이가 어떻게 순전히 비가역성으로만 특징지워진 나름의 시간 개념을 지적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답은 간단하다: 이러한 물리학적인 비가역적 시간도, 생각 속에서는, 우리의 가역적인 내재화된 조작들을 써서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왔다갔다할 수 있는> 가역적인 것이 된다.

 

 

  *  결   론  *

 

    앞에 든 여러 예들은, 내가 발생론적 인식론의 주된 과제를 지식 발달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이 구성되고 있는 것들을 설명하는 일이라 여기고 있는 까닭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경험론자의 관점에서 보면, "발견"이라는 것은 그것을 만든 또는 행한 그 사람한테는 새로운 것이지만 발견된 것은 이미 외부 실재에 실존하고 있는 것이기에, 여하한 새로운 실재들에 대한 구성도 있을 수 없습니다. 생득주의자 또는 선험주의자는 지식의 형식들은 주체의 내부에 미리 결정되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그렇기에 재차,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운 것이란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발생론적 인식론자들한테, 지식은 지속적 구성에서 결과된 것입니다; 그 까닭은, 각각의 이해하기에는 어느 정도의 발명이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며; 발달 과정에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진전이란, 언제나, 외부 세계든 주체의 마음 속에든 그전에는 실존하지 않았던 새로운 구조들의 형성으로 특징지워지기 때문입니다. 발생론적 인식론의 핵심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것들을 구성하는 <우리가 반성수반적 추상과 자율-규제라 부르는 설명적 인자들에 대한 필요를 야기하는> 메커니즘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 설명적 인자 또는 개념들은 단지 전반적 또는 포괄적인 설명만을 제공할 뿐입니다. 가장 갖난 아이 수준에서부터 가장 비범한 과학적 발명들 가운데 정점에 이른 수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인지 수준들에서 발견되고 있는 이러한 근본적인 지적 창조 과정을 명백히 하기 위한 엄청난 많은 작업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Jean Piaget (1896-1980)

 

  • PIAGET의 발생론적 인식론에 대한  Ernst von Glasersfeld의 주석
    ( Glasersfeld`s Commentary )

 

 



RC 관련 텍스트들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