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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 입문

근본적 구성론 입문*

                              Radical Constructivism

 

 

                                            확실성은 신들이 갖고, 우리 사람들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알크마이온[1]   

서두

인습에서 벗어난 생각하기 방식은, 결코 한 장으로는, 빈틈없이 정당성이 부여될 수 없지만, 여기저기 하나하나 닻을 내린 그 방식의 가장 특징적인 凸점들로 제시될 수는 있을 것 같다. 물론 잘못 이해될 위험은 있다. 구성주의가 처한 사정으로 인해 그 방식은 한 번 보고 내던져질 추가 위험이 있다: 그 까닭은, 회의론과 비슷하게 <그 방식은 이와 일정 공통점은 있다> 그 방식은 너무 썰렁하고 비판적이며, 또는 보통 상식과는 완전히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상, 어떤 관념의 지지자들은 그 관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을 그 비판자들과 반대자들이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설명한다. 내가 아주 많이 관여했기에 드는 생각인데, 18c에는 최초의 확실한 구성주의자인 지암바티스타 비꼬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최근에는 실비오 케카토와 쟝 삐아제가 부딪혔던 저항은, 그들의 논증 전개 과정에 있는 비일관성이나 틈들로 인한 것이기 보다는, 구성주의는 전통적 세계관의 너무 넓은 부분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당화될 수는 있지만>, 의혹에 기인한 것이다. 사실, 그 방식이 다음 논쟁을 불가피하게 야기시키고 있음을 깨닫는 데는 구성주의로 깊이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사람은 그의 생각하기, 그의 지식에 대해 그 사람 혼자 책임져야 하며, 그렇기에 그가 행한 것들 또한 그 사람 혼자 책임져야 한다. 오늘날, 행동주의자들은 변함없이 모든 책임을 환경 탓으로 돌리는 데 몰두하고 있으며, 사회학자들은 그 책임의 많은 부분을 유전자 탓으로 돌리려 하고 있는 이 때, 그 방식이 '우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세계는 우리 자신들의 탓이지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어떤 교설이든 아주 편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성주의가 말하려 한 것이다; 그외에도 그것은 그 이상 훨씬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거의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구축한다: 그 까닭은, 간단한 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어찌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지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RC는, 칸트가 그의 Critique에서 행한 것과 다르지 않게, 우리가 우리의 경험 세계를 조립하는 데 쓴 조작들은 탐구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러한 조작하기를 알아차리는 것(이를 케카토는 이태리어로 consapevolezza operative라고[ii]  아주 멋지게 불렀다)은 우리가 이 세계를 달리, 그리고 필시 더 낫게, 조립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곳 입문에서는, 반복하건데, 몇몇 외관들만을 펼쳐보일 것이다. 처음 절에서는, 모든 경험과 독립된 것으로 가정되고 있는 "절대적" 실재와 지식 사이의 관계를 다루며, 우리 지식은 그러한 실재하는 세계의 그림 또는 표상으로서 결코 해석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우리한테 가능한 경로들을 헤쳐나가는 도구로서만 해석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알크마이온의 단편을 보라).

두 번째 절은 회의론과 칸트의 화두를 그리고 있다: 우리의 경험하기 방식들은 있는 그것들로 있는 것들이기에 우리가 경험으로 구상할 없는 그/저 세계는 그 어떤 식으로도 구상할 수 없다; 바로 이때 그것은 비꼬의 구성주의 사상의 몇몇 외관들을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 절은 구성주의로 개념 분석을 할 때만 드러나는 몇몇 주요 특징들을 밝히고 있다. 케카토 뿐만 아니라 삐아제한테서도 물려받았던 많은 관념들 가운데 몇몇이 그려질 것이고 드물게만 인용으로 떠받쳐질 것이다. 삐아제의 작업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1970년대 내내 나를 북돋았고, 그 전에, 케카토와 함께 한 작업은 내 생각하기에 방향과 셀 수 없는 통찰력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구성주의자들한테, 모든 소통과 모든 이해하기는 경험 주체가 갖는 조각 또는 파편에 대한 해석을 부여하는 구성의 문제이며, 그렇기에, 최종(혹은, 가장 적합한) 분석이란 점에서, 이들 쪽들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책임은 오직 나 혼자만이 질 수 있는 것이다.     

 

 I.

철학의 역사는 이러저러한 이론 또는 주의들로 뒤얽힌 덩어리다. 관념론, 합리론, 명목론, 실재론, 회의론, 그리고 한 다스 이상되는 이론들은, 서구 사상이 처음 글로 쓰여진 이래 25c 동안 서로서로 어느 정도 박력 있는 싸움을 이어왔다.

많은 학파들, 방향이나 경향들, 그리고 운동이나 조류들은 종종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면이라도 진지하게 배웠으면 하는 이론이라면 이미 확립된 모든 이론들에서 자신을 따로 분리시켜야 한다: 그러한 이론은 지식 이론에서 새로운 적어도 하나의 전환점은 제시해야 한다. 종종 그것은, 잘 알려진 구성 요소들을 다시 배열하는 것, 출발점의 위치를 약간 바꾸는 것, 또는 전통 개념을 쪼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식론적 문제<우리는 실재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획득하며 그러한 지식은 얼마나 믿을 수 있으며 "참(眞)된" 것일 수 있는가?>는 플라톤을 사로잡았던 것 못지 않게 현대 철학을 점령하고 있다. 해답들을 찾는 방식과 수단들은 물론 더욱 다양하고 복잡해져 가고 있지만, 거의 예외없이 기본 질문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처음 질문하는 방식으로 인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었고, 그후 죽 그러한 시도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과학 철학자 힐러리 퍼트남은 최근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이후) 칸트이전에는, 적어도 칸트가 바탕에 대한 또는 환원 불가능한 단어들로 붙들었던 것들과 관련해서, 형이상학적 실재론자가 아니었던 철학자를 찾을 수는 없다"[iii]. 퍼트남은 설명한다: 철학자들은 진짜로 실존하는 것에 관한 그들 견해들에 대해, 그 2000년 동안, 합의를 보는데 분명 실패했지만, 그들의 진리에 대한 착상 또는 구상은, 진리가 모호한 관념, 객관 타당성에 매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언제나 같았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이란, 그래서, 어떤 것이 (경험과) 독립된 "객관적" 실재와 대응하기만 하면 "참(real:)"이라 부를 수 있다고 고집하는 이들이다[iv] .

칸트 이후로도, 대체로 상황은 변한 것이 없다. 그의 Critique of Pure Reason을 진지하게 붙들고 이해하고자 했던 이들이 몇몇 있었지만, 철학적 전통의 압력에는 가히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마음은 자연에서 법칙들을 도출하는 게 아니라, 법칙들에 자연을 갖다대고 있다 [v]는 칸트의 테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다수 과학자들은 변함없이 그들 자신들을, 자연의 비밀스런 장막을 걷어내고 이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인간 지식의 범위와 한계를 확장하는 "발견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무수한 철학자들이 그렇게 고심해서 획득한 지식에, 그밖에 사람들이 순수 진리로 알고 있는, 의심할-수-없는 확실성을 부가하는 과업에 헌신했다. 지금도 여전히, 지식이란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에만 지식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군림하고 있다[vi] .

물론, 서구 인식론의 역사를 단 몇쪽으로 충분히 그리고 공정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이 장이 갖는 이러한 한계들이 있지만, 내 제기하고 있는 구성주의를 전통적 개념화 과정들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주된 핵심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이로도 족할 것이다. 그러한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차이란 실재(reality)와 지식이 맺는 관계에 대한 문제다. 인식론 뿐만 아니라 인지심리학의 전통적 견해에서는 언제나 그 관계를 대체로 사진-같은(아이콘과 비슷한) (모든 측면에서 똑같은) 대응 또는 일치로 보는 반면, 근본적 구성주의는 그 관계를 기능적 의미를 갖는 적응으로 본다.(관점에 따라, 'reality'는 다양하게 해석되며, 번역된다: 역주)

일상어에서, 그 개념과 반대되는 개념은 일정한 맥락에서 단어 "어울림"과 "들어맞음"을 위의 단어들과 맞붙이면 아주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은, 당신이 수선할 벽의 색깔과 일치하는 색깔의 페인트를 찾을 때와 같이 실재와 일치하는 지식을 찾고 있다. 인식론자의 경우, 그에게 문제되고 있는 것은 색깔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일종의 "동형 관계"1), 말하자면, 관계들,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것, 또는 특징 구조가 같은 어떤 등가<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가 같은 것들로 간주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를 문제로 삼고 있는 까닭은, 오직 그 때에라야 그는 그의 지식이 그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어떤 것이 들어맞는다고 말하는 경우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다른 관계다. 열쇠가 자물통을 여는 경우 그것은 들어맞는 것이다. 그 들어맞음은 열쇠가 지닌 적합한 능력을 묘사하고 있지 자물통의 능력이 아니다. 직업적 털이들 덕택에, 우리는 우리가 지닌 열쇠와는 아주 다른 모양을 갖는 그렇지만 우리 문들을 여는 허다한 열쇠들이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은유은 거칠지만 내가 해명하고 싶은 차이를 아주 잘 두드러지게 한다. 뿌리부터 짜맞추는 이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과학자들, 철학자들, 보통 사람들, 학교 아이들, 동물들, 사실 어떤 종류의 생명 유기체든>는, 도둑이 장물을 얻고자 열어야 하는 자물통을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우리 환경에 맞서 있다.

이는, 단어 "적합 또는 들어맞음"이 다윈과 신다윈주의의 진화 이론들에 적용될 때 갖는 의미다. 불행히도, 다윈은 표현 "(최)적자(의) 생존"을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닦았던 길은, 그의 이론을 기초로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더 잘 들어맞는 것들로 여길 수 있다는, 아울러 그들 가운데 최적자(가장-잘-들어맞는-것-하나) 마저 있을 수 있다는, 그릇된 관념이었다[vii] . 그러나, 생존이 종들을 선택하는 유일한 기준인 이론에서는 두 가지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종이 자신의 (그밖에 종들을 포함한) 환경에 들어맞든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든; 즉, 그 종은 살아남든지 죽는다. 그밖에 기준들, 이를테면, 생존 방법의 절약, 단순, 또는 간결을 도입한 외부의 관찰자만이, <생존 이외의 가치들을 숙고 끝에 사실들로 단정지은 관찰자만이>, 살아남음으로써 들어맞는 것들임을 명백히 했던 그 항목들(또는 사실들)에 대해 비교 판단을 감행할 수 있다. 

이러한 한 측면에서, 뿌리부터 짜맞추는 인식론의 바탕 원리는 진화론의 그것과 맞아떨어진다: 환경이 생명 유기체(생물학적 구조들)에 제한들을 배치하고 그 변이들이 "viability"2) 있는 또는 가능한 한계들을 너머 어떤 식으로든 벗어날 경우 그것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경험 세계도, <일상 생활 또는 실험실 그 어떤 것과 관련되든>, 우리 관념들(인지 구조들)을 검사하는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그것은, 아이가 거의 분간되고 있지 않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확립시키고 있는 그 최초의 규칙성에 적용된다. 그것은, 어른들이 그들의 상식 세계를 경영하려 하는 것을 돕는 규칙들에도 적용된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넓은 경험 영역에서 지속되는 안정성과 질서를 애써 조금씩 모아 정식화하는 가설들, 이론들, 그리고 이른바 "자연 법칙들"에도 적용된다. 규칙성들, (과학적 사실이 아닌 경험에 바탕한 개괄적 근사적 법칙, 규칙인) 통밥들, 그리고 이론들은, 더 진전된 경험에 비추어져, 믿을 수 있는 것들로, 또는 (확률 또는 개연성이란 개념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믿을 수 없는 것들로 입증된다 (확률 또는 개연성 개념을 도입한 경우 우리는 지식이 확실한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명확히 포기한 것이다).

진화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식의 역사에서도, "적응"에 대해 말해왔고, 그리해서, 어마어마한 오해가 생겨났다. 생각하기가 진화하는 방식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실재에 적응하고 있는 것은 결코 유기체들 또는 관념들일 수 없다; 그렇지만, 예부터 그리고 언제까지나 실재는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을, 있을 수 있는 한계들을 설정하여, 가차없이 없애버리고 있다. 관념들의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계통발생에서도, "자연 선택"은 최적자, 가장 튼튼한 것, 가장 우수한 것, 또는 가장 참된 것들을, 긍정적 의미로 (더 발달된 또는 더 진보된 것으로 인지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들은 모두 완전히 파멸시키는 것으로) 기능한다:. 

물론, 이러한 비교를 조금은 너무 멀리 연장하고 있다. 자연에서, 건강(또는 들어맞음)의3) 결핍은 예외없이 치명적이다; 그렇지만, 철학자들은 아주 드물게만 그들이 지닌 부적절한 관념들로 죽는다. 관념들의 역사에서 그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닌, "리"의 문제다. 우리가 이를 명심한다면, 진화론은 강력한 유추 하나를 제공할 수 있다: 살클수 있는 생물학적 구조들과 그들의 환경 사이에 놓이는 관계는, 실로, 살클수 있는 인지적 구조들과 생각하기 주체의 경험 세계 사이에 놓이는 관계와 똑같다. 양자의 들어맞음 -- 자연스레 일어나는 사건이 그것들을 그렇게 다듬었기에 들어맞은 것이 첫번째요, 인간의 의도가 그것들이 우연히 다달았던 목적지들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형성하였기에 들어맞는 것이 두번째다; 그 목적지들이란, 특정한 경험들에 대한 설명, 예측, 또는 제어를 가리킨다. 

유추가 갖는 인식론적 측면은 앞으로도 더욱 중요할 것이다. 행태학자들이 자주 그릇된 단언들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생명 유기체들의 행동이 갖는 구조는 결코 "객관적" 세계에[viii], 즉 경험되기 전 있을 수 있는 그 어떤 세계에 , 관한 결론들을 끌어내는 바탕으로 쓰일 수 없다. 이러한 까닭은, 진화론에 따르자면, 그러한 세계와 생물학적 구조 또는 행동들의 생존 여력 사에에는 그 어떤 인과 고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강조했던 대로, 다윈 이론은 인과에 대한 원리가 아닌 제한들에 대한 원리에 바탕하고 있다[ix] . 진화하는 역사의 어떤 순간에 살아있는 것으로, 그리고 행동하는 방식들로 우리한테 발견되는 유기체들은 우연히 발생한 축적된 변이들의 결과이며, 환경의 영향은 여하한 여건들에서든 살클수 없는 변이체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고로, 환경이란, 기껏해야, 소멸 또는 멸종에 대해서만 탓이 있다고 주장될 수 있을 뿐, 살아남은 것에 대해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말하자면, 진화하는 역사에 대한 관찰자는, 정말이지, 죽어 없어졌던 모든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살클수 있는 범위 또는 한계를 벗어났음이 틀림없다는 점을, 그리고 그가 살아남은 것으로 발견한 모든 것들은 적어도 당장은 살클수 있는 것이라는 바를, 확고히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단언은, 그렇지만, 명백히 동어반복(생존한 것은 살아 있다)을 조성하며, 오로지 부정하는 효과들만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는 그 세계의 객관적 속성들에는 그 어떤 빛도 비추고 있지 않다.

이들 숙고들은 지식 이론의 바탕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잘 들어맞는다. 아주 일반적으로, 우리 지식은 쓸모가 있고, 적절하며, 살클수 있는 것이나, 한편, 그 지식이 경험에 끄떡없이 견뎌내며 우리가 예측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그리고, 실상 그러한 것처럼, 어떤 현상들(지각된 것(外樣)들, 사건들, 경험들)을 일으키거나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우에는, 더 나아질 수 없을 만큼 막다른 지점에 이르렀다고 우리는 평가하고 싶어한다. 지식이 그와 같은 목적을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그것은 의심스러워지고, 믿을 수 없어지며, 쓸모 없게 되고, 결국에는 미신으로 절하될 것이다. 말하자면, 실용주의 관점에서 우리는 관념들, 이론들, 그리고 "자연의 법칙들"을 우리 경험 세계에서 (여기서 우리는 그것들을 이끌어낸다)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구조들로 간주하고 있다; 그 구조들은 견뎌내든가 아니면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자신의 목적 또는 존재이유를 받들고 있는 그 어떤 인지적 구조도, 바로 이것<즉, 우리가 경험했던 (그리고 경험하며 결정지었던) 여건들이 주어졌을 때 그것은 그것에 기대되었던 어떤 것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을 뿐이다. 논리적으로, 그러한 인지적 구조는 "객관적 세계"란 어떠한 것일 수 있는가에 관한 그 어떤 실마리도 줄 수 없다; 그러한 구조가 함의하는 것은, 그저, '우리 경험 세계 속 특정 여건들 아래서 우리가 선택한 목표에 이르는 살클수 있는 하나의 방식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일 뿐이다. 우리한테 그것은, 그밖에도 얼마나 많은 다른 방식들이 있을 수 있는지, 또는 우리가 목표로 간주한 그 경험이 우리 경험 너머 세계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경험의 권역 안으로 실제로 진입하는, 실재하는 세계의 유일한 측면은 그 세계가 갖는 제한들이다; 또는, 첫번째 사이버네틱스 숙련가들 중 한 사람인 워런 매컬럭이 그토록 극적으로 표현했던 대로: "하나의 가설을 거짓으로 입증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지식의 절정인 것이다"[x] .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은 인습(또는 확립된 규약)과 절연한 채로 지식 이론을 발전시켰기에 그렇게 급진적이다: 이 이론에서 지식은 "객관적인" 존재론적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경험으로 조성된 세계를 질서지우고 조직한 것일 뿐이다. 급진적 구성주의자들, 즉 뿌리부터 짜맞추는 이들은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딱잘라 내버리고 삐아제의 견해와 완전히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그가 말하길, "지성은 그 자신을 조직함으로써 세계를 조직하고 있다"[xi] . 

삐아제한테, 조직이란, 언제나, 의식 있는 지성과 환경 사이 필요한 상호작용의 결과다; 그리고 그는 첫째로 그 자신을 생물 철학자로 간주했기에 상호작용을 "적응"으로 특징지웠다. 나 또한 이에 동의한다 -- 그러나 진화론의 선택 과정에 관해 앞서 말한 이후로, 분명해졌어야 할 것은, 적응하는 들어맞음은 결단코 대응 또는 동형 관계로 해석되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바탕에 관한 의문, '인지 구조들 또는 지식은 우리 경험 너머 존재론적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에 대한, 삐아제의 입장은 다소 모호하다. 구성주의에 엄청난 공헌을 했음에도 그가 여전히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다는 인상을 사람들은 빈번하게 받는다. 이 점에서 그는, 물론, 혼자가 아니다. 다윈 이래 "진화론적 인식론"의 지지자들에 대한 탁월한 개관을 제공했던, 도날드 캠벨은 쓰기를: "논쟁의 핵심은, 지식에 대한 문제를 데이터와 이론의 그러한 실재 세계로 들어맞음으로 정의함으로써, 실재 세계를 개념으로 포괄하는 것이다"[xii] . 그가 내린 결론에서 그는 이윽고, 그와 칼 포퍼가 표현한 진화론적 인식론은 "실재론의 목표들과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옹호와 완벽히 양립할 수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극도로 명쾌한 해설을 제공하고 있는 그의 이론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xiii] .

나는, 여기 첫번째 절에서, 실재론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관념, 지식과 실재 사이에 놓이는 대응 또는 일치라는 관념은, 결코, "들어맞음"이라는 진화론적 관념과 대체될 수 없음은 물론, 그러한 관념에서 이끌려 나올 수도 없음을 보이고자 했다. 두 번째 절에서, 나는 뿌리부터 짜맞추는 접근과 인식론의 역사 사이에 놓인 고리들에 대해 매우 근접한 해명을 조그마나마 제공할 것이다. 거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은 첫눈에 봐서는 그 정도로까지 급진적으로(또는 뿌리부터 전복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II.

지식과 실재가 대응 혹은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의혹들은 생각하는 개체가 그 자신의 생각하기를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 생겨났다. 소크라테스 이전 학파들 가운데 가장 이른 학파의 한 사람인 크세노파네스는, 그때 이미, 사람은 확실한 진리를 여태컷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저 세계의 것들과 신들에 관해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완벽히 참 또는 진짜인 어떤 것을 말하는 데에 성공했다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견해 또는 의견이란 (외관상 보이기로) 숙명적으로 모든 사태 또는 상황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xiv] .

   "보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한번이라도 스칠 수 있기 이전에 거기 있어야 할 것이다 -- 그리고 지식은, 이리하여, 그 어떤 의식이 그것을 보거나 또는 그밖에 다른 식으로 경험하기 이전에, 거기 있는, 즉 실존하는, 세계의 반영 또는 그림이 된다. 무대는 마련되었고, 시작된 연극에서 그 시나리오로 주어졌으며, B.C. 6c 이래 서구 인식론을 결정했던 딜레마, "형이상학적 실재론"(퍼트남)은 여타의 철학적 태도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가능한 단 하나의 태도로서 처음부터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 마투라나가 아주 분명히 했던 바로: "객관적 지식은 알려진 것에 대한 기술 또는 묘사를 조성하고 있다고 하는 선험적(a priori) 당연시는 …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하는 의문들을 회피한다"[xv] . 지식이란 실재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당연히 여김으로써, 전통적 인식론은 당연히 풀릴 수 없는, 자신한테 걸맞는, 딜레마를 창조했다.

   지식이 그 세계 자체에 대한 기술(記述) 또는 이미지라면, 우리한테는 우리가 우리 기술들이나 이미지들이 어쩔 때 "옳은지" 또는 "참인지" 하는 판단을 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그때그때 가능한 가장 참된 방식으로 그러한 실재를 탐색하고 "알아야" 하는 과업을 부여받은 "발견자"로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독립적인 세계로 태어나 던져진다는 시나리오에는 출발부터 회의론이 함께 하고 있었다. 크세노파네스에 따르자면 모든 인간 지식에 달라붙어 있는, 나름의 관념 "외양(現象)"과 "닮음"은 피론 학파 그리고 이후 섹스토스 엠피리코스가 갈고 다듬었고 특히 지각에 응용했다; 그리고 우리 감관들이 "나르는" 그 어떤 그림이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는지, 또는 어느 정도까지나 일치하는지 하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는 오늘날도 변함없이 모든 지식 이론의 핵심이다. 섹스토스는, 다른 것들도 있지만, 사과를 예로 들었다. 우리 감관들에 그것은 반들반들하고, 향긋하고, 달며, 노란 것으로 나타난다 -- 그러나 실재하는 사과가 이들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명하지 않다: 그 사과가 또한 그저 우리 감관으로는 지각되고 있지 않을 뿐인 그밖에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결코 분명치 않은 것처럼[xvi] .     

그 질문에 답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우리가 지각한 것들을 그밖에 지각한 것들을 써서만 확인 또는 알아볼 수 있지, 결코 우리가 그 사과를 지각하기  있는 그대로의 그 사과를 갖다 빚대 확인할 수는 없다. 회의론자들의 논증으로 2000 여년 동안 철학자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xvii] . 게다가 칸트는 훨신 더 힘든, 두 번째, 논증을 추가했다. 시간과 공간을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의 외관 또는 양상들로 숙고함으로써, 그는 그것들을 실재에서 빼내 현상들이 속한 권역으로 옮겼고, 그렇게 해서, 그는 감관 속성들 뿐만 아니라 그 사과의 물다움(혹은 객관적 실재성) 또한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사과의 반들반들함, 향기, 달콤함, 그리고 색깔은 미덥지 못한 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대상이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실제 실존하리라고, 이 세계의 그밖에 것들과 분리된 어떤 단위체 또는 "사물"로 실제 실존하리라고,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두 번째 의심에서 귀결되는 것들은, 정말이지, 우리 감관들에 대한 신뢰성과 관련된 귀결들보다 더 심각한 것들이다; 그 의심으로, 실재하는 세계 속 객관적 구조에 대한 그 어떤 표상도 무너져내리며, 우리는, 그리하여, 실재가 그와 같은 구조를 부여하지 않고 있을 때라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경험 세계에서 그러한 구조를 찾고 또한 발견할 수 있는 일이 왜 그리고, 특히,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달리 말해, 칸트의 진술이 맞는 것이고 우리 경험이 우리한테 사물들 그 자체의 본성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면[xviii] , 우리는, 그때, 우리가 그럼에도 많은 측면들에서 믿을 수 있는 그리고 상당히 안정되어 있는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RC가 다루고자 하는 주된 질문이며, RC가 제시하는 답은, 적어도 그 주된 내용에 있어서는, 칸트보다 반세기 이상 이른 1710에 지암바티스타 비꼬가 앞서 해결했던 것이다: 

   의 진리란 이 그것을 창조하고 조합하여 그가 알게 된 것이라는 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진리도 인간이 그의 행위들로 그것을 쌓아올리고 다듬어 알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학(scientia)은, 사물들이 만들어지는 기원들, 방식들, 그리고 그것들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cognitio)이다[xix] .     

   비꼬의 슬로건 "Verum ipsum factum"<진리란 만들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factum과 "fact"는 둘 다 '만들다'라는 뜻의 라틴어 facere에서 유래된 것들이다)>은 비꼬가 문화사가와 역사 철학자로 우리 세기에 다시 발견된 이래 아주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인 인식론적 관념들은, 해명은 커녕,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그에 따르자면, 사물을 "아는" 유일한 방식은 그것은 만들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그때서야 그 구성 성분들이 어떤 것들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짜맞추어져 있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 의 모든 피조물, 즉 만물을 알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구성한 것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비꼬는 단어 "조작"마저 사용함으로써, 우리 세기 듀이, 브리지먼, 케카토, 삐아제와 같은 구성주의자들이 쓰기 시작한 핵심 용어를 앞서 쓰고 있다.

비꼬는, 분명, 그 후로도 인간의 인지 구성물들과 의 피조물들 사이에 연결 고리를 확립시키고자 한다. 형이상학에 관한 그의 논문을 읽고 있노라면, 그가 이따금씩 그 자신의 관념들에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가 전개시킨 지식 이론은, 사람의 지식은 사람의 구성물로 보이기에 아울러 이 창조한 존재론적인 어떤 것에 (속할 수 없기) 속하지 않기에, 논리적으로 닫혀 있음에도, 비꼬는 그러한 독립을 강조하는 것을 꺼렸다. 그렇게 내켜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세계에 대한 그의 그림은 버클리의 형이상학을 닮은 복사판으로 보일 수 있다. 버클리한테, 원리 "esse est percipi"(있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는 비꼬의 진술 "은 모든 것을 만들었기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가 달성한 것과 똑같은 효과를 달성한다. 둘 모두, 존재론은 신의 활동들로 보증된다. 다른 한편, 비꼬 또한 내가 훨씬 더 마음에 드는 것으로 발견한 존재론 쪽으로 또 하나의 길을 열어 두고 있으며, 그 까닭은 그 존재론이 그 어떤 형식의 합리적 실재론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으로, 신화와 예술은 상징들을 써서 그러한 실재 세계에 접근한다. 상징들은, 마찬가지로, 만들어지고, 그것들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구성으로서 합리적 지식과는 다른 종류의 지식을 제공한다.

만년에는 관념론자들이었던, 우리한테, 비꼬와 버클리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비꼬가 사람의 합리적 지식과 합리적 경험 세계를 모두 사람의 인지적 구성의 산물들로 간주했다는 점이다[xx] . 그렇기에, 비꼬의 "지식"이란, 오늘날, 우리가 우리 경험 세계로 귀착되는 조작들에 대한 알아차림이라 부르는 것이다. 버클리가 "천상의 합창대와 지상의 온갖 것들 모두, 요컨데, 그 세계의 강력한 틀을 형성하고 있는 그 모든 물체들도 마음 없이는 존속될 수 없는 것들이다"[xxi] 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그의 강조는 언제나 있기 즉 존재에 두어지고 있다; 비꼬가 변함없이 인간 지식과 그것의 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꼬의 facere의 명시적 사용, 형성하기와 짜맞추기에 대한 지속적 언급은 그리고, 간단히 말해, 모든 지식과 경험의 능동적 구성은, 버클리가 했던 것보다는, 삐아제의 발생론적 인식론에 그리고 현대 구성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 비꼬가 오늘날의 과학 철학자들 가운데 몇몇 이들의 인식론적 태도를 예지했던 다음 진술보다도 더 밝게 비추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 지식은 사물들을 균형잡힌 비율로 다른 것들에 대응시키려는 노력에 불과하다"[xxii] .

우리의 주된 의문은, 우리는 객관적 세계에 안정성, 규칙성, 또는 그밖에 다른 지각된 어떤 속성을 우리가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믿을 수 있는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바가 어떻게 생겨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비꼬는 그 의문에 답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쓸모 없으며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며 알게 되는 이 세계가, 그가 말한 대로, 우리 자신들로 인해 필연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이 세계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의 진가를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구성주의 인식론의 맨 밑 바닥의 특징을 (즉, 구성되어 있는 이 세계는 경험들로 형성되는 경험 세계이며 존재론적 실재와 대응한다는 뜻을 갖는 "진리"와 관련된 것은 그 어떤 것도 요청하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꼬의 입장은, 그 점에 있어서, 칸트의 말, "연은, 그러므로, … 모든 경험 대상들이 집적되어 구상된 것이다"[xxiii] 라는 입장과 비슷하다. 칸트한테, "마음의 활동들이 … 우리가 경험이라 부르는 대상들에 대한 지식이 되도록 가공 처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감각 인상이라는 원료"[xxiv] 다. 달리 말해, 모든 경험 대상들 뿐만 아니라 경험도, 그 어떤 여건들에서든, 우리의 경험하기 방식들과 수단들에 따른 결과이며, 이로부터 유도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밖에 범주들에 따라 필연적으로 구조화되어 결정된다. 칸트의 체계 즉, 시스템에서 원료의 가공 처리를 자동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그것들 없이는 그 어떤 경험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들은 선험적(a priori)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그 a priori는 유기체의 경험을 형성하는 깜냥에 대한 전문적 묘사로 간주될 수 있다. 그 a priori는 그러한 유기체가 조작을 행하는 작업틀을 묘사하고 있지, 유기체가 그것을 왜 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을 하는지를 우리한테 말해주고 있지 않다. "a priori"는 "붙박힌" 또는 "타고난"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칸트의 정당화는, 에두르는 식이라 할지라도, 한테 그리고 관념들에 대한 플라톤식의 신화에 이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비꼬는 보다 근대적이며 더욱 일상에 접근해 있다. 이를테면, 인과성이란 범주에 대해, 그는 말하길: "참이(또는 진짜가) 만들어진 상태를 뜻한다면, 그때 어떤 것을 그것의 원인을 써서 증명하는 것은 그것을 야기시키는 일과 같다"[xxv] . (분명 비꼬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현대 구성주의 수학자들이 발견했던) 이러한 나름의 개념은, 비꼬가 깨달았던 대로, 현저히 넓은 적용 범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원인들이란 개별 요소들을 짜맞추는 가운데 그 기원이 있다: 즉, 그것들을 경험자의 능동적 조작하기, 이를테면, "그 대상의 (인과적으로 결정된) 명확한 형식이 요소들의 순서와 배합에서 생겨나도록"[xxvi]  하는 조작하기에 그 기원이 있다. 이러한 점은, 사실 대체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그 자체로 있으며,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그러한 방식으로 짜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배합이 일어나는 방식을, 칸트한테는, 선험적인 것들이 결정짓고 있는 반면, 비꼬의 체계 또는 시스템에서는 우리의 경험하기, 생각하기, 그리고 구성하기 방식들을 결정짓는 그 어떤 불변의 붙박힌 원리들이란 있을 수 없다. 대신, 우리가 맞부닺치고 있는 그러한 제한들은 우리 구성의 역사 또는 이력에서 솟아나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 행해진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장차 행해질 수 있는 것을 한계짓기 때문이다.[xxvii]

 

비꼬의 사상을 요약하면, 지식 구성은, 그한테, 경험될 수도 알려질 수도 없는 "객관적" 실재와 (불가능한) 일치 혹은 대응이라는 목표에는 제한받지(속박되어 강제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용된 소재에서 생겨나는 조건들에는 제한을 받는다: 그 소재는, 구체적인 것들이든 추상적인 것들이든, 언제나 앞선 구성의 결과들로 형성된다. 아이콘과 같은 기능을 갖는 "진리"라는 나름의 관념을 대체하는 일정한 제한들 속 일관성이라는 이러한 관념으로, 비꼬는, 진리를 마음에 품는 일 없이, 구성주의 지식 이론에서 기본 원리인 살클수를 예지했다.

그의 체계만큼 우아하게, 그 원리에는 아직도 공공연한 의문 두 가지가 남아 있다. 첫째, 새로운 구성물은 그 어떤 조건들 아래서 앞서 구성된 것과 양립할 수 있다고 간주될텐데, 그때 그 어떤 조건들이란 무엇인가? 둘째, 왜 유기체는 인지 구성이라는 과업을 이행해야 하는가? 세 번째 절은 이들 의문에 답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를 기술할 것이다.

                                  III.

전통적 지식 이론에서, 알기 활동은 그 어떤 정당화도 필요치 않는, 최초 성분으로 기능하는 활동으로,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알기 주체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조건들에 구애받지 않는 "(경험에 의존치 않는) 순수한" 으로 착상된다. 급진적 구성주의 <뿌리부터 짜맞추는> 인식론은 인습을 따르는 그러한 뼈대 또는 구조를 아주 고의로 깨부수며 직업적 철학자들이, 다소 깔보는 태도로, "심리주의"라 치부하는 접근을 범하고 있다. 나를 이러한 다소 성스러운 우상을 파괴하는 단계로 이끌었던 숙고들은 처음 두 절에서 말해졌던 것들을 함께 고려하자마자 이끌려 나온다.    

 

첫째, 지식, 즉 "알게 된" 것은 수동적 받아들이기의 결과일 수 없고 능동적 주체의 활동의 산물로 생겨난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이러한 활동은, 말할 것도 없이, "물 그 자체들", 즉, 경험자가 그것들에 부여하고 있는 속성들과 구조를, 경험되기 전부터, 소지하고 있다고도 생각될 수 있는, 그런 대상들을 만지작거리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을 구축하는 활동을 "조작하기"라 부르며, 그것은, 삐아제가 그토록 간결하게 정식화했던 대로, 인지를 행하는 4) 경험 세계를 조직하기를 하는 그 자신을 써서 조직하는 그러한 의 조작하기다. 그래서 인식론은 마음이 어떻게 조작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되었고, 마음이 자신의 경험의 흐름에서 그리고 그 흐름 밖에 상대적으로 규칙적인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채택한 방식들과 수단들에 대한 연구가 되었다. 한편, 마음의 기능은 언제나 심리학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안이었다; 그리고 능동적 조작하기에 강조가 더 두어지면 질수록 그 탐구는 더더욱 심리학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발달적 견해를 취하며 계통발생학적 또는 개체발생학적 개념들을 적용할 경우, 우리는 "발생론적 인식론"의 영역,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이, 그들 견해로 지식 이론은 어떤 경우에도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숙고들로 더럽혀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엄청난 노고를 들여 회피했던 영역>, 안으로 명확히 들어서게 된다[xxviii] .  

한편, 알크마이온이 앞서 제안했던 대로, 알기라는 인간 활동은 그 세계에 대한 확실한 그리고 참(또는 진짜) 그림으로 이끌 수 없으며 단지 추측만을 부여하는 해석으로 이끌 뿐이라면, 그때 그러한 활동은 인간이 선택하는 목표들에 이르는 경로들에 산적한 자물통들을 푸는 열쇠들을 창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앞 절 끝에서, 인지 활동은 왜 일어나는가 하고 물었던 두 번째 질문은 첫번째 질문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왜냐하면, 열쇠로서 성공은 그 열쇠가 들어맞을 자물통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열쇠가 우리가 도달하기를 원하는 구체적 목표에 이르는 길 또는 방식을 열어주는냐 그렇지 않는냐에 오로지 달려 있다.         

    

구성주의는 모든 인지 활동은 목표-지향적 의식이 달라붙은 경험 세계 내에서 일어난다는, 당연히 여기는, (직관적으로 확인된) 점에서 필히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목표-지향은, 물론, "외재적"5) 실재에 놓인 목표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 여기서 수반되고 있는 목표들은 <인지적 유기체가 자신의 경험들을 평가하기>을 위해 생겨나는 것 말고 다른 이유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유기체는 경험들을 평가하고 있기에 확실한 경험들은 반복하며 그밖에 것들은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의식적 인지 활동의 산물들은, 그러므로, 언제나 목적(또는 존재 이유)을 갖고 있으며, 생겨날 때부터, 그것들이 그러한 목적에 얼마나 잘 기여하는지에 따라 그 가치가 평가 결정된다. 목적을 갖고 행하기 또는 목적에 기여하기라는 개념은, 한편, 경험 세계 속에 규칙성들을 확립시키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당연히 여기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흄의 논증은 이 상황을 완벽히 기술하고 있다: "험에서 추론된 모든 들이, 자신들의 토대로서, 미래는 과거를 닮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가정하고 있음을 건데 … 만약 자연의 정, 또는 이가 변할 수도 있다는, 그리고 과거가 미래를 위해 그 어떤 규칙도 될 수 없다는 혹이 있다면, 모든 험은 쓸모 없는 것이 되며 그 어떤 론들, 또는 론들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xxiii].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에 고유한 것이다.

개념 "자연"은, 칸트에 못지 않게 흄한테도, 경험 대상들 총체를 가르켰다[xxix] .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경험에서 끌어낸 것들은 그 무엇이든, <즉, 우리가 귀납적이라 칭하는 것들은 그 어떤 것이든>, 필히 우리 경험과 관계된 것들이지,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이 꿈꾸는 경험자와 독립된 그러한 신화적 세계와는 관계가 없다.

구성주의 접근으로 우리가 정식화한 두 번째 통찰력은, 인지적 유기체가 자신의 경험 세계에서 발견하는, 또는 오히려 산출하는, 규칙성들이 지닌 본성을 문제로 삼는다.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 그것이 규칙적이며, 일정하며, 또는 어떤 의미에서, 불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어떤 비교가 행해져야 한다. 말하자면, 앞서 경험했던 어떤 것은, 잇달은 경험의 흐름 속에서, 첫번째 경험과는 일치하지 않는 두 번째 경험과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관계-맺기"는, 그 비교가 유사성을 낳을지 또는 차이를 낳을지에 관계 없이, 본질적으로는 두 개의 다른 개념을 초래할 수 있다: 동등/등가 또는 개체이게 하는 동일성. 이들 서로 양립 불가능한 두 개념에 대한 혼란은, 영어 단어 "sa-me"이 둘 모두에 아주 무차별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굉장히 심해지고 있다. 그 혼란이, 다른 한편으로, 개념적 혼란인 까닭은, 원래는 구별된 두 표현들을 제공하고 있는 (이를 테면, 독일어: das gleich와 dasselbe; 이탈리아어: stesso와 medesimo; 한국어: 같다와 똑같다) 그밖에 언어들에서도 오늘날 마찬가지로 무차별적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지적 구성의 가장 기본적 벽돌들 가운데 하나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는 수반되고 있는 두 개념들을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삐아제가 보여주었던 바와 같이, 동등/등가와 개체이게 하는 동일성이라는 개념들은, a priori(타고난) 것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축되어야 한다; 사실, "정상 또는 보통" 아이들은 모두 삶의 첫 두 해 안에 그것들을 구축하고 있다[xxx] . 재현하는 깜냥, 말인즉, 다시 떠올리는 깜냥의 발달은 그것들의 성취 여부를 결정한다. 한편에서, 과거 지각 또는 경험과 현재 지각 또는 경험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자신한테 과거 지각 또는 경험을 다시 떠올리는 깜냥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그와 같은 다시 떠올리는 깜냥은 반복된 지각들 그리고 특히 반복된 지각들로 이루어진 군들을6) 우리한테 대상들로 여길 수 있도록 하며, 우리한테 그 대상들을 그 주체 자신의 운동과는 독립되어 있는 공간 안에 그리고 그 주체 자신의 경험 흐름과는 독립된 시간 속에 위치시킬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발달과 맞물려, 두 가지 가능한 비교 방식들이 생겨난다. 두 경험 항목들은 서로 독립된 두 대상들로 "외재화될" 수 있다; 그러나 두 경험 항목들은 또한 개체로서 "실존하는" 하나이자 똑같은 대상에 대한 두 경험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구별은 두 경험들을 비교한 결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비교되고 있는 두 항목들이 지닌 개념적 특성에 따라 결정된다. 그 비교가 "같다"라는 판정에 이르는 경우라면, 우리는 비교 검토된 속성들 각각과 관련해서 동등한 두 대상들을 갖거나, 두 경험 사이 간격 동안 변치 않은 채 그대로 있는 하나의 대상을 갖는다. 그 비교가, "같다" 대신, "차이"라는 판정에 이르는 경우라면, 우리는 서로 다른 속성들을 지닌 두 대상들을 갖거나,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한 앞선 경험 이후 그 하나의 변화된 대상을 갖는다.                              

우리의 일상 경험 관행에서, 물론, 동등/등가와 개체이게 하는 동일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마다 매번 의식적이지는 않은 채, 우리는 각기 저마다의 하나 또는 그밖에 개념을 구성하도록 우리를 밀어부치는 맥락들을 확립시키고 있다. 나는, 다른 곳에서, 망설일 수 있는 경우들이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그때 어떤 연속성을 어느 정도 그럴싸하게 예시함으로써 개체이게 하는 동일성을 결정짓고자 한 방식을 보인 바 있다[xxxi] . 지금 맥락에서는, 그저 나는 개체로서 하나의 대상의 실존 속 그 같은 어떤 연속성이란, 그 어떤 상황 또는 여건에서든, 인지하기 주체가 밟았던 조작들의 결과이며, 결단코 객관적 실재의 주어진 사실로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 누구도 이들 개념을-만들 가능성들을 직업적 마술사들보다 더 능숙하게 쓰지는 못한다. 그들은 공연 도중, 이를테면, 관객 가운데 한 사람한테 정중히 반지를 달라고 청한 다음, 다른 또 하나의 반지를 건너편 조수에게 던진다; 그리고 나서 의아해 하고 있는 그 관객이 그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그의 반지를 발견하도록 한다. 그 마술의 핵심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 반지에 대한 첫 경험과 그 던져진 대상에 대한 경험 사이에 무심코 개체이게 하는 동일성(또는 똑같음)을 구성토록 하는 그 같은 방식으로, 관객들의 지각을 형성토록 하는 데에 있다. 일단 그것이 행해지자마자, 정말 필요로 되는 마술은 그 반지를 조수로부터 그 관객의 주머지로 옮겨넣는 일일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붉은 리본으로 하는 마술인데, 마술사는 그것을 작은 조각들로 자르고 나서, 말 그대로 그의 손을 가볍게 한 번 털어, 다시 온전한 한 조각으로 만들어낸다.

비슷한, 자주 인용된, 사례로, 지각의 조건들에 따라, 하나하나 다른 이미지들이 잇달아 이어지는 것으로, 또는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이미지로, 우리한테 보이는 한 줄의 영화 필름이 있다. 그 어느 때 어디선가 또각또각 걷고 있었을 수도 아닐 수도, 그러는 동안 촬영되었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그 어떤 "진짜" 말 한 마리와는 상관 없이, 그 영상이 우리한테 제시될 때, 우리 자신들은 이미지들의 연접으로 한 마리 말에 대한 연속적인 하나의 변화를 조성함으로써 운동을 구성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 운동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지각 대상들의 권역에서는 같음과 차이에 대한 판단들이 적지 않게 구성되고 있다. 내가 위에서 지적한 대로, "같음"은 언제나 특정한 속성들에 관한 검토 결과다. 두 개의 달걀은 그것들의 모양, 크기, 또는 색깔 때문에 같은 것들로 간주될 수도, 또는 그것들이 같은 암탉에서 나왔기 때문에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는 어제 다른 하나는 6주 전에 낳은 것이라면 그것들 사이에는 지독한 차이가 하나 있을 것이다. 들쥐와 코끼리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포유동물을 그밖에 동물들과 구별짓고 싶을 때마다 같은 것들로 간주될 것이다. 결국, 내가 이제까지 보았고 상상했던 모든 달걀들, 모든 동물들, 그리고 정말이지 모든 대상들은, 내가 그것들을 내 경험의 모든 장(또는 영역)들 안에서 경계지어진 분할될 수 없는 단일한 대상들로 격리시켰다는 그런 일면에서는, 같은 것들이다. 이들 경우들에서, 구상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서 처럼, 같음 또는 차이를 확립시키는 기준들은 판단하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주체가 창조하고 선택한, <경험자와 독립된 세계의 속성으로 여길 수 없는>, 기준들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RC를 이해하려면, 경험 세계에 규칙성들과 불변성들을 생기게 하는 주체의 능동적 조작하기를 알아차려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규칙성과 영구성은 반복된 경험들을 전제하고 있으며, 반복은 오로지 '같다'라는 판단을 낳는 비교에 기초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 하지만, 같음은, 우리가 보았듯이, 언제나 상대적이다: 대상들, 그리고 일반 경험들은, 비교 검토된 속성 또는 성분들과 관련해서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테면, 요소들 a, b, 그리고 c로 구성된 어떤 경험은 a, b, c, 그리고 x로 구성된 경험과, x가 고려되고 있지 않는 한,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실은, 동화의 원리다. 속성, 또는 성분들, a, b만으로 우연히 c라는 물질을 찾아내는 맥락에서, a, b, 그리고 c를 포함하는 모든 대상들은 같은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와 같은 대상들은, 정말이지, 마찬가지로 a, b, 그리고 c를 포함하고 있는 그밖에 다른 대상들과, 비교되는 가운데 그외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 한, 차별지을 수는 없다. 한편, 어떤 대상이, a, b, 그리고 c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앞서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a-b-c 대상들에 기대했던 행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면, 그 상황은 변한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그 행동은 그밖에 다른 속성 또는 성분들에 대한 검토를 야기시킬 수 있는 불안/동요(또는 요동/섭동)의 원인이 된다. 그럴 경우, 그것은 이제까지 어느 정도는 무시되었던 요소 x를 바탕으로 삼아 그 요동하는 대상<즉, 이전의 대상으로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그 대상>을 차별짓는 쪽으로 길을 열어간다. 우리는, 그때, 행위 scheme들과 삐아제의 인지 발달 분석의 골격을 다루는 삐아제 이론이라는 배의 주 돛대를 앞쪽에서 버텨가고 있는, 조정의 원리에 대한 사례 하나를 갖게 된다. 이곳에서 내가 그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원리에도 또한 개념 "맞아들어감"이 편입되고 있는 까닭은, 어떤 대상이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실재" 속에 있는 또는 "객관적" 관점에서 무엇과 같을 수 있는가를 문제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대상이 그 대상에 대해 기대되었던 방식으로 실연 또는 행동하고 있는지 아닌지, 즉 그것이 들어맞고 있는지 아닌지다.

반복이 그러한 비교들을 바탕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라면,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같은 것들은 모든 종류의 규칙성들을 위해 보유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복을 수반하는 모든 개념들은, 구체적 관점에, 즉 무엇이 고려되고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 같음이 요구되고 있는지에 의존하고 있다. 경험 세계의 가공되지 않는 날 소재가 충분히 풍요롭다는 바를 전제로 한다면, 동화시키고 있는 의식은 혼돈의 세계 속에서조차 규칙성들과 순서 또는 질서를 구성할 수 있다. 성공할 범위와 한도는, 이른바 "실재"에 주어져 있을 수 있는 어떤 것보다는 목표들과 앞서-구성된 출발점들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우리 경험<이것은 언제나 우리가 선택한 목표에 따라 결정된다>에서, 우리는 우리가 부딪히는 장애들을 우리가 조작하는 방식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신화적 실재에 속하는 것으로 항상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적으로 벽돌들로만 쌓고 있는 벽돌공이 머지않아 이를 수 밖에 없는 결론은, 문이나 창을 만들기 위해 터진 곳이 있어야 할 곳이면 어디서든 그는 윗벽을 지탱하기 위해 둥글게 아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벽돌공이 그때 절대적 세계에 대한 법칙 하나를 발견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칸트<그가 모든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이어야 한다고 믿었을 때>처럼 아주 똑같은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가 쌓아올리는 블록들로 고르는 것이, 벽돌들이든 유클리드의 요소들이든, 그 무엇이든, 그것들은 한계를 짓는 제한들을 결정짓고 있다. 우리는 이들 제한들을, 벽돌을 쌓는 경우라면 벽돌 조망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다루는 경우라면 유클리드적 조망에서, "내부"로부터 경험한다. 그러나, 그 세계의 제한들, 우리의 모험에 찬 담큰 기획들이 충돌하는 그것들을, 우리는 결단코 볼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고, 인지하며, 알게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들이 쌓아가는 블록들로 구축되며, 우리가 그것을 쌓는 방식과 수단들에 입각하는 것 이외에 그밖에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요약

언어는 우리가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 표현 또는 제시하도록 가차없이 몰아붙인다. 이 논문의 세 절들은, 그래서, 차례대로 읽히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그러한 불가피한 연접이 반드시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하나의 질서로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절들 각각에 담긴 것들은, 구성주의 사상에서는 그밖에 다른 원리를 품고 있는 주제들과 아주 밀접하게 서로 엮여져 있어서, 따로따로 제시될 경우, 연습 문제에 불과한 것들로 보일 것이기에, 독립적 주제들로 단지 아주 대체적으로만 요약되었다. 내가 여기다 제시했던 논증들은, 따로따로라면, 분명 세계에 관한 새로운 생각하기 방식을 창조할 수 없다; 논증들로 조금이나마 그것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들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서로 관계시켜 짠 구조를 통해서 일 것이다.

개념 분석은, 한편으로는, 의식이 어떻게 조성 또는 야기되든 의식은 반복, 불변성, 그리고 규칙성들을 오로지 비교의 결과로서만 "알"7) 수 있을 뿐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항상 적절한 비교에 앞서 반드시 하나의 판정<비교되어야 하는 두 경험들을 하나이자 똑같은 것의 출현으로 간주하든가 아니면 별개의 두 대상들로 간주하든가 하는 판정>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판정들은 "실존하는" 나눌 수 없는 단위 대상들로 범주화되어야 할 것들과 이것들 사이에 놓인 관계들로 범주화되어야 할 것들을 결정짓는다. 이들 결정짓기들을 거쳐, 경험하는 의식은 자신의 경험 흐름 속에 구조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란 바로 의식 있는 인지적 유기체들이 "실재"로 경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경험자 자신의 창조적 활동에 대한 그의 알아차림이 없이 그러한 실재가 창조된 이후에는, 그 실재는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세계가 부여한 것으로, 또는 부여한 것처럼,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회의론자들은 피론 이래로 이러한 견해에 이바지해 왔고, 우리 시대 이론 물리학자들은 그들 자신들의 용어들로 이러한 견해에 접근하고 있다(그들은 그들이 과연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있는지, 또는 오히려 미리 구상된 가설에 자연이 맞아떨어지도록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정교하게 준비한 실험 관찰들은 아닌지, 더더욱 자주 물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지만, 아주 깊숙한 믿음 속에,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로 남아, (일상의 그리고 과학적) 지식이 그 어떤 알기 주체와도 독립된 것으로 가정된 "실재하는" 세계의 "진짜" 그림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한, 우리가 그러한 도그마를 고수하는 한, 회의론자는 그와 같은 "진짜 또는 참" 지식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그의 논증들을 끌어다댈 것이기에 비관론자이자 남의 흥이나 깨는 자로 보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실재론자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론자로 남아, 그러한 회의론자의 논증들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에 간단히 무시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가, 그렇지만, 그러한 논증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그 실재론자는 주관적 관념론의 어떤 형식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한 퇴각은 불가피하게 유아론으로, 즉, 그 주체의 구상하고 있는 마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세계도 실존치 않는다는 믿음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그 상황은 회의론적 논증들의 흠잡을 바 없는 논리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 세계가 우리 자신들이 우리 방식 속에 고의로 배치하는 것이 아닌 장애들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확신하며, 그러한 확신을 경험으로 계속해서 얻고 있다. 그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그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지식 이론들의 바로 최초 단계들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들 초기 단계들 가운데는, 물론, 지식과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정의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RC가 전통적 인식론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는 지점이다. 일단, 알기을 더 이상 존재론적 실재에 대한 아이콘 같은 표상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들어맞는 행동하기와 생각하기 방식들을 탐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전통적 문제들은 사라져버린다. 지식은 이제 유기체가 반복 가능한 경험들과 그들 사이에 상대적으로 믿을 만한 관계들을 확립시켜 그러한 형체없는 경험의 흐름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가운데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와 같은 질서를 구성할 가능성들은 구성하는 가운데 앞선 단계들로 인해 결정지어지며 영구히 제한받는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실재하는" 세계는 전적으로 우리의 구성들이 무너져 내리는 그 곳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무너져 내리는 바들을 오로지 실패하고 있는 구조들을 만드는 데 썼던 바로 그 개념들로만 기술하고 설명할 수 있기에, 이러한 과정은 그 구조들의 실패에 대한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그 어떤 세계에 대한 그림을 결단코 낳을 수는 없다.       

이러한 바가 충분히 이해될 경우, RC가 그 어떤 절대적 실재에 대한 그림 또는 기술로서 해석되어서는 안되며, 자신들의 경험에 바탕해서 자신들을 위해 어느 정도 믿을 만한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인지적 유기체들 속 알기와 지식 획득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모델로서 해석되어야 함은 명백해질 것이다.                                   

 


                 각 주

* Die erfundene Wirklichkeit. (P. Watzlawick (Ed.), Munich: Piper, 1981)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The invented reality.( P. Watzlawick (Ed.), New York: Norton, 1984)에 있는 저자 자신의 번역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임.

1  isomorphism: 수학에서, A a B 사상에서, 원소 사이의 관계가 보존되고 있을 때, A와 B는 isomorphism하다.

2  viable: 새로운 환경에 맞닥뜨려서‘살아 커나갈 수 있는' 의미로, '생장'이라는 한자어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 않고, 줄임말도 그렇고, 그냥 요즘 흐름대로, 발음대로 '바이어블', '바이어빌러티(viability)'로 그냥 쓰는 것도 괜챦아 보인다.

3  fitness: 건강; 개체군이 다음 세대들에서도 자신의 숫자를 유지하거나 증가시키는 능력; 이 영어 단어는 표면적으로는 건강을 지시하지만, 그 건강이란 개체가 자신이 살아온 이력과 그로 얻은 조건들과 속성들로 결정된 환경에 “fit 들어맞다”는 것임을 뜻하고자 사용한 것이다.

4  cognizing entity는 “인지 또는 알기 주체”에 대한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용어 ‘주체’가 상당히 복잡한 개념을 지시할 수도 있기에, entity, 즉 단순히 구별된 그 어떤 item 하나를 가리킬 뿐이라는 뜻에서 “것”으로 옮긴다. 인공 지능에서 쓰이는 ‘agent’와, 형이상학에서 ‘철학적 나’에 상응하는 것이다.   

5  “external” reality에 상반되는 개념으로 퍼트남의 “internal reality”는 “내재적 실재”로 옮겨지고 있다.

6  group: 요소들이 맺는 가장 단순한 구조를 가리키고 있다. 수학의 “군 구조”를 참조하시오.

7  “알다”는 ‘알아보다’, 그리고 ‘알아차리다’를 포함하며, 이 과정에 개입되고 있는 것을 통상 ‘의식’이라 말한다.

 


                미 주

[i]  Kathleen Freeman(1948). Ancilla to the Pre-Socratic Philosophers.Cambridge, Mass.: Havard University Press (p.40). 이것은  Diels의 작업과 관련된 번역이며, 그는 “추론하다”와 “추측” 이외에도 “(자물쇠를) 풀다”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enschliessen을 쓰고 있다 -- 그래서 열쇠 역할을 하는 주된 은유로 사용했다.

[ii]  Sivio Ceccato (1964/1966). Un Tecnico fri I Filosofi, Vol. 1 & 2. Mantua: Marsilio.

[iii]  Hilary putnam (1980). Reason, Truth, and History. Cambridge, MA: Havard University Press. 1982.

[iv]  Helmut Spinner (1977). Am Anfang, der Erkenntnis steht die Wahrheitsfrage. Ihre Einfurung macht das menschiche Erkennen zu einem Wissensproblem. (알기는, 처음에는, 사실의 문제다. 그것을 내보이는 것은 그 인간 알기를 지식의 문제로 만든다.) Begrundung, Kritik und Rationalitat Vol. 1. Braunscheig: Vieweg

[v]  Immanuel Kant (1783). Prolegomena zu jeder Kunfitigen Metaphisik(미래의 저마다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문). Kant 전집, Vol. IV. Konigliche Preussische Akademic der Wissenschaften, Berlin, 1911 (p.294).

[vi]  Spinner (1977)는 아직도 만연한 그러한 관념을 공격했던 사상가들과 그들의 논증들에 대한 탁월한 조사를 통해 폭넓은 이해를 제공하며, 인습적 인식론이 전반적으로 파산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vii]  C.F. von Weizsaecker는, Bremen에서 열린 심포지엄(1979) 동안, 독일의 인식론 문헌들에서 “들어맞음”은 “능숙한 또는 대담한”이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tuchig”로 자주 번역되고 있으며, 그렇게에 “최고” 또는 “가장 강한”이라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viii]  Jacob von Uexkuel은, 예를 들면, 그의 Steifzuge durch die Umwelten von Tieren und Menschen(동물과 인간의 환경을 두루 둘러보기) (George Kriszat와 공저, 1933; repreinted 1970, Frankfurt am Main: Fischer)에서, 생명 유기체들 각각은, 그 자신의 속성들로 인해, 개체 환경을 결정짓고 있음을 아주 간결 세련되게 보여주고 있다. 오로지 세계를 경험하지 않지만 그 세계를 어떤 조건을 깔지도 않고 즉시 아는 (사람들의 의견이나 행동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립된,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만이, “객관적”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인간 개념들을 적응으로 산출된 것들로 설명하려는, 그러나, 또한 그것들을 존재론적 실재의 측면들로 간주하려는, 시도들은, 이를테면 Lorenz와 같은 경우, 논리적 충돌, 또는 모순으로 귀착된다. (cf. Konrad Lorenz, 1941, Kant’s Lehre vom Apriorischen im Lichte gegenwaertiger Biologie, Blatter fur deutsche Philosophie, 15, 94-125).     

[ix]  Gregory Bateson (1967). Cybernetic Explanation. American Behaviororist. 10 (8), 29-32.

[x]  Warren S. McCulloch (1965). Embodiment of Mind. Cambridge, Mass.: M.I.T. Press (p.154).        

[xi]  Jean Piaget (1937). La construction du reel chez l’enfant. Neuchatel: Delachaux et Niestle (p.311).

[xii]  Donald T. Campbell (1974). Evolutionary Epistemology. In P.A. Schilpp (Ed) The Philosophy of Karl Popper. La salle, III.: Open Court (p.449).

[xiii]  Cf. the critical review of Peter Skagestad (1978), Taking Evolution Seriously: Critical Comments on D.T. Campbell’s Evolutionary Epistemology. The Monist, 61 (4), 611-621.

[xiv]  Freeman (note 1), (p.33).

[xv]  Humberto Maturana (1970). Biology of Cognition (Report 9.0). Urbana, III.: Biological Computer Laboratory (p.2).

[xvi]  Sextus Empricus (ca. 200 A.D.) Outlines od Pyrrhonism (Translation, R.G. Bury) London: Heinemann, 1967 (p.57, 94-95).

[xvii]  Cf. John Richard and Ernst von Glasersfeld (1979). The Control of Perception and the Construction of Reality. Dialectica, 33(1), 37-58.  

[xviii]  Kant (1783), p.295.

[xix]  Giambattista Vico (1710). De antiquissima Italorum sapientia. Naples: Stamperia de’ Classici Latini, 1858. (Chapter I, 1:5-6)

[xx]  Ibidem, Chapter I, 3:2.

[xxi]  George Berkeley (1710).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La Salle, Illinois: Open Court, 1963, p.32. Berkeley의 Treatise와 Vico의 De antiquissima는 동시에 출판되었고, 어떻게 보면, 대단히 유사하지만, 두 저자는 서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Naples에서 만났을지도 모르며, 그들이 했을 수밖에 없었던,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토론들에 관한 기록은, 내 알기로, 전혀 없다.   

[xxii]  Vico (1710), Chapter VII, 3:5.  

[xxiii]  Kant (1783), p.295.

[xxiv]  Immanuel Kant (1787) Kritik der reinen Vernunft, 2nd Edition. Werke, Vol. III, p.27.

[xxv]  Vico (1710), Chapter III, 1:2.

[xxvi]  Ibid 1:3. 개인 구성물들에 대한 심리학의 창시자인 George Kelly는, 독자적으로,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생명 피조물한테, 따라서, 우주는 실재하지만, 그가 우주를 그리 해석하는 것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우주란 여겼던 그대로 변치 않는 것은 아니다.” A theory of Personality (1963). New York: (p.8).   

[xxvii]  Cf. Lionel Rubinoff (1976). Vico ana Verification of Historical Interpretation. In G. Tagliocozzo, M. Mooney, & D.P. Verene (Eds) Vico and Contemporary Thought. Atlantic Highlands: Humanities Press.

[xxviii]  Cf. Wolfe Mays (1953). The Epistemology of Professor Piaget. Minute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London (Dec. 7, 1953; p.54-55)

[xxix]  David Hume (1750), An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New York: Washington Square Press (p.47).

[xxx]  Piaget (1937).

[xxxi]  Ernst von Glasersfeld (1979). Cybernetics, experience, and concept of self. This volume, Chapter ??.

 

원문 링크:

https://www.vonglasersfeld.com/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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