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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1995) 제 2장 인기 없는 철학적 관념들: 인용들로 짠 역사

   제 2장 
                                                                                                                            
    인기 없는 철학적 관념들: 인용들로 짠 역사  
                                                                                                                            


1장에서, 양육, 이곳저곳 살기, 출중한 사람들 만나기, 그리고 취사선택된 독서와 같은 나의 자전적 여건이 어떻게 나를 비인습적(非因襲的) 생각하기 방식으로 이끌었는지 상술했다. 그렇지만, RC 형성 관념들에는 새로운 게 없다. 단 하나, 그것들이 서로 협력해 형이상학적 치장(潤色)과 절연했던 방식은 새로운 것일 수 있다. 
    나는 버트란트 러셀의 정의에 동의한다: 

형이상학, <사유로 세상을 통째로 구상하려는 시도>의 발전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한편으론 신비주의로 몰아가고 다른 한편으론 과학으로 몰아가는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인간 충동의 융합과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 철학자였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과학과 신비주의 모두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그들 삶이 되었고, 극도의 불확실성을 타개하고자, 그들 몇몇한테는 철학을 언제나 과학이나 종교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업(課業)이 되었다. (Russel, 1917/1986, p.20) 

    하지만, 그러한 융합 시도가 합리적인(rational) 작업이 되리라는 점엔 동의하지 않는다. 나한테, 진정 신비한 것은 이성(reason)으로 파악(把握)될 수는 없다. 이는 가치에 대한 부정도 판단도 아닌, 그저, 신비란 이성이라는 자르기 도구 아래 쇄락하고 있는 닫힌 지혜 영역이라는 확신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성의 목적(存在-理由)은 분석이다. 이성이 다루는 건 무엇이든 명백한 차이들에 입각해 기술(記述)되는, 따라서, 것(entity)과 관계(relation)들로 표현되어야 한다. 신비가 다루는 세상은, 그 어떤 배경에서 여하한 분화도 요청하지 않는 통째로서 세상이다. 신비적 표현들에서 부분들이 [혹은, ‘온’을 붙인 것들이] 언급될 때, 그러한 은유들로 발생시키고자 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공감이다.  
    RC는 실재하는 세상을 기술하려는 형이상학이 아닌 합리적 알기 모델로 의도된 것이다. 내가, 이성의 활동 범위를 제한코자 하는 RC의 노력을, RC의 미덕들 가운데 하나라 믿는 건, 이러한 제한으로 <신비주의의 지혜 권역(權域)을 명상>할 필요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여기 제시하는 역사는 이러한 분리를 정당화 하고자 하는 시도다. 어떤 점에서는 완전치 않을 것이다. 일부는, 나한테 없어선 안 될 이들로 보였던 저자들만을 (그리고 특정 지점들에 대한 강조로 언급된 이들만을) 인용하고 있기에; 일부는, 내가 논할 만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관련된 것들을 언급했던 (이를테면, 콜링우드, 듀이, 그리고 퍼어스와 같은) 저자들이 있기에 불완전할 것이다. 


        의문시 된 객관성

철학적 전통에서 한 발 벗어나, 실재 세상에 대한 참된 재현(表象)에 이르려는 환상적(幻想的) 목표에 의문을 품는다면, 이러한 방향에서 진전을 보았던 상당수 사상가들이 발견될 수 있다. 이들 대다수는, 그렇지만, 심각한 곤란에 빠졌다. 실재에 관한 확실한 지식 추구를 단념함으로써 그들은 바로 철학에서 지식을 단순한 의견이나 신념에서 구별해내는 논증까지 던져버렸다. 그 결과, 이들 괴팍한 사상가들은 철학의 역사에서 극도로 무시되었으며, 기껏해야 기인들로 치부되었다. 전통적 생각(思惟)하기 방식은 너무나 견고했기에 (아직도 견고하기에) 직접적 대안 제시 없는 비판으로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난 100년 간,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내내, 과학은 그러한 실재하는 세상의 신비를 차츰차츰 벗겨낸 상식의 정교한 연장(延長)으로 간주되었다. 기술(技術)의 성공은 실재론적 인식론에 대한 의심할 바 없는 확증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때, 과학적 설명의 재현적 특성에 대해 내부로부터 의심을 야기시켰던 (특히, 이론 물리학에서) 대대적인 과학적 발전이 도래했다. 과학은 그 세상 자체의 특성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가? 내가 앞 장에서 인용한 하이젠베르크 구절이 주장하는 건, 과학자는 보기와 생각하기의 인간적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객관성은 의심스런 것이 되었다. 야콥 브로노프스키는, 인생 막바지에, 변화된 상황을 묘사했다: 

과학 개념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건, 그것이 자연 현상들에 대한 우리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그 순간 그저 우리한테 다가올 세상의 그 일부를 가리우는 일시적 발명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Bronowski, 1978, p.96) 

    오늘날 과학철학에서까지, 실재론의 천년 전통과 그것의 목표인 객관적 지식을 전복(顚覆)시키는 아이디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격변에 직면하여, 확립된 인식론과 다른 시각(見解)의 역사를 검토하는 것은 적법하며 적절하달 수 있다. 
    나한테, 이러한 검토는 특별한 관심거리다. 구성주의의 허다한 개척자들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내 희망 때문이 아니라, 체제로서 확립된 시각에 맞섰던 사상가들의 기록은 알기 문제에 대한 근본적으로 상이한 접근 필요성을 확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학파들

서양 철학 시초부터 무시될 수 없었던 한 무리의 이단자들이 있었다. 그들 논증은 논리로는 반박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회의론자’였고, 그 최초 학파는 기원전 4세기 말엽 피론이 조직했다. 그 가르침은 5백년이 지나서야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모아 주석을 달았다. 
    회의론자들이 인간 감지들[sense: 보고, 듣고, 맡고, 맛보는, 등등의 인간의 감각 깜냥들을 가리키며, 이 깜냥들의 산물들(데이타, 인상, 지각, 등등)을 이 단어 뒤에 연이어 붙여 표기한다. 또한 이를 감관(感官)으로 이해하거나 표기하는 경우, 어디선가, 어긋날 수 있음에 주의하라]들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음을 증명해 보이는 무수한 사례를 수집했던 이유는, 그것들에 기초한 지각과 판단은 전후 맥락과 인간들의 태도에 영향을 받기에 실재하는 세상에 대한 참된 그림(像)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신뢰할 수 없음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찬물에 담근 손을 미지근한 물에 담그면 뜨겁다; 뜨거운 물에서 미지근한 물로 옮기면 차갑다; 따라서 물의 진짜(true) 온도는 결정될 수 없다 – 우리의 판단은 우리의 경험 맥락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real) 세상에 대한 참된(true) 지식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는 신념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했던 사람은 피론보다 약 200년 앞서 살았던 크세노파네스였다:  

그 누구도 [창조주나 그 세상에 관한] 확실한 진리에 다다른 적도, 다다를 수도 없다; 무엇이 참인지 말하기에 충분히 성공했을지라도, 그 자신 그것이 그러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Xenophanes, Fragment 34) 

    이러한 진술의 골자는 여러 세기를 거치며 허다한 형식들로 불쑥불쑥 나타났다. 이러한 골자는 척하는 거짓 논증으로 끊임없이 공격받았다. <확실한 지식이 있을 수 있다>를 부정하는 경우, 그 부정, < ... 없다> 또한 확실한 것일 수 없다는 식의 논증이다. 이러한 논증이 사기(詐欺)인 건, 그 세상에 관한 확실한 지식의 영역과 논리학, 수학 영역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세노파네스가 2 + 2 = 4의 확실성 인정에 전혀 주저함이 없었으리라 보는 건, 세는 행위를 통제하는 규칙과 고정된 잇달은 수 단어들에 관해 동의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두 쌍의 아이템을 잇달아 셀 경우 ‘넷’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실성이 보여주는 것은, 고안되어 합의된 <수(數) 세는 체계>에 관한 것이지, 수학에 대해 창조주가 부리는 재간(才幹)이나 세는 주체와 독립된 것으로 여겨진 수의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실, 크세노파네스의 통찰력에 깔린 추리에 수반되고 있는 것은 생각하기 논리지 구체적 경험이 아니다. 그 세상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장하려면, 지각과 착상들로 구성한 그림(像)이 모든 측면에서 진짜 있는 그대로 그 세상의 참된 재현(表象)임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수한 판박이라는 걸 확실시 하려면, 그 재현(表象)을 재현(表象)하고자 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가능한 일이 아닌 건, 당신은 지각하고 구상(着想)하는 인간 방식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약 100년 후, 기원전 5세기 최초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는 이를 유명한 구절로 정식화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Protagoras in Guthrie, 1971, p.171)

    오늘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세계관은 필히 인간의 시각일 수밖에 없다[말인즉, 세상에 대한 여하한 사람의 시각(見解)도 (동물도, 기계도, 신도 아닌) 필히 인간의 시각이다]. 그 어떤 신비한 직접적 계시 형식을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지식이라 부르는 것 - 아이디어나 개념, 이들을 연결하는 관계, 당신 자신과 세상에 대한 당신 이미지 - 모두 인간의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신이 그것을 만들어냈던 방식이 당신 것이며, 그것이 맘에 들든 안 들든, 당신은 그러한 인간 방식들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서양 세계의 위대한 철학자 모두 이러한 논증이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능함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우회하는 방식을 찾으려 분투했다. 형이상학의 가면을 쓰고 이런 저런 형식으로, 공공연히 또는 은밀히, 신비주의나 종교적 계시로 도망쳤다. 
    플라톤은 지식 개념이 갖는 역설적 특성을 분명 알아차렸고 이를 네 부분으로 나뉜 일련의 은유로 제거코자 했다(The Republic, 509d–517b). 처음 두 분절은 감지(sense)들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지각에서 얻어지는 사물의 형상들, 상상과 추측으로 만들어지는 그림자 이미지들. 이것들은 진짜, 말인즉, 실재하는 사물들이 아니기에, 그는 이를 그 유명한 동굴의 우화로 설명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확실한 지식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억견’[doxa: 통념에 따라 짐작이나 상상으로 하는 생각]만 존재한다. 세 번째 절은, 수학과 같은 사유의 산출물에 대한 이해(episteme:정당화 가능한 참된 믿음)를 주장하고 있다. 넷째 절에, 영구 불멸의 관념들, 미(美), 정의(正義), 그리고 선(善)을 언급하며, 그것들은 신의 우주 창조 이래 인간 개개인의 유산이 된 것들로, 바로 여기서 참된 지혜가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일련의 은유가 암시하는 것은, 누구든 인간 이성의 권능으로 동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신성한 진리(Truth)를 보는 데 이를 수 있다는 바와 같은, 발달 가능성이었다. 

  
        신학적 통찰력들

이성의 권능에 대한 그러한 믿음은 여하한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회의론자들 말고도 초기 기독교 신앙인들도 보았다. 3세기 비잔틴에서 나타난 한 신학 유파는, 그 후 ‘양부음술(陽否陰述: apophatic)’ 또는 ‘네거티브(不定)’ 신학으로 알려졌다. 그 유파는 강력한 원리를 정식화했다: 

신(God)의 절대적 초월성은 그를 그 어떤 인간 개념과도 동일시할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 … 왜냐? 신이 무엇인지는 여하한 인간의 말 또는 생각으로도 납득(納得)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Meyendorff, 1974, p.11)

    간략히 말해: 신이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다면, 그때 신은 우리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그 모든 것과는 다르다; 아울러 우리 개념은 생활 경험에서 얻어지기에, 그러한 개념으로 신적 특성을 포착할 수는 없다. 
    비잔틴 신학자들은, 물론, 계시(啓示)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계시를 합리적 지식으로 혼동하지 말아야 함을 아주 분명히 했다. 교회, 창조주의 방식과 그 의지에 대한 특권적 해석자라 항상 주장했던 교회는 이러한 종류의 신학을 인정하지 않았고 나아가 이단으로 공포했다. 그래도 그것은 살아남았고, 그 메아리는 중세 신비주의 저작들에서 불쑥불쑥 나타난다. 
    그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이는 9세기 초에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던 아일랜드 학자, 존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다. 수사로서, 그는 주로 신학에 몰두하여, 비잔틴 신부들의 ‘네거티브’ 방향을 따랐음에도, 그의 지식 이론은 보다 넓은 지평을 확보했다. 그는 이성 그 자체에,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지식의 종류에 흥미를 느꼈다. 그가 얼마나 근대적이었는지 보이는 데에는 인용문 두 개로 충분하다. 첫째 인용문은, 칸트가 (내 믿기로, 완전 독자적으로) 그의 순수 이성 비판 (1787) 서문에서 정식화한 통찰력에 대한 불가사의한 예지(豫知)에 해당된다: 

현명한 예술가가 자신한테서 작품을 만들어 자신한테 내어 그걸로 자신이 만들 사물을 예상하는 것처럼 … 마음(知性)도 자신한테서 이성을 만들어 자신한테 내고, 그걸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모든 것을 앞서-알고 인과적으로 앞서-창조한다. (Eriugena, Periphyseon, Vol.2, 577a–b)   

    에리우게나의 둘째 인용구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있다)의 전조(前兆)이지만, 자신의 실존 확립이 세상에 관한 확실한 지식에 다다르기 위한 기초 역할을 할 거라는 헛된 희망을 북돋지는 않는다: 

사람은, 신처럼, 자신이 있음을 완전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자신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자신의 본성을 획정(劃定)지을 수는 없다. (Kearney, 1985, p.97에서 인용) 

    비잔틴 사상가들이 인간 개념으로는 창조주의 본질적 특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단언했을 때, 그들은 신학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개념은 우리 경험에 기초해 형성된다는, 따라서 우리 경험 장(場) 밖에 놓인 것을 기술하는 데는 사용될 수 없다>는 논증은, ‘초인적인 것(superhuman entity)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事物)들 너머 우리가 단정(斷定)한 그 어떤 ‘실재’에도 적용된다. 에리우게나가 이때 강조했던 것은, <이성은 그 자신의 규칙에 따라 작동하지만 그것을 초월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래, 칸트를 보라). 


        근대 과학, 그 균열을 넓히다

그렇게, 천 년이나 앞서, 두 가지 상이한 종류의 지식이 있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그 구분은 플라톤이 제안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플라톤한테, 감각 경험은 ‘억견(通念)’으로, 이성은 ‘확실한 지식’으로 이끈다. 이제, 우리는 명백하나 틀릴 수 있는 경험 지식과 불멸의 신비적 계시 진리들을 갖고 있다. 
    지식 개념에 균열이 있었지만 중세 내내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M cmullin, 1988, p.31을 보라). 그 균열은, 르네상스에 이르러,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가 교회 가르침에 직접 반하는 행성 운행 시스템 모델을 발표했을 때, 화제로 떠올랐다. 그 격돌의 뇌관을 제거하려 했던 현인들로는, 코페르니쿠스 사후 저작 편집자, 오시앤더, 그리고 갈릴레이에 대한 이단 판결 회피를 도왔던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있다. 그들이 말한 바,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현상에 대한 그럴싸한 모델 제공에 그리고 예측 계산에 사용하고 있는 한, 이단을 범하고 있지 않다. 신의 세상은 교회와 교리가 주관할 영역이기 때문에, 과학자는 자신이 신의 세상의 실재성을 묘사, 기술하고 있다는 주장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과학 지식은 도구로, 틀릴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반면, 계시라는 신비적 지혜는 의문시될 수 없으며 자체로 종결된 것이다>라는 최초의 분명한 단언이었다. 
    갈릴레이가 공식적으로 철회는 했지만, 이러한 분할을 용납할 맘이 그한테는 전혀 없었다. 그는 <과학적 이론은 실재하는 세상을 기술할 수 있다>는 생각(思想)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분할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기이한 부조화다. 갈릴레이는 근대 과학의 창시자로 유명하며, 그의 방법은 정말 엄청 성공적이었다. 그 방법이란 이상적 법칙에 따라 그 행동이 통제되는 이상적 물체를 고안하는 절차로 특징 지워진다. 이어, 이들 발명된 관념들을 써서 경험된 아이템(項)들의 관찰된 행동을 설명하는 데, 이때, 경험된 아이템들이 이상법칙에 따르는 걸 방해하는 교란들이 감안된다. 이를테면, 그의 ‘자유낙하’ 법칙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그 무게와 상관없이 등가속도로 낙하한다. 갈릴레이는 정확히 그 법칙이 뭘 말하는지 경험해볼 수도, 실험으로 입증할 수도 없었지만 - 피사 사탑 도움 없이 - 그 법칙을 정식화했다. 그럼에도, 마찰과 공기저항 같은 요인들을 나타내는 항들이 그 이상법칙에 추가될 경우, 그 계산은 굉장히 많은 실제 상황들에 대단히 유용했다. 
    갈릴레이의 유명한 제자, 토리첼리는 이를 아주 분명히 표현했다:

운동(de motu) 학설 원리들의 진위(眞僞)는 나한테 별로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참(眞)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참인 것처럼 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한 다음, 그것들에서 끌어낸 여타 모든 추정(推定)들을 기하학적이자, 혼합되지(경험적(實驗觀察的)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 이리 된다면, 갈릴레오와 내가 말했던 모든 게 그리 될 것이다. 그때, 쇠나 납 또는 돌로 된 공의 운동이 우리의 계산과 안 맞고, 원리들과 너무 심하게 어긋난다면,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Belloni, 1975, p.30)
 
    이 인용구는, 오늘날 과학철학에 활기를 주는 토론에, 과학과 그 이론들의 객관성이 다양한 입장들에서 쟁점이 되는 토론에 잘 들어맞는다. 구성론 관점에서, 양자론(量子論) 발명 훨씬 이전, 갈릴레이가 초반에 ‘자연의 책은 수학 언어로 쓰여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믿지 않고, <수학이란 자연에 대한 인간 경험을 정리, 관리함에 있어 쾌나 말끔한 인간 방식이라는 생각>으로 더 기울었던 위대한 과학자들이 있었다는 발견은, 물론, 고무적인 일이다.
    물리학 법칙을 경험 장의 당혹스런 문제들에 적용, 이루어낸 광범위한 성공은, 곧바로, 과학 지식이 신비를 제물로 삼아 권위를 얻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와 달리, 철학자들은 실용적 성공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2000년 전통에 따르며 운명처럼, 그들은 절대적 진리에 몰두했다. 여하튼, 과학적 이론들은 끝없이 변하고 있었고, 실험에 따른 확증들로도, 현상(現象)의 실재성을 거부하는 회의론자의 논변을 단연코 가라앉힐 수 없었다. 철학자들한테 필요한 영원불멸의 진리란, 과학이 제기한 문제를 포함해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진리에 대한 파악 방식은 종교적 신앙 혹은 신비적 믿음이란 걸, 그들은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울러, 그들은 신(God) 없이 견디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신은 인간 이성으로 조작되어야 했다.


        데카르트의 실패와 성취

데카르트가 확실한 지식 탐색에 대한 비타협적 추구를 결심한 건, 당대인들 상당수가 재발견된 피론학파의 가르침을 종교적 신념에 적용하자, 격심한 불안을 느껴서다. 모든 관념 의심하기로, 그가 바란 건, 의심 불가능한 관념들의 분리였다. 발견한 건 단 하나: 의심할 수 없는 것은 의심스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였다. 그러나 이러한 확실성을 써서 의심 불가능한 다른 관념들을 구성하려 했을 때 실패한 채, 신덕송(信德頌)에 의지해야 했다. 그의 고백: ‘신은 사기꾼이 아니시기에, 신이 우리한테 주신 지적 재능에 오류란 있을 수 없다’ (Popkin, 1979, p.177). 
    데카르트의 의심 방법은 회의론을 무너뜨리기는커녕 그 가치를 더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보여준 여타 많은 것들을 성취했다. 그 중 하나는, 기하학(geometry)을 대수학(algebra)으로 변환하는 독창적 방식, 해석 기하학(analytical geometry)의 발명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그가 이것을 어떻게 고안했는지 들었다. 
    이 이야기는 지어낸 거지만 구성론자한테는 직접적 호소력을 지닌 것이다. 23살 되던 해 그는 군에 입대했고, 남부 독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전투가 없던 때라 그는 농가 한 채를 숙사로 할당받았다. 겨울이어서 대부분 시간을 실내에서 더구나, 그가 쓴 바, ‘난로 안에서’ 보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지방 농가를 아는 이라면 신비할 게 없다. 대체로 거실 한쪽 모퉁이에 커다란 타일들을 붙인 난로가 놓이고, 그 주위를 둘러싼 나무 구조물 위에 널판이 올려지고, 그 널판은 기지개를 펼 만큼 넓고 천장에서 2피트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 집에서 가장 따뜻한 곳인데, 그건 파리들도 안다. 파리들은 천장의 그 부분을 거처로 쓴다. 
    이러한 널판에 누워, 데카르트는 천장으로 눈을 돌려 파리들이 노니는 걸 보았다. 수학적 성벽(性癖)이 일자, 그는 파리들의 움직임을 정확히 묘사할 방식을 자신한테 물었고, 천재의 번뜩임이 발했다. 천장과 벽체들이 만나 형성된 선은 2개고, 그 2개의 선은 방구석 끝에서 직각으로 만났다. 한 마리 파리의 위치는, 그 파리를 양쪽 선에 사영(射影)시키기와 구석 끝에서 사영된 각 지점까지 거리들 측정하기로 묘사될 수 있었다. 만약 파리가 곧게 움직였고 그 움직임의 양 끝점에 똑같은 절차를 적용한다면, 파리의 행로를 각각의 축들에 투사된 첫째, 둘째 점들의 거리들로 표현할 수 있다. 
    분명 이와 같은 경험으로, 데카르트는, 확실한 지식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성과 그 가장 완벽한 구현체인 수학에서 비롯되어야 할 거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구성론자한테, 이 이야기는, 참이든 아니든, 수학적 관념들이 감각운동 경험에서 추상될 수 있다는 원리에 대한 멋진 사례이다. 

        잊혀진 로크의 반성 
 
데카르트 다음 세기에, 차례차례, 잉글랜드인 존 로크, 주교였던 아일랜드인 조지 버클리, 그리고 스코틀랜드인 데이비드 흄이 등장했다. 아울러, 이 세 철학자들은 나중에 ‘영국 경험론자들’로 알려졌다. 이러한 명명(命名)은, 모든 심리학 입문서에서 발견되며, 선생과 학생 모두한테, 세 사람은 같은 생각을 위해 싸우는 조화로운 한 팀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이들 삼인조에 대한 묘사가 빈약한 건, 이들 모두 그밖에 철학자들과 달랐던 만큼 각기 앞선 이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건 용어 ‘경험론’에 부여된 척하는 거짓 의미다. 
    경험론자들이 동의하는 건, 지식은 경험에서 비롯되고 그 지식 검사의 기반은 경험이란 점이다. 하지만, 경험이 그 너머 실재 세상과 맺는 관계 방식에서는 현저히 다른 시각들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그럼에도, ‘콧대 센 경험론자’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이 표현으로 전파하려고 한 건, <관찰자와 독립된 실재 세상의 특성이나 상태를 반영(反映)하는 데이터는 실험 증거에서 얻어진다>는 점이다. 이들 영국 경험론자들 모두 이와 같은 소박 실재론자는 아니었다. 
    로크는, 내 아는 한, 인지적 구성주의에서 삐아제 이후 근본적 의미를 지니게 된 용어 ‘반성(reflection)’을 최초로 썼던 인물이다. 그의 설명은 아주 명쾌하지는 않아 상당한 집중이 필요하다: 

모두가 전적으로 그 자신 안에 갖고 있는 관념들의 원천; 그것은, 외부 대상들과는 여하한 관계도 없는 바, 비록 감지(感知)는 아닐지라도, 그것과 매우 비슷해서, 내부 감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내가 또 다른 감각이라 부르는 것처럼, 나는 이 원천을 반성이라 부른다; 이것에서 비롯되는 관념들은 마음이 그 자신의 조작들에 대해 반성하기로써 얻는 것과 꼭 같은 것들이다. 이어 이러한 담론을 따르는 가운데, 반성으로, <나>는, 마음 그 자신의 조작들을 취하는 <알아차림(注意)>라는 뜻으로 이해될 것이고, 그러한 이해하기(悟性) 가운데 이들 조작들에 대한 생각(念)을 산출하는 이성으로, 그것들에 대한 태도(觀)을 취하는 <알아차림(注視)>라는 뜻으로 이해될 것이다. (Locke, 1690, Book II, Chapter I, par.4)
    로크는, 데카르트(그리고 갈릴레이)가 색깔, 맛, 냄새와 같은 감각(이차적 성질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동의한 건,
 
그러한 관념들은 대상들 자체에 정말 실존하는 뭔가를 닮은 것으로서 간주되는 상상물일 뿐 (ibid., Chapter viii, par.25)  

    이라는 점이었다. 반면, ‘일차적’ 성질들,

크기, 모양, 수(數), 상황, 그리고 운동 또는 정지, … 는 실재하는, 본원적인 또는 일차적 성질들이라고 적절히 불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지각되든 않든, 사물들 자체에 있는 것들이기에 그렇다: 이차 성질들은 바로 이들 일차 성질들의 상이한 변형들에 의존한다. (ibid., par.23) 

    그가 설명하지 않은 것은, 그는 왜 일차 성질들을 이차들의 실재성보다 덜 ‘상상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건, 경험론의 창시자가 여기서 플라톤의 관념론과 암묵적으로 결탁해 경험에서 비롯되지 않는 관념들이 있음을 전제(當然視)하고 있다는 점이다. 


        ‘빈 서판’에 대한 과장

<갓난 아기 마음은 ‘빈 서판’으로, 경험만이 거기에 지식을 새긴다>는 슬로건이 횡행했다. 로크도 ‘텅빈 진열장’, ‘하얀 백지장’, 그리고 ‘왁스칠된 서판’ 같은 표현을 썼지만, 마음의 그 자신의 조작들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는 관념들에 관해 말했던 시각에서 보자면, 이들 은유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Fraser, 1959; Vol.1; p.48). 로크 왈, 합리적 생각은 항상 <감각 & 반성>의 결과물이다. 이를 설명하기를, 이를테면, 인과(因果)의 경우: 

… 이른바, 단순 관념들 모음인 물질, 나무는, 불을 대면, 재라 부르는 다른 물질로 변한다; 말인즉, ... 우리가 나무라 부르는 복합 관념과는 전혀 다른, 일단의 단순 관념들로 조성되는 다른 복합 관념으로 바뀐다; 불은, 재와 관계 지어, 원인으로, 그리고 재는 결과로 간주된다. 하여, 특정 단순 관념 또는 일단의 단순 관념들 산출에 작용하거나 기여한 것으로 간주된, 전에는 없었던 그 어떤 것이든, 이와 같이, 우리 마음들에서 원인 관계를 갖게 되고, 그렇게 우리에 의해 명명된다. (ibid., Book II, Chapter xxvi, par.1)
 
    이러한 발생 패턴은 여러 추상 개념들을 얻고자 반복되는데, 이 패턴에 감각이 수반(隨伴)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은, 이 패턴 시작에 일단의 ‘단순 관념들’이 동반(同伴)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패턴에는 감각 말고도 관찰자의 반성하는 마음도 수반된다. 인용구에서, 하나의 모음을 다른 모음 생산에 작용하거나 기여한 것으로 간주하며 이 단순 배열을 인과 관계로 처리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로크 저작 제목에서 주요 단어, ‘이해하기(悟性)’가 문제되는 한, 그가 도해(圖解)한 개념 발생 패턴은 결코 아기의 텅빈 서판 이미지와 충돌하지 않는다 – 그 주장이란 그저 <마음이 조작할 단순 감각 관념들이 있기 전에, 지식 구성은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일 뿐이다. 오로지 그때에 이르러서야 마음은 그 자신의 조작들에서 새로운 복합 관념들을 반성, 추상해낼 수 있다. 일차 성질들을 다룸에 있어 로크의 비일관성을 지적하는 일은 버클리 몫이었다. 
    <로크의 경험론이 모든 지식은 감지(感知)들에서 직접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 주장했다>는 신화가 엄청 강화된 건, 그가 사용한 용어 ‘경험’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로크한테, 경험에는, 감지 관념들 획득하기뿐만 아니라, 그것들 보유하기 그리고 이어 반성과 추상으로 갈고 다듬는 것까지 포함된다 (Fraser, 1959; p.49를 보라).


        버클리에 대한 재해석 하나 

두 번째 영국 경험론자, 조지 버클리는, 18세기가 시작되던 때,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로크의 인간 이해하기(悟性)에 관한 에세이를 읽었다. 그는 노트 한 권을 남겼는데, 그 안에 갖 20살 먹은 철학자가 기록한 건, 이후 새로운 시각 이론을 위한 에세이(1709)와 인간 지식에 관한 논문(1710)에서 발전시켜 상술했던 관념들에 대한 초기 정식화(定式化)가 들어 있다. 거기에는, 또한, 로크에 대해 일치와 불일치를 표시한 많은 항목이 있다. 주요 불일치들 가운데 하나는 ‘일차 성질들’과 실재하는 사물들 사이 관계를 다룬 것이다. 
    일차 성질이 이차 성질보다 관찰자에 덜 의존한다는, 고로, ‘더 참된’ 것들이라는 생각에 대한 버클리의 반대는, 내 믿기로, 그의 이후 저작에서는 결코 더는 선명히 표현되지 않았던 다음 숙고에서 얻어지고 있다. 

연장, 운동, 시간, 각각에는 연접이란 관념이 포함된다 & 이리 보면 그것들은 수학적 숙고에 속하는 것들이다. 연접 & 구별된 지각, wch으로 체현된 수(數) 또한 그 핵심은 연접에 있다; 왜? 즉시 지각된 것들은 마음에 뒤죽박죽 & 섞여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운동은, 연접(連接) & 연장(延長) 없이는 구상될 수 없다 … 부분들로 구성한 것, wch가 뚜렷이 연이어 지각될 수 있는 바와 같은 것 말고는 구상될 수 없다. (Berkeley, 1706, par.460)
  
    표현 ‘수학적 숙고’의 의미는, 인용구 460이 휠씬 앞 구절 111에서 다음 인용구에 뒤이은 연장(extension)에 관한 질문에 답한 것임을 고려할 때, 명확해진다: 

수는 물체들에 있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마음의 숙고에만 의존하는> & <대체로 마음이 좋아하는 정도로 있는> 마음의 창조물이다. (ibid., par.110) 

    버클리는 모든 수학적 사고가 반성과 추상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버클리가, <연접(succession)이란, 감각 대상들의 속성일 수 없고, 그렇기에, 주체 자신의 경험에 대한 주체의 반성으로 추상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수가 아닌, 연장, 운동, 그리고 시간과 같은 개념(concept)들을 야기하는 경우에까지, 그는 그것을 수학적 관념(notion)이라 불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음>을 깨닫는 것이다: <(실재하는 대상들의 속성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차로 간주된 특징들은 최소 2개의 실험관찰적(經驗的) 프레임들의 연접과 이들 관계-짓기로 형성된 개념들에 의존하다>. 이때 연접에서 경험하기 주체가 얻는 건 그저 관계를 확립시킬 기회(機會)뿐이다; 연접에는 여하한 관계도 없다. 아울러, 연접 자체로는 확립될 관계의 종류 또한 결정 못한다. 
     버클리가 일차 성질의 객관성을 분쇄한 것은, <이차 성질들에 쓰인 로크 논증은 일차적인 것들에 적용될 때도 똑같이 효과적이다>는 것 보여주기였다고, 자주 언급된다. 나는 이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도, 나한테 훨씬 더 강력한 논증으로 보였던 건, <연장, 이동, 시간, 그리고 인과성 개념들 형성의 기초적 관계들은 경험들의 단순 연접으로는 제공되지 않는다>는 그의 통찰력이었다. <이들 기초 관계를 형성하는 조각들은 경험하기 주체가 생성시켜야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인간 지식이 인간 경험과 독립한 실재를 나타낼 수 있다>는 신념을 받치는 주된 합리적 기반들은 깨끗이 쓸려나간다. 왜냐? 연장, 운동, 시간, 그리고 인과성이 주체의 반성적 활동에 의존하는 것들이라면, ‘실재’란 경험되기 이전 무엇과 비슷한 것이라고, 인간 용어로는, 묘사, 기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흄의 ‘개념적 관계들에 대한 해체’

실상, 연접 해석이야말로, 세 번째 영국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을 최고의 비타협적 회의론에 다다르게 했던 문제들 가운데 하나다. 그가 용맹정진으로 파헤친 것은, 특정 관계들이 박혀 들어가 있는 방식이었다: 

상이한 관념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건, 정말 명백해, 관찰될 수밖에 없음에도; 어떤 철학자가 연결에 대한 모든 원리를 나열이나 분류하려 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흥미를 둘 만한 주제다. 나한테, 관념들 사이 연결에 대한 원리는 오직 세 개만 보인다: 말인즉, 닮음, 시간이나 장소에서 인접, 그리고 원인이나 결과. (Hume, 1742, Essay III ) 

    그는 이러한 ‘연결들’이 만들어지는 방식의 보기를 들고, 세 개의 ‘원리들’을 한 번 더 열거하며 에세이를 끝내기 전, 말하길: 

철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최소한 의혹이나마 일도록 내가 던진 이 느슨한 힌트들이란,  . . . 여기 설명된 바, 인간 마음의 많은 조작(Operation)들은 관념들의 연결 또는 연합에 좌우되고 있다는 거다. (ibid.)

    에세이 후반부에서, ‘두 당구공의 충격(衝突)과 같은, 충동(衝動)에 의한 운동의 커뮤니케이션’을 논하며, 진술하기를: 

따라서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란, 그저, 그것들이 우리 생각들로 연결을 획득했고, 이로써 각각 서로한테 실존의 증거가 되고 있다는 추론이 생겨난다는 것뿐이다. (ibid., Essay vii, Part I) 

    로크와 흄은 인간 이해하기를, 버클리는 인간 지식을 관심사로 했음을 떠올리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셋 모두 최우선적 관심사는, 합리적 마음의 지식 획득 방식, 그리고 지식의 확립 방식이었다. 흄이 인용구 맥락에서 거론한 ‘실존’은, 버클리가 경험 영역에서 지각-가능성으로 정의했던 그 실존이지, 존재론적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해석의 정당성이 분명해지는 것은, <감지(感知)들로 얻은 지각들이 그 자신들을 닮은 외부 대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지 아닌지> 하는 의문에 관한 흄의 다음 구절을 숙고할 때다: 

이 의문은 어떻게 결판날 것인가? 단연코, 경험으로다; 자연 자체에 대한 여타 모든 의문들처럼. 하지만, 여기서 경험은 침묵이며, 전적으로 함묵(含黙)일 수밖에 없다. 마음은 지각들 말고는 자신한테 여하한 사물도 제시할 수 없기에, 그 지각들을 대상들과 연결하는 여하한 경험도 결단코 불가능하다. 고로, 그와 같은 연결을 가정하는 건 아무 근거 없는 추리다. (ibid., Essay xii, Part I) 

    흄 이후, 인간 지식이 절대적 실재를 재현(表象)해야 한다는 신념은, 경험에 관한 추리로는 더 이상 정직하게 정당화될 수 없었기에, 형이상학의 왕국에서 버팀목을 찾아야 했다. ‘관계-짓기’는 여하한 여건에서도 개념 형성 행위이며, 고로 이를 구상할 능동적 마음이 필요하다는 깨침이야말로, 칸트로 하여금 그 자신을 ‘도그마에 빠진 미몽(迷夢)’에서 흔들어 깨운 사람은 흄이라고 말하게 한 요인들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Kant, 1783, p.260).  
      

        벤담과 비코 – 개념 분석의 개척자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출판하기 1년 전, 1780년, 제레미 벤담은 그의 ‘허구(虛構) 이론’의 최초 요소들이 담긴 법학 ‘준비’ 논문을 썼다. 그 이론 구성의 모든 요소들은, 18세기 마지막 20년과 1832년 죽기 직전까지, 출현했던 다양한 저작에서 얻은 조각들이었다(Ogden, 1959; p.XXff를 보라). 내 알기로, 벤담은 개념에 대한 조작적 분석에 착수했고, 그렇게 내딛은 첫발은, 이후 칸트 철학의 주된 문제, ‘아 프리오리(a priori) 범주들에 대한 당연시’를 해결하도록 돕는 방향이었다. 벤담한테도, 관계 개념은 방아쇠였다: 

관계라는 생각[(觀念)의 제시] 없이, 어떤 종류에 속하든, ‘것’(entity) 둘은 자신들을 마음에 동시에 보여줄 수 없으며, 또한 같은 대상을 다른 시간에 보여줄 수도 없다. 하여, 관계란, 허구지만, 마음에서 대상 A를 지각하며, 동시 또는 바로 다음 순간에, 대상 B의 지각을, 또는, <앞 지각이 같은 존재(現存)의 뒷 지각을 동반하는 경우로> 같은 대상 A의 지각을 얻을 때마다, 산출되어 자릴 잡는다: 다양성은 전자, 동일성은 후자에서, 관계의 이름이다. (Bendam, in Ogden, 1959; p.29)

    벤담의 분석들은 그의 시대보다 100년은 앞선 것들었기에 (Ogde n, 1959; p.cli), 인정받고 더 발전되기 위해서는 한스 바이힝거(이후 절을 보라)를 기다려야 했다. 
    18세기 전반기, 영국에서 먼 곳의 또 다른 사상가는 구성주의의 가장 중요한 몇몇 관념을 내다보며 작업했다. 버클리의 ‘논문’이 출판된 1710년, 지암바티스타 비코는 나폴리에서 라틴어 배포판 De antiquiss ima Italorum Sapientia를 출판하여 인식론의 새로운 조망을 열었다. 그것은 이탈리아에서는 거의 반향을 얻지 못했고, 최근까지 영어권 세계에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후기 저작에 힘입어, 비코는 역사 철학과 사회학에서 획기적 사상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비코의 지식 이론은, 그가 썼던 모든 것에 스며있지만 그것만을 위한 텍스트는 쓰지 않았기에, 그의 독자와 주석가들의 대체로 잘못된 해석으로, 주변적 호기심 정도로 취급되었다. 
    비코 역시 종교적 신앙과 계시 사안들에 대한 회의론의 침습(侵襲)에 불안했지만, 데카르트와는 철저히 견해를 달리했다. 확실한 진리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대신, 신비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에서 딱 잘라 분리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두 영역의 특징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들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각 영역이 자신의 생산물을 표현할 때 쓰는 수단들을 검토한다는 탁월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언어는 그래서 그의 이론에서 핵심 요소가 되었다. 
    ‘이태리 거주민의 태고적 지혜 ’에 관한 그의 논문은 상당수 어원론적 고찰들로 시작된다. 라틴어 화자들한테, 단어들 verum(眞)과 fact- um(實)은 서로 교체될 수 있었으며, intellegere는 ‘알다’와 완전히 똑같은 뜻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Ratio는, 그들한테, 산술적 요소들의 합성이었고, 자체로, 사람한테 적절한, 동물보다 앞선, 재능을 뜻했다. (Vico, 1710, Ch.I, par.I,1)

    이성의 지식 산출 수단은, 비코 왈, 사물(事物)이 합성되거나 만들어지는 방식 찾아내기다. 이성은 사물의 구성 요소들과 그것들 사이 관계 방식을 규정한다. 세상을 창조한 신한테, 만들기와 알기는 동일한 것이며, 신의 지식은 무한하다.

이는 모든 인간 진리들의 비교 기준이다; 말인즉, 인간 인지들 가운데 참(眞)인 것은, 우리가 가진 요소들을, 우리가 계속해서 무한히 산출하는 공준(公理)들로, 우리가 정렬시킨 것들이다; 우리는 이들 요소들을 합성하면서 그 결과로 알게 된 진리의 창조자가 된다. (Vico, 1710, Ch.I, par.III,2) 

    따라서,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이 접근했던 소재, 즉, 경험 소재로 만들어진 사물들뿐이며, 바로 그 만들기를 통해 그 사물들에 대한 지식은 생겨난다. 내 아는 한, 비코야말로 <우리의 합리적 지식은 우리 자신들이 구성하고 있다>는 걸 모호하지 않게 진술한 최초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종교인이었기에 형이상학에도 발을 담고 있었다. 해서, 신비적 지식을 해명하고 싶었다. 그가 해낸 간단하며 동시에 효과적인 방식은 지식을 두 종류로 나누는 것이었다: 일상 경험과 과학 세계를 참작(參酌)하는 ‘합리적 지식’; 그리고 촉지(實存) 가능한 세계 너머 있는 전부를 참작하는 ‘시적 지혜’. 
    합리적인 것은 ‘통속어’로 표현될 수 있기에, 비코는 통속적 단어를 써서 경험적 사물들과 그것들에서 추상된 관계들을 지시했다. 이와 반대로, 시적인 것은 합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권역 너머를 가리키는 은유(隱喩)로 표현된다. 그는 명확히 말하길:

영(靈)적인 것[spirituality:靈性]에 대한 우리 이해를 말하려면 … 반드시 우리 상상력에 기대, 화가들처럼, 그에 대한 인간 이미지들을 만들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Vico, 1744, par.402) 

    그 어떤 노고도 마다하지 않고, 비코는 <인간 문화 초기의 모든 추상적 지식>은 시적 은유, 우화를 써서 표현되었다는 걸 보여주었다.  
    조이스는 비코의 사례들 중 하나를 피네건스 웨이크를 쓸 때 골랐다. 비코는, 천둥은 무서우며 설명 불가능한 것이었음에 주목했다. 그것은 하늘에서 왔으며, 그 기원은 탐구될 수 없었다. 고로, 그 고대인들 생각에, 초인적 권능, 신은 하늘에 거해야 했다(ibid. par. 377). 이렇게 하늘은, 초인적 권능들의 거처가 되었기에, 일상 경험에서 귀납을 써서 모아진 설명들로는 해명될 수 없는 사물들의 기원이 되었다. 
    그와 같은 상상적 발명을 비코가 ‘은유’라 칭한 건, 그것은 오직 <한쪽만 접근 가능한> 유추(類推)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 인간들도 그들이 사는 동굴 밖으로 밀쳐낸 커다란 바위가 산등성이 아래로 구를 때 천둥 비슷한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어, 천둥도 유사한 방식으로 반드시 그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상상했다 (ibid. par. 444). 하지만, 그러한 유추는 검사 불가능한 경험-너머로 투사된 당연시(斷定)일 뿐이다. 그것은 가설이 아닌 우화였다. 그와 같은 우화(寓話)들이 세대에서 세대로 반복되며 상호 조율될 때 신화(神話)는 창조되고, 시적 상상력의 그 기원은 잊혀지기에, 그 신화는 실제 경험에서 누군가 추상해냈던 지식(知識)으로 간주된다. 
    비코한테는 그밖에도 많은 획기적인 생각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기하학은 점 하나를 발생시키는 기본 심적-조작에서 구성된다고, 그리고 이 조작은 시간(時間)의 찰나(刹那) 발생 조작과 같은 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삐아제의 생각들을 예지했다: <발달은 항상 단계들로 기술될 수 있으며, 인간 마음은 모르는 건 자신한테 익숙한 개념에 동화시킨다>. 한편, 내 생각에, 관념 분석에서 그의 가장 강력한 공헌은, <경험에서 유추에 기초한 은유>와 <사건과 물(物)을 유추라는 수단으로 불가지(不可知)로 투사시키는 신비주의자(또는 형이상학자)의 시적 은유> 사이 명확한 구별을 제공한 것이다.


        칸트의 ‘선험적 기획’       

이제껏 내가 용어 ‘형이상학’으로 가리킨 건, 세상을 인간 경험 영역과 그 너머 있으리라 생각(假定)된 것들 모두로 통째로 묘사, 기술하려는 시도들이다. 이 용어가 칸트 저작에서 한층 복잡해지는 까닭은, 그 용어를 혼동하기 쉬운 표현들, transcendental(先驗)과 transcendent(超越)로 명백히 차별화시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성을 사용한 자신의 분석적/비판적 탐구를 ‘transcendental philosophy[아 프리오리(경험과 독립된) 요소들에 기초한 철학]’이라 부르며 규정하기를, 이 철학은:

이해하기(悟性)과 이성을 다룸에 있어, 주여진 사물을 당연시하는 바[존재론] 없이, 대상-일반을 참작하는 개념과 원리들의 체계로 다룬다. 두 번째(transcendent)는 주어진 대상들의 총합 - 그 대상들이 감지들에, 당신이 원할 경우, 또 다른 어떤 직관에 포착되든 않든 - 즉, 자연을 참작한다. (Kant, 1787; p.873; 내 강조) 

    두 번째 ‘transcendent’에 속하는 모든 건, ‘사색적’이며 ‘경험 가능한 경계를 벗어난 것임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내 생각에, 그 초월 부분이 합리적으로 납득 불가능한 까닭은, 거기에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언어와 개념들>이 채택될 수밖에 없고, 고로, <그것들>을 ‘경험 경계 너머까지’ 사용하는 건 <그것들>의 적용 범위가 <그것들>이 형성된 영역 너머까지 뻗어가고 있다는 전제(當然視)를 암묵적으로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코와 견해를 같이하며, 초월적인[일상 경험의 한계를 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오직 시적 은유로만 말해질 수 있을 뿐이며, 하여, 신비적 권역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칸트의 ‘선험 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은 인간 이해하기(悟性)에 대한 순수 합리적인 분석이며, 그것이 제공한 모델은 많은 방면에서 구성론적 방향에 기초 역할을 하고 있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 서문에서, 자신이 보기에, 우리의 알기, 즉, 인지의 산출물을 탐구했던 이전의 모든 시도는 ‘학의 확실한 발판’을 딛고 전진한 게 아니라고 언급한다.(1787, p.vii) 그 근거는 바로: 

여태껏 대상에 모든 인지가 들어맞아야 하는 것으로 당연시했다 … 만약, 대상이 우리 인지에 들어맞아야 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 향후 우리는 더 얻을 게 있는지 찾아내려고 할지도 모른다. (Kant, 1787, p.xvi) 

    갈릴레이, 토리첼리, 그리고 여타 과학자들에 대해, 칸트 왈, 그들은 ‘빛을 보았다’: 

<이성은 자신의 디자인에 따라 그 자신이 산출한 것만을 납득할 수 있다>는 점을 그들은 이해했다 … 

… 한편, 이성은 자신의 원리들에 따라 진행될 수밖에 없으며, 오직 그 원리들과 부합될 때에야, 출연[appearance(外樣), 현상(phe  nomenon)]들은 법칙들로 간주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성의 자연에 대한 접근은, 교사가 하고 싶은 말에 귀기울이는 학생과 같은 태도가 아닌, 목격자들한테 질문하고 대답을 강제하는 임명된 법관과 같은 태도여야 한다. (Kant, 1787, p.xiii)

    위 인용구 첫줄은 천 년이나 앞서 에리우게나가 썼던 것의 요약일 수 있다. 그걸 썼던 의도는, 이성은 신비주의자의 지혜를 침범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칸트한테, 이 첫 줄은 모든 합리적 알기에 대한 그의 분석의 전제였으며, 그의 깜냥들의 갈등(1798)에서 요약되었다. 

이해하기(悟性)는 인간의 전적으로 능동적인 권능이다; 그것의 모든 관념, 개념들은 단지 그것의 피조물이며, … 외부의 사물이란 단지 오성의 작업을 야기하는 계기에 불과하며 ... 그 작업의 산물이 바로 관념과 개념들이다. 따라서, 이들 제시들(Vorstellungen)과 개념들이 준거(指示)하고 있는 사물들이란 우리 마음이 자신한테 펼쳐 보일 수 없는 것들이다; 왜냐? 마음은 실재하는 사물들이 아닌 오직 그 자신의 대상들 보여주기만 창조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말인즉, 이들 제시와 개념들로 사물들을 그 자체로는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Kant, 17 98, Werke, Vol. Vii, p.71) 
   
    이들 단편에서 생기는 의문: 도대체 사물들을 그저 인간 상상물이 아닌 ‘외적인’ 걸로 간주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칸트의 답은 극히 난해해서, 내가 잘못된 해석들로 여기는 다양한 독해의 여지를 남겼다. 

우리 감지들과 우리 이해하기(悟性)가 우리한테 제시한[펼쳐 보인] 사물들은 … 인과적 계기와 오성의 결과가 발생시킨 산물들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그저] 출연(出演)에 [불과한] 것들이 아닌 까닭은, 실제 생활에서 우리가 그것들을 실재하는 사물들이자 우리 제시들의 대상들로 간주할 수 있다는 바에서 - 그러한 인과적 계기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실재하는 사물들이라고 반드시 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ibid.)       

    ‘반드시 가정해야 한다’는 지극히 중요한 대목이다. 이 문구에 대해, 실재론자들은 <칸트 이론은 실제 ‘사물-자체들’로서 실재하는 사물들의 실존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쪽으로 읽기를 원한다. 이것은 오독이라 생각한다. 그런 기대와 달리, 칸트가 여기서 말하는 필요란, ‘일상생활’에서, 특히, 우리와 타자들의 행위들을 상호 협조적으로 정렬시키고 싶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칸트가 많은 곳(이를테면, 1787; p.591, 610)에서 반복한 사물-자체는 ‘발견적 허구’(1787, p.799)로 기능하는 ‘생각(思惟)의 산물’(Gedankending)로 의도된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은 시간과 공간으로 구조화되는 <여하한 존재적(ontic) 실재에 대한 구상>도 감당한다. 그와 같은 실재가 허구임에도, 필수적이 되는 것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목적 때문이다.   
    이후, ‘아는 능력’(그의 인간학(1800) 1절, vom Erkenntnisvermög en)에 대한 에세이에서, 칸트는 감지들에 대한 그의 접근을 설명하면서, ‘출연[appearance: 나타나 보이는 바]’에 대한 생각(觀念)으로 되돌아간다: 

감지들의 지각[의식을 동반한 실험관찰적-제시들(empirical presentations)]은 오직 내적 출연이라 불릴 수 있을 뿐이다. (매니폴드에 질서를 세우는) 사고 규칙으로 그 출연들을 합치고 연결하는 이해에 이르기 전까지, 그것들은 실험관찰적 지식, 즉 경험이 아니다. (Kant, 1800, Werke, Vol. Vii, p.144)

    칸트의 용어, 매니폴드(das Mannigfaltige)는 또 다른 핵심(key) 개념을 지시하고 있다. 이 개념은 오직 <칸트 이론의 기본 전제>와 결부될 때만 이해될 수 있다; 그 전제란, <공간과 시간은 인간 이성이 모든 경험에 박아 넣는 기본 형식들이다>. 이들 형식들이 ‘아 프리오리’인 것은, 이성 기능하기에 고유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니폴드’는 구성 지각과 이성의 조작 대상인 원-재료(raw-material)다. 이것을 윌리엄 제임스는 ‘만발해 파르르 떠는 엄청난 혼돈(one big blooming buzzing confusion)’이라 불렀다(James, 1962, p.29). 이것은, 오늘날 신경 생리학에서는, 그 시스템의 감각 기관들이 연속적으로 발생시킨 전기화학적 임펄스들의 총체라 말할 수 있다. 설사 이들 임펄스들이 일종의 존재적(ontic) 기층에서 생기는 차이들로 야기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질적으로는 모두 같기에 질적 정보를 나를 수는 없다. 
    따라서, 경험이란, 생각하기 주체가 매니폴드의 요소들로 정렬한(구성한) 것이다 - 그리고 오직 특정 사물들만 구성되고 그밖에 것들은 구성되지 않는다는 건, 이성의 구조에 따라 결정된 사실이다; 이 구조가 바로 칸트가 자신의 선험 철학, 제1의 주제로 삼은 것이다. 이 철학을 ‘합리적 관념론’이라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이 철학이 제안하는 모델은, 이성이 자기 자신으로 구성하여, 우주에 대한 견해를 전적으로 관념들로 환원시킨, 고심이 깃든, 독창적 모델이다. 이성 영역 너머 놓이는 그 무엇에 대해서든, 칸트는 용어 누머논(noumenon)을 사용했다; 그리고 단언하길, <누머논들에 대한 전제(當然視)가 합리적으로 불가피할지라도, 그것들은 변함없이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네거티브’ 신학자들의 입장으로 되돌아가, 그의 불가지론 모델로 그보다 앞선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과 맞붙었다. 
    서양 철학 출발부터, 인간 이성이 구성한 지식은 어떤 식으로든 독립된 실재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대다수 사상가한테, 그 관계는 재현(表象)의 일정 형식을 취해야 했다: 십중팔구, 불완전한, 뜬구름 같이 떠올랐다 사라질 재현(表象)일지라도, 실재의 몇몇 측면들만이라도 정확히 해석하는 그림이어야 했다. 이러한 접근 권능을, 버클리와 비코는, 이성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들은 그 곤란을 모면코자, 각자 방식으로, 저 실재 세상과 연결을 인류 모두의 창조자, 신을 경유해서 만들었다. 플라톤에서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관념론과 합리론의 모든 철학자들은 그들 체계들이 유아론으로 미끄러지는 걸, <말인즉, 세상에는 생각(思惟)하는 이의 주관적 마음을 제외한 그밖에 어떤 실존도 없다는 생각(思想)에 빠지는 걸>, 피하고자 신에 대한 생각(觀念)을 어떤 식으로든 끌어들였다. 
    이어, 칸트는 신의 실존을 합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이전의 모든 시도를 체계적으로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는 신의 부존(不存)에 대한 합리적 증명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고, 고로, 신앙인들은 신 실존에 대한 부인 불가능성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1787, pp.770, 781). 사물-자체의 경우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는 강변(强辯)하기를: 세상에 대한 전능한 창조자를 당연시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불가결하다; 하지만, 그 창조자가 우리 지식에 추가되지 않는 건, ‘그것 자체로는 무엇일지에 대해 여하한 구상도 할 수 없는 바’에 대해 무언가를 전제(當然視)하는 것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pp.725–6).

        인과성 재평가

19세기 내내, 과학은 상상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확장되며 기술(技術) 발전을 위한 거대한 터전을 제공했다. 장치 설비와 기계들의 발전은 전에 없이 번창했다. 이로 인해, 한편으로, 서양과 그 너머 인간 경험 세상은 심대한 변화를 겪었고, 다른 한편, 그것들의 실용적 성공은 그것들이 비롯된 이론들이 자체로 실재하는 세상의 재현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환상 강화를 도왔다. 그 세기 말엽, 인기 작가들만이 아니라 과학자들까지도, 중요한 문제들은 풀렸고 남은 일이란 여기저기 사소한 걸 마무리하는 것뿐이라고 공언했다 (see Bernal, 1971; p.665). 세상을 움직였던 이전의 신비로운 방식들은 모두 인과 관계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안이한 낙관주의를 공유하지 않았던 다른 과학자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위대한 과학자들도 있었다. 흄과 칸트의 세심한 독자였던 폰 헬름홀츠가 그 예로, 그가 쓰기를: 

인과성 원리란, [내 인생] 말년에 와서야 분명해진 바, 실상, 모든 자연 현상에 법칙-유사성을 부여하기 위한 전제(先假定)에 불과하다 (Helmholtz, 1881/ 1977)

    인과성이란, 이때, 이성이 경험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경험에 박아 넣는 디자인 틀의 일부다. 하지만 그토록 구체적인 디자인은 어디서 온 것인가? 흄의 제안은, 흐르는 경험에서 반복된 지각들의 근접에서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간단한 관찰로 즉각 퇴짜 당한다: 우리 경험에서, 낮은 밤에 또한 밤도 낮에 인접함에도 하나를 다른 하나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건 터무니없다. 칸트한테, 인과 관계는 우리 생각하기 그 시작부터 고유한 ‘종합적 아 프리오리’ 범주였다. 그한테, 인과성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의미로 타고난(天賦的) 또는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悟性)의 생산자로서 이성이 그 자신의 합리적 그림 생성을 위해 필요했던 발견적 허구들 중 하나다.
    이와 같은 순환성의 특징은, 칸트의 선험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경험(에서 & 에다) 일관된 세계 그림(象)을 생성시키는 방식과 같은 여하한 합리적 모델 구성 시도에서도 불가피한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신비주의자들이 시적 은유로 메우고 있는 협곡(峽谷)들이 연결된다. 순환성이란 피해갈 수 없는 것임을 구성론자는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이것을 최소로 줄이고 싶어 한다. 인과성의 경우, 그럴듯한 개념적 분석은 훨씬 이후 삐아제의 발생적 인식론에 이르러서야 제공되었다. (3장을 보라) 


        도구주의의 새 연료

지식에 대한 모든 도구론적 접근들한테, 19세기 가장 중대한 사건은 다윈의 진화론 출판이었다. 그 적절한 연결을 만든 아마도 최초 인물은 윌리엄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그의 출중한 에세이에서, 다윈의 정확한 ‘선택’ 개념으로 허버트 스펜서의 공허한 사회학적 단정(斷定)들과 맞붙었다. 새로운 구상들의 기원에 대해 말하길:  

그것들은, ... 맨 처음 산출될 때, 지나칠 정도로 격렬한 인간 두뇌의 기능적 활동으로 인한 자발적 변이에 해당되는 마구잡이 이미지, 공상, 돌발적 분출 양상을 띠며, 이것들에 대해 외적 환경은, 그저, 확증 아니면 반박, 채택 아니면 거절, 보존 아니면 파괴로 대응할 뿐이다 - 요컨대, 유사한 부류의 우연한 분자적 사고들로 생긴 형태적, 사회적 변이들이 선택되는 것과 비슷하다. (James, 1880, p.456) 

    다음 페이지에서, 이러한 생각을 과학 탐구자한테 적용할 때, 분명해진 바, 그가 느슨한 표현 ‘외적 환경’으로 지시한 것은 독립된, 객관적 세상이 아니었다: 

가설은, 다산성(多産性)이 그 첫째 조건이며, 경험과 충돌하는 순간 기꺼이 버려지는 바가 그 다음이다. (ibid., p.457)   

    그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지, 그 자체로 있을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이렇다는 것은, 그의 실용주의 이론 맥락에서 그가 진술한 많은 것들로 알 수 있다 (e.g. James, 1907; p.49). 
    가설이 경험에서 확증될 경우에만 유지된다는 생각은 분명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생명체의 환경에서 살아남기와 유사하다는 것은 혁명적이었다. 가설은 살아남아야, 이론이 되고, 이어 추가 확증으로, 객관적 실재를 재현(表象)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사실적 설명 또는 법칙이 된다고, 생각되었다. 이제, 과학과 인간 지식 일반의 진보(進步)는, 유추로, 다윈의 생물학 이론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지속적 진화(進化)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각(見解)은 빠르게 퍼지며, 철학적 관념이 유포용으로 자주 단순화되는 것처럼, 하나의 슬로건으로 압축되었다. 실용주의는 ‘진리란 작동(通)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운동으로 알려졌다. 살아남아 재생산 가능한 것은 생물학적 진화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에, 개념과 아이디어들 영역에서도, 그 기준은 간편하고 유익한 걸로 여겨졌다. 제임스도 가끔씩 이러한 해석에 기여했는데, 이를테면, ‘실용주의적 견해’에 대해 쓸 때였다:     

… 우리의 모든 이론은, 일종의 도구로서, 신성한 신비-세상에 대한 계시(啓示)나 영지적(靈智的) 답변이기보다는, 실재에 대한 적응의 심적 양식(樣式)이다. (James, 1907/1955, p.127) 

    한편, ‘경험에서 확증’이 훨씬 더 복잡한 사안이 되는 건, 그것이 생물학적 반응이나 속성을 수반할 때보다 개념적 구조를 수반할 때다. 개념적 수준에서 ‘적응 양식’은 유기체의 몸 수준에서 적응 양식과 같지 않다 (개념적 평형은 3장에서 논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일찍이 표명했던 바, 진화론적 접근으로 

제거되는 것은, <독립된 진리 자체>, 그리고 … 알게 되어지는 바로서 세상과 실제 상호작용에서 <경험 또는 선택>이라는 이원론이다 -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한 경험이란 동시에 진리 창조이기 때문이다. (Simmel, 1895, p.44)

    달리 말해, <오직 실재 세상을 반영하는 지식만을 참(眞)이라 칭해야 한다>는 요청은 폐기되고 그 자리에, <지식은 우리 경험 세상에서 우리 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것으로 발견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들어선다. 이러한 대안적 시각과 관련하여, 세상 경험 방식이 경험 환경 개념화를 돕는 가설과 지식에 의존한다는 점이 분명해지면, 문제 하나가 부상한다. 그 문제란, 하이젠베르크가, 자연 과학자들이 자연을 파고들면 들수록 그들이 보는 건 자기 자신의 개념들에 대한 일종의 반성임을 더더욱 깨닫게 된다고, 말했을 때, 가리켰던 것이다 (1장을 보라). 
    이러한 문제를 무시하고, 콘라드 로렌츠 작업을 시작으로 발전된 진화론적 인식론 운동은, 특히, 도날드 켐벨이 그 인식론에 부여한 확장된 형식에서 상당한 기세를 얻었다; 그는 그것을 ‘가설적 비판적 실재론’으로 특징 지웠다. 켐벨은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성 개념들은, 칸트가 생각했던 바, 인간 이성의 아 프리오리 요소들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체가 우주에 적응한 결과다>라는 점에서 로렌츠와 의견을 같이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은 ‘실재에 대해 훨씬 정교하게 다듬어진 시각(見解)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변이들이 몸의 형태 혹은 시지각물 혹은 과학적 이론까지 통제하고 있다 해도, Ding an sich(사물-자체)는 항상 간접적으로만, 언제나 알기 주체의 설정(假定) 언어로만 알려진다. 이러한 의미로,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반영,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설정들에서 선택되어진 것>에는, 간접적이나마 일종의 객관성이 있다. (Campbell, 1974, p.447) 

    객관적 실재의 그와 같은 일종의 ‘반영(reflection)’을 전제(當然視)함에 있어 결점은, <<특정 시점에 ‘바이어블’한 (즉, 적응된) 것으로 입증된, <진화된 물리, 행동, 개념, 등등 구조>가 가능한 최상의 적응을 향한 필연적 도정(道程)에 있다>>고 믿을 여하한 근거도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생존한 것들을 보존한 자연 선택은, 우연한 변화들로 실제 야기된 변이들 가운데서만 골라냈을 것이다. 이때 켐벨이 말한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설정들’은, 개념적 수준에서, 그 당시엔 불가결하게 보였던 기본 원리와 양립-불가능했기에 단연코 시도되지 않았던 훨씬 더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설정들을 배제하고 있다. 게다가, <유기체 적응 결과로 자연 자체의 어렴풋한 구조가 알려진다>는 생각(觀念)은 생물학자들의 발견, <수백만 년을 진화 생존했음에도 그 종들 대다수가 특정 시점에 멸종되었다>와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그런데, 더 근본적 논리적 결함이 진화론적 인식론의 전제들에 있다. 로렌츠 쓰기를, ‘주어진 환경 조건에 적응은 그 조건에 관한 정보 획득과 동등한 것이다’(1979, p.167). 이게 그의 학파의 주된 단정(斷定)이지만, 정당화될 수 없다. 적합(fitness) 또는 바이어빌러티와 같은 생물학 개념에서, 유기체나 종들은 각기 ‘부여된’ 환경에 관한 정보을 소지할 또는 그 환경과 속성들을 공유할 필요가 없다. 적응에 요구되는 것은, 유기체들이 긁히거나 충돌하는 지점들을 피하는 것뿐이다. 자연 선택의 체(sieve)를 통과한 그 어떤 것도 자신이 걸러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는 있지만, 이에는 그 체의 구조와 관련된 여하한 지시도 없다. 진화론과 구성론 모두에서, ‘맞아들다(適)’는, 거기 있었을 여하한 제약들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가설과 허구들

1876년부터 2010년까지, 독일 칸트협회 창립자, 바이힝거는, 그가 ‘처럼 철학’(Die Philosophie des Als Ob, 1913)이라 부른 기념비적 작업을 진행했다. 거기서, 칸트의 비판 작업에서 출발하여, 그는 인간 지적 생산 전 분야와 관련된, 철학 주시(注視) 방식에 대한 새로운 제안으로서, 자신의 ‘허구(虛構)’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벤담을 선구자로 거론하고, 이어, ‘처럼(as if)’ 원리에서 거대한 분석적 기획으로 발전시키는데, 그 기획은 모든 영역을 다루기는 하지만, 특히, 철학과 과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탐구의 기초를, 벤담처럼 언어의 일상 사용에 두기보다는, 칸트를 따라 개념 형성 가능성들을 분석한다. 이로써 그가 강조하게 된 건, ‘(칸트한테서 유래된 용어) 발견적 허구’와 ‘가설’ 사이 극히 중요한 구별이다. 
    두 개념에 대한 그의 구별 방식은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그 기원이 칸트의 합리적 지식 이론에 있음을 고려치 않을 경우, 오해될 수밖에 없다. 

가설은, 알고 있듯이, 반드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가설은, 참인 것으로 밝혀지면, 말인즉, 검증되면, 과학적 관념들 목록에 확실히 포함될 것이다. … 허구는 경험으로 확증될 수 없지만, 과학에 기여한 공로로 정당화될 수는 있다 … 일단 정당화되면, 관념 영역에 유용한 요소로 인정될 것이다. 사고 연산의 실제 유용한 결과 산출을 도울 때, 이를테면, 무한소(無限小) 방법으로 곡선 계산을 하거나, 인위적, 가상적 분할이 실용적 질서를 낳을 때, 그와 같은 보조 관념들은 정당화 된다 … 가설이 가설들에 기반한 경험적-실재(現實)에서 검사받는 것처럼, 허구도, 그렇게, 자신이 고안한 실제적 유용성 그리고 적절성과 관련하여 검사받는다. (Vaihinger, 1913, pp.610–11) 

    인용구 시작에 언급된 ‘검증’은, 존재론적 검증이 아니라, 그 다음에서 분명히 한 것처럼, 경험에 따른 확증을 의미한다. 바이힝거는 유럽 사상가들은 뒤흔들었지만, 영어권 철학자들한테는 거의 무시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아이디어, 유용한 허구는 최근 다른 이름으로 나타났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그의 유명하고 자주 인용되는 ‘메타로그: 본능이란 무엇인가?’(1972a)에서, ‘설명적 원리’에 대해, 중력처럼, ‘당신이 설명하고 싶은 걸 설명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설명적 원리를 가설과 구별하는 베이트슨 방식은, 바이힝거 방식만큼 명확하진 않지만, 유용한 허구를, 접근 불가능한 것을 대신하는 개념적 또는 기계적 모델을 구성하는 사이버네틱스 방식과 연결시킨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딸한테 설명한다: 

F: … 알고 있듯이, 가설은 구체적인 어떤 걸 설명하려 하지만, (중력이나 본능 같은) 설명적 원리는 정말 아무 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아. 그것은, 과학자들 사이 일종의 인습적 합의로, 일정 지점에서 사물에 대한 설명을 멈추기 위한 것이지.
D: 뉴튼이 당시 하고자 했던 거죠? ‘중력’이, 설명하는 건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저 일련의 설명 끝에 찍는 마침표라면, 그때 중력 고안하기는 가설 고안하기와는 다른 거죠, 고로, 뉴튼은 가설은 상상으로-만든(fingo) 건 아니라 했겠죠. 
F: 맞아. 설명적 원리에 대해선 여하한 설명도 있을 수 없지. 블랙박스 비슷한 거지. (Bateson, 1972a, p.39)

    바이힝거가 수많은 방식들로 설명했던 것처럼, 허구들과 그것들 사이 관계의 사용 없이, 세계 그림(象) 구성은 시작조차 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가 보여준 건, 인간 이해하기(悟性)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해 결정적인 것으로서, <이들 허구는 합리적 경험 조직화를 위한 도구로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 자체로 경험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 실재하는 현상으로 오인(誤認)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언어 분석의 토대

20세기 전후 40년 사이, 체하는 확립된 관념들과 결별, 새로운 조망들을 열었던 상당수 인물들이 출현했다. 그러한 격변은 분명 시각 예술에서 가장 뚜렷했지만, 문학, 음악, 그리고 철학에서도 두드러졌다. 물리학 혁명이 그러한 격동에 끼친 영향 정도를 판단할 능력이 나한테는 없지만, 구성론적 관점에서, 포앙카레, 뒤앙, 마하, 그리고 수학자 브라우어 같은 저자들은 그 길에 기여했다. 그들 관념들 상당수가 이어지는 장들에서 나타날 것이다. 
    한편, 언어 연구에 새로운 기초를 구축했기에, 구성론적 접근에서, 특히 중요한 사상가, 페르디낭 소쉬르는 이로써 언어 연구를 전통 철학과는 다른 과학적 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단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않았지만, 그는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그의 작업과 관련해 기이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다른 작가들의 저작에서 빈번하게 언급된 바들로 소쉬르한테 다다를 경우 놀랄 수밖에 없는 사실은, 거의 모든 현대 언어학자들이, 철학적 의미에서 소쉬르가 정초한 가장 중요한 원리, 즉, <단어의 의미가 발견되는 곳은, 소위, ‘실재하는 대상들이 거하는 영역’이 아니라 화자 마음이어야 한다>를 실제로 채택한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소쉬르 이론의 개요(槪要)를 볼 수 있게 된 건, 그의 두 명의 학생 덕택으로, 그들이 그들 노트와 다른 학생들의 노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들 선생의 강의 노트를 극히 흥미롭고 쉽게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으로 엮었기 때문이다(de Saussure, 1916, 1959). 
    소쉬르 이론을 철학, 그리고 이후 허다한 언어학들과 구별 짓는 그의 탐구 특징은, 그가 어휘나 문법 규칙들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지 않고 언어의 기능 방식을 검토하는데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서로 말할 때, 그가 쓴 바, 양자는 소리를 내뱉고 서로 타자가 내뱉은 소리를 듣는다. 이를, 그는 <회로를 구성하는 화살표 두 개로 연결된 두 명의 화자>가 담긴 도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A, B,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고 있다 하자. 그 회로는 A의 뇌에서 시작된다 하자; 거기서 심적 사실(개념)은 표현을 위해 사용되는 언어적 소리(소리-이미지)의 재현과 연합되어 있다. 개념이 주어지면, 뇌의 그에 대응하는 소리-이미지가 풀려 나온다; 이러한 전적으로 심리적 현상 다음에 생리적 과정이 이어진다: 그 뇌는 그 이미지에 대응하는 임펄스를 소리 내는 기관에 전송한다. 곧바로 그 음파는 A의 입에서 B의 귀로 전해진다: 이는 전적으로 물리적 과정이다. 다음, 그 회로는 B에서 계속되지만, 순서는 거꾸로다: 귀에서 뇌로 이어지는 소리-이미지의 생리적 전송; B의 뇌에서, 개념과 이미지의 심리적 연합. 이어, B가 말을 한다면, 그 새로운 작용은 첫 번째 작용과 정확히 똑같은 진로 - B의 뇌에서 A의 뇌로 - 를 따를 것이며 똑같은 연속된 국면(位相)들을 통과한다, … (de Saussure, 1959,  p.11–12) 

    이는 간단한, 기본적 설명이지만, 다음 두 가지를 해명할 커뮤니케이션 역학(力學)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소리-이미지와 개념 사이 쌍방향 대응은, 실상, 단어와 그 의미 사이 의미론적 연결이자, 심리적 연합의 결과다. 한편, 이러한 연합 형성은 오직 개체 자신의 주관적 경험으로 그/그녀만 할 수 있는 일이다. (7장을 보라). 
여하한 개체 경험도, 전체로서 사회 집단이 형성했던 연합들(즉, 의미론적 연결들)을 담는 모든 상황을 망라(網羅)할 수는 없기에, 단어 ‘언어’의 집산적 의미(소쉬르의 랑그)에는 언어적 상호작용을 무수히 겪은 근면한 관찰자까지도 그저 근접하기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일종의 추상이 필요하다. 

    이러한 분석을 받아들이면, 언어 공동체에서 자라는 모든 아이가 지각한 소리-이미지를 전공동체가 함께하는 개념과 자동적으로 연합시킬 것이라는 생각(觀念)은 붕괴된다. 그 대신, 언어 배우기는, 자기 자신의 개념들의 끝없는 적응 과정으로 보일 것이며, 듣고 내는 말-소리들과 상호 양립-가능한 연합들을 확립(構成-維持)할 필요와 갈망으로 통제될 것이다. 
    따라서, 표현 ‘함께하는 의미’는 오인될 소지가 있다. 단어 ‘함께하다(share)’의 모호성을 알아차리면 분명해질 수도 있다. 자동차를 함께 사용 하는 경우, 그리고 이와는 상당히 다른 포도주를 함께 사용 하는 경우가 있다. 전자는, 둘 혹은 그 이상의 개인들이 자동차 한 대를 함께 쓰는 것으로, 그 차는 같은 차이다; 후자의 경우, 한 사람이 마셔버린 포도주는 다른 사람이 마실 수 없다. 의미에 대한 함께하기는 후자와 약간 비슷하지만, 전자와는 전혀 같지 않다. 우리는 우리 경험을 그밖에 타자(他者)들과 함께할 수 없기에, 그저 그들한테 우리 경험에 대해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며, 그리함에 있어, 우리가 우리 경험과 연합시켰던 단어들을 사용한다. 우리가 말하거나 쓸 때 타자들이 이해한 그것은, 필히, 그들 경험이 그들을 이끌어 특정 단어들의 소리 이미지들과 연합하게 했던 의미들 이상일 수 없다 – 아울러 그들 경험은 우리 경험과 결단코 동일하지 않다. 
    언어 사용자들이 보통 자기 집단의 타자들과 굉장히 많은 언어적 양립들을 획득할 경우, 그들이 쉬이 믿게 되는 것은, <자신들이 쓰는 단어들이 실재하는 세상의 대상들을 실제로 지시하고 있다는, 그래서, 언어는 개체 경험 너머 사물들에 대한 기술(記述)을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見解)이다. 이러한 환상을 야기하는 숨겨진 추리는 다음과 같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똑같은 걸 지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재해야 한다. 하지만 이 추리는 언어 사용자 각자의 의미 구성 방식을 간과하고 있으며, 또한 그 구성된 의미가 타자들의 단어 사용에 적응해야 했기에, 그 결과, 경험을 분절하고 경험에 대해 말하는 관행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언어와 실재 사이 관계를 논하면서, 리처드 로티는 ‘ “그 세상에 맞아들기(fitting)” 또는 “자아의 실재하는 본성 표현하기”라 칭한 어떤 관계가 있다는 생각’으로 유인하기에 대해 언급한다 (Rorty, 1989, p.6). 지금껏, 내가 보여주었기를 바라는 건,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전혀 방어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할 것이라는 점, ‘맞아들기(適合)’를, 설사, 실재론자의 해석일 ‘대응(匹敵)하기(matching)’가 아닌 구성론자의 방식인 ‘양립할 수 있기’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점이다.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적합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서 세상에 맞아들기만이 있을 뿐이다. 


        마무리

여지없이 분명해진 건, <관념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러한 총총걸음은 취사선택하는 한 독자가 상대적으로 일관된, 무모순적 알기 모델을 구성하고자 수집했던 조각들을 나름대로 제시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주관적 제시는, 인용구 저자들이 의도한 것에 관한 진리가 아닌 오직 ‘바이어블’한 독해 하나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그 어떤 해석학적 탐구 조사의 축적물도 역사상 중요 사상가들이 품었던 개념에 대한 참된(眞) 복제를 산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해서, 나는 그들 텍스트를 내 관점에서 최선을 다해 해석하는 걸 선택했다. 나는 프랑스 시인(그리고 수학자)인 폴 발레리를 지지한다, 그가 말하길: 

글귀대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설명했다; 하지만 <텍스트에는 그 어떤 참된 의미도 없다>는 주장으로는 충분치 않다. 저자의 권위 따위란 없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뭐든, 그는 그가 썼던 걸 썼다. 일단 출판되고 나면, 텍스트는 모든 이들이 그들 재간에 따라 골라 쓰는 장비와 비슷하다: 제작자가 그것을 다른 이들보다도 더 잘 사용할 수 있는가는 확실치 않다. (Valéry, 1957, P.1507) 

    내가 시작한 건, <이성은 신비적인 것과 그 지혜를 다룰 수는 없다>는 주장의 구체화다.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 학파들은, <인간 알기 방식들과 독립된 실재는, 우리가 우리 알기 방식들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한테 접근할 수 없다>는 걸 논증했다. 이는 순전히 논리로 보여준 한계였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또 다른 논증을 추가했다: 우리 개념들은 경험에서 비롯된 추상으로 형성되기에, 그것들로 우리 경험 너머에 놓인 여하한 것도 포착할 수 없다. 이어, 중세 신비주의자, 존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비코와 칸트 두 사람보다 앞서, 이성 자신은 그 자신의 규칙들에 따라 만들었던 것들만을 알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르네상스 시기 근대 과학의 탄생으로, 과학 지식은 도구적이며 따라서 밑도-끝도-없는(timeless) 신비적인 것과는 당연히 따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그렇지만, 피론의 초기 회의론 학파에 대한 재발견으로 알려진 <확실한 지식에 반대하는 회의론자들의 논증>을, 많은 이들은, 교회의 도그마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다 썼다. 이러한 분위기를 잠재울 작정으로 데카르트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 정말, 있다는 걸 입증하려 했다. 그렇지만, 근본까지 의심하는 그의 방법은, 결국, 회의론자들의 입장만을 확증시켰을 뿐이다. 
    유명한 세 경험론자들은 지식 구성 과정에 근본적 통찰력을 각기 제공했다. 로크는 관념들의 원천(源泉)으로서, 심적 조작에 대한 반성을 언급했으며; 버클리는 시간, 연접, 수, 그리고 그밖에 절대 필요 개념들이 심적 구성물임을 알아차렸고; 흄은 연합 작용에 의한 관계 개념들의 능동적 발생을 설명했다. 
    버클리와 동시대 인물 비코는 구성론적 접근에 대한 최초의 명시적 정식 – <인간 이성은 오로지 인간들 각자가 스스로 만들었던 것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 을 산출했으며; 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그는 <경험에 닻을 내리는 이성의 언어>와 <다른-걸로-바꿀-수-없는(irreducible) 은유를 동반한 신비주의자의 언어>를 구별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어, 합리적 영역에 대한 칸트의 분석은, 경험 너머에 설정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접근 불가능성을 확증했으며, <우리가 이해하며 사는 세계가 우리한테 실재하는 것이 되는 건, 우리가 합리적인 발견적 허구라는 수단으로 그 그림(象)을 완성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칸트 작업 지침에 따라, 바이힝거는 유용한 허구들에 입각해 서구 지적 문화와 과학에 대한 분석, 그의 ‘처럼 철학’을 만들어냈다. 가끔씩 아이들의 개념 구성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의 접근은 대체로 지식을 거의 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철학자의 것이다. 허구들의 생성 확립 방식에 관한 말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가 구성론자로 불리는 것이 적절치 않은 주된 이유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차용한 변이와 (자연) 선택 개념들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정확한 또는 ‘적어도 근사적으로’ 정확한 재현이라는> 철학자들의 전통적 개념, 진리를 대신할 개념, 적응됨(adaptedness)으로 교체 가능성을 열었다. 그렇지만, 적응은 어떤 제약(制約)들과 관계해서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에서는, 당대 학파들에 따라 답이 달랐다. 이를테면, 진화론적 인식론자의 경우, – 시간과 공간이라는 기본 개념을 포함해서 – 모든 지식을 생존에 복무하는 생물학적 적응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 진화론은, 그들한테, 의심할 바 없이 존재론적으로 부여된 것이며, 그래서, <적응의 산출물들은 그러한 제약하는 세상에 관한 실증적 정보를 제공한다>는 환상의 기초가 된다. 내가 이를 환상이라 칭하는 까닭은, 진화적 원리에 기초한 여하한 ‘비판적 실재론’도 인지 주체가 적응됨이라는 생각에서 실재에 대한 지식이 나오는 방식을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쉬르는 언어를 특징지우길, 언어란

기호 시스템에서, 유일한 핵심은 의미와 소리-이미지들의 연합(union)이며, 거기에서 그 기호의 양 부분은 모두 심리적인 것들이다. (de Saussure, 1959, p.15)

    이러한 연합(聯合)은 모든 언어 사용자들 각자가 자신의 개체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해야 하기에, 우리가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는 단연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로써, 단어가 사물-자체를 지시한다는 생각(觀念)에 기초한 전통 철학의 ‘준거(準據) 이론’은 제거된다. 그 대신, 이제 단어는 경험에서 추상된 거라면 무엇이든, 즉, 개별 언어 사용자가 우연히 만든 그 무엇이든 지시 가능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疏通)이라는 생각이 생겨나는 지점은, 집단을 꾸려 살며 자신들의 경험에서 이미지와 관념을 추상하는 깜냥을 갖춘 유기체들은 그밖에 타자들과 어울리는 상황에서도 그와 같은 많은 추상을 만들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推定)과, 이로부터 더 나아가, 그 타자들도 자신들과 같은 추상들을 만들었으리라는 추정(推定)을 당연시하는 지점에서다. 그들이 단어의 소리–이미지를 그들 생각과 연합시킨 다음, 타자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이 그들한테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일 때마다, 그 단어의 의미는 같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한 양립-가능성은 불가피한 공동작업의 수많은 형식들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므로, 공동체 성원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뜻이 타자의 뜻과 양립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 의미들은, 이때, 타자들과 함께 하는 부단한 비언어적, 언어적 상호작용을 거쳐 통상 용법에 맞게 수정, 적응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적응의 결과는 기껏해야 상대적인 양립-가능성을 성취할 뿐이지, 결코 동일성을 성취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들에서, 삐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의 도움으로(3장을 보라), RC는 자신의 기본 원리들을 정식화했다: 
 
 ●  지식은 감지들을 통해서든 혹은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든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  지식은 인지하기 주체가 능동적으로 쌓아올리는 것이다.
2   ●  인지의 기능은 적응적이며, 생물학적 의미로, 
         들어맞기(適合)나 바이어빌러티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  인지는 주체의 경험 세계 조직화를 돕는 것이지, 
         객관적인 존재론적 실재의 발견을 돕는 것이 아니다.

    네 가지 가운데 마지막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라 생각된다. 개념 구성의 방식과 수단에 관한 한 그토록 많은 탁월한 아이디어들을 가졌던 칸트조차도 존재론적 진리의 탐색을 포기하는 쪽으로 기울지는 않았다. RC에 대한 상당수 진지한 비판자들조차도 그와 똑같은 집착에 빠져 있다. 이러한 알기 이론은 형이상학적 제안으로 취해진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유용성에 따라 검사받아야 하는 도구로 의도된 것임을, 그 비판자들은 숙고하기를 거절한다. 

 

 

*주의: 주석들은 생략되었다.  RC(1995: 2014) 참조하시오.

 

Radical Constructivism - NHK's Korean version of EvG(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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