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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주의와 파시즘 & 구성주의에서 윤리 문제

상대주의와 파시즘 & 구성주의에서 윤리 문제

(Relativism, Fascism, and the Question of Ethics in Constructivism)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A University of Massachusetts <evonglas@hughes.net>

번역: nhk

 

 

목적

- RC는 경험적 실재(現實))란 각 개체가 창조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RC는 하나의 생각하기 방식으로, 의심할 바 없이, “주관주의/주관론”과 “상대주의/상대론”라 칭하는 지식 이론들에 속한다. 이 논문은 이태리 철학자, 아드리아노 틸거가 행한 상대주의와 파시즘 사이 관계 분석을 다루고, 이러한 연결이 구성론과 구성론의 윤리적 조망에 끼칠 가능한 영향을 검토한다.

 

접근

- 개념 분석과 틸거의 논증에서 모순 증명.

 

결과들

칸트의 정언 명령에 내재한 윤리에 대한 검토는, 주관론의 지향성이 아나키즘을 시사할 수는 있지만 결단코 파시즘을 함의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의미

- 이러한 탐구로 구성론과 파시즘을 연관시키려는 구성론 비판자들을 더욱 곤란케 할 것이다.

 

핵심어들

- 상대주의/상대론, 주관주의/주관론, 윤리, 정언 명령.

 

 

 

“체계적/구성론적 교육학은 […] 세계관들의 구성성(構成性)을 인정하지만, 관찰 가능성을 엄격히 제한할 세계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결정을 할 수는 없다. 구성론자 또한 일상적 그리고 정치적 결정을 해야만 하지만, 관찰자로서 자유는 구성론자한테 훨씬 큰 의미를 갖기에, 구성론자는 모두를 위한 구성물로 기능해야 하는 유일관(唯一觀)의 폭정에 복종하기보다는 상호 양립 불가능한 견해들을 견뎌내는 것을 선호한다.” Kersten Reich (1996: 21)

 

서문

 

Probabilismo(개연론) 서두에, 수학자 브루노 드 피네띠는 자신의 철학에 대한 총괄적 진술로, 나를 강하게 잡아끈 구절을 인용했다:

 

“이제 진리는 관념의 허구적 균형에 그리고 마음 밖 어떤 것에 있지 않다; 진리가 마음 밖에 있다면 그걸 접해 그 의미를 얻을 방도가 없다. 진리란 사유자(思惟者)의 생각하기 행위에서 생겨난다.[…] 생각은 우리 외부 변치 않는 실재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다; 생각은 단지 생물학적인 기능, 삶에서 생각 그 자신의 방향을 잡는 도구일 뿐이다.(de Finetti 1989:169).

 

이 인용구에, 그 당시, 놀라지 않을 구성론자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 십년 앞서 아드리아노 틸거가 1921년 첫 출간된 그의 에세이 Relativisti contemporane (“당대 실재론자들”)에서 썼던 것이다. 그 에세이는 한스 바이힝거, 알버트 아인쉬타인, 루이 루지에르(앙리 포앙카레의 해석자), 그리고 오스왈크 스펭글러의 인식론적 관념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였다; 내가 이들 저자들에 지극한 관심을 가진 까닭은, 이들이 구성론을 예지하는 생각들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태리에 있는 한 친구를 통해, 틸거의 에세이 네 번째 판(Tilgher 1923), 너덜너덜해진 복사본을 얻을 수 있었다.

 

 

상대주의와 정치

 

아드리아노 틸거(1887–1941)는 다작(多作)의 사상가였다. 그는 그리스 철학자들, 실용주의, 지식과 실재, 미학, 그리고 연극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십여 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다. 에세이,“당대 실재론자들”의 마지막 두 절에는 ‘오늘날의 관념론과 상대주의 그리고 혁명’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거기서 주관론이 정치 그리고 윤리와 연결되는 점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최근의 관념론(승화시켜 핵심만 추출한 칸트)의 성공은, 그것이 개인 행위에 주안점을 둠으로써, 전쟁과 연루된 세대를, 여타 철학들 이상으로, 만족시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Tilgher 1923: 76). “ 개인들은 더 이상 그들 행위들이 […] 제도(制度)들로 결정화(結晶化)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행할 수 없다. [… 그들] 행위의 유일한 이유는 더 이상 황무지로 비행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 저주받은 절망적 세상에서 행위를 통해 벗어나고픈 소망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행위를 위한 행위, 행위로 인한 행위, ... 계속... 끝없이...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부정적 목적만을 취할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전복(顚覆)(Tilgher 1923: 90–91).

 

전쟁의 결과, 그가 설명하길, 국가의 권위는 “무산계급의 공격”(Tilgher 1923: 76)에 무너졌고, 이어 초래된 파시즘 운동은 <국가는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믿고 그런 국가이기를 바라는 이들이 거듭거듭 만드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파시즘이란, 틸거 왈, 정치에 이식된 절대적 행동주의일 뿐이다. 주석에서 그가 언급한 바,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상대주의와 액티비즘”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표현했다(1923: 77). 틸거는 그의 친구, 루이지 피란델로가 1924년 파시스트당에 합류하자 연을 끊었을 정도로, 파시즘을 흔들림 없이 적(敵)으로 대했던 것으로 보인다(cf. Morini 1992).

 

**액티비즘: 논쟁의 한편을 지지 혹은 반대하기 위해 직접적, 열성적 행위를 강조하는 교설이나 관행; 혹은, 정치적, 사회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직접적, 물리적 행위를 취하는 노선을 가리킨다. 액티비즘을 실천하는 이를 활동가라 부른다.

 

 

상대주의가 파시즘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나의 주목을 끈 까닭은, 구성론 비판자들이 구성론은 히틀러와 같은 파시스트적 태도와 운동들로 가는 길을 마련하고 있다는 암시(暗示)를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이를테면, Linke & Kurthen 1995: 281; Gehrke 1996: 174; Jones 1999; Dean 1996). 이러한 비난은 정치적 운동의 성장이 합리적 논증들로 방해받을 수 있다는 암묵적 가정에서 비롯되고 있다. 내 논문 비평가들 가운데 한 명은 내 글이 “지도자의” 주관적 독재에 반대하는 논증들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내가 보여주려 하는 바처럼, 주관적인 윤리적 원칙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합리적 논증들이란 있을 수 없다 (글 시작부의 라이히 인용구 참조).

 

칸트한테서 주관론의 그럴듯한 소스를 찾아낸 다음, 이어 틸거는 <주관론에서 한 발만 더 딛으면 개인 행위의 정당화요, 아나키즘이요, 그리고 파시즘이다>라고 주장한다. 칸트 주관론의 기초는 정말이지 견고하다. 하지만, 나는 칸트의 견해는 아나키즘과 양립할 수는 있어도 분명코 파시즘과는 양립할 수 없음을 논증할 것이다. 그에 대한 칸트의 입장과 관련해서 다음 진술들은 여하한 의심도 남기지 않는다:

 

“Der Mensch denkt mit seinem Verstand ursprünglich, und er schafft sich also seine Welt”[그들 오성(마음, 이성)으로 인간은 최초 생각들을 생성시키고, 이어 자신들의 세계를 창조한다](Kant 1798: 71)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창조하기”는 액티비즘 비슷한 걸 가리키고 있지만, 칸트가 말하고 있는 건 심적 조작들이지, 파시스트 교설의 코어(核心)에 해당되는 신체적 행위가 아니다. 또한, 칸트의 주관론은, 다음 절에서 다시 논할, 그의 윤리 이론에서 나타난다.

 

틸거에 따르면, 그가 상대주의의 근원으로 여기는 관념론에서는 사고 작용은 매 순간 실재를 조성하고, 그렇게 현존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생성시킨다 (Tilgher 1923: 80). 이러한 경험적 실재/현실의 무상함/덧없음/허무함에 기초하여, 그는 <이는 그 순간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상보다 더 완전한 실재를 함의할 것이기에 여하한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논증한다.

 

“다양한 마음의 산출물들 모두가 완전하고 주어진 순간 거기 있는 모든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들 사이 가치 차이를 찾아낼 수 있는가? 그리고 가치 차이들 없이, 어떻게 진보 또는 역사와 같은 개념 발달이 가능할 것인가? 마음의 순수한 작용은 그렇게 절대적으로 동등한 무수한 행위 중심들로 해체된다. 이러한 절대적 액티비즘은 절대적 상대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아나키즘을 초래한다”(Tilgher 1923: 80–81).

 

상대주의는 아나키즘과 파시즘 양자로 동시에 이어질 수는 없다. 아나키즘은 히틀러의 교설뿐만 아니라 무솔리니의 것과도 양립할 수 없다. 양자 모두 윤리를 강제할 수 있는, 그리고 개개인들의 <하고 싶은 대로 할 자유>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실시하는, 경직된 강력한 국가 구조를 필요로 한다. 콘사이스 옥스퍼드 정치학 사전에서, 아나키즘은 “사회는 강압적 상태 없이 조직될 수 있고 조직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의된다. 이것이 바로 폴 파이어아벤트가 자신을 “인식론적 아나키스트”(Feyerabend 1978: 21, note 12)로 묘사할 때 품었던 관점이다. 그는 자신은 대중적, 호전적 형식의 아나키즘이 아니라 절대적 규범 또는 규칙들의 부과를 전적으로 반대하는 온화한 형식의 아나키즘을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그의 유명한 에세이 Erziehung nach Ausschwitz (“아우슈비츠 이후 교육”1967)에서 썼던 것과 잘 어울린다: “아우슈비츠 원리를 거부하는 진정한 단 하나의 권능은 자율이다; 칸트 표현을 쓰자면, 반성하는, 자기-결정하는, 추종(追隨)하지 않는** 힘이다.”그리고 이것이 내가 아나키즘을 생각하는 방식이다. 파시즘은 그와 같은 개인주의를 반대하는 정반대 편에 서있다. 파시즘은 자신이 전능하며 나무랄 데 없다고 여겼으며 강압에 관해 여하한 거리낌도 없었다. “Mussolini ha sempre ragione ”(무솔리니는 항상 옳다)는 이태리에서 슬로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히틀러가 접수하기 전까지 익살스런 반대는 있었기에, “Anche se sbaglia!”(또한 그가 틀렸을 때도)라는 말들을 하곤 했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와 무솔리니 치하에서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박해받고 투옥된 이유다.

 

** 필자는 여기서 ‘Nicht-Mitmachen’을 ‘<참여(participate)나 협력(cooperate)하지 않기>로 번역하지 않고 <not-going-along: 따르지(즉, 함께 하는 척하지) 않기>로 번역했다. 해서, 역자는 <추종, 추수하지 않기>로 번역한다.

 

 

윤리와 구성주의

 

내가 <칸트 윤리 이론에는 주관주의/아나키스트 요소가 있다>는 결론에 이른 방식은 그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보이는 그의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 정식에서 나온 것이다. 표현 방식이 항상 전적으로 같지는 않지만, 변형들도 모두 칸트의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들”)에 있는 기본 진술들과 양립 가능한 것들이다:

 

“ Handle nur nach derjenigen Maxime, durch die du zugleich wollen kannst, dass sie ein allgemeines Gesetz werde ”(Kant 1785: 421).

“Act only according to that maxim by which you can at the same time will that it should become a universal law”(Translation: Encyclopedia Britannica 2004).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이것은 이제껏 내가 본 최고의 영어 번역이다; 단 하나, “allgemein”을 보편(universal)이 아닌 “일반(general)”으로 했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많은 저자들은 그러한 준칙(準則)이 염원하는 행위 준칙이 아닌 이미 현존하는 절대 법칙을 뜻하게끔 이 명령을 요약했다. 내 이태리 철학사전(Abbagnano 1964: 461)에서는 심지어 정언 명령을 “그 자체로 좋은” 행위 명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칸트가 뜻하려 한 것이 아니다. 준칙(혹은, 格率)은, 당신이 ‘일반 법칙이 되도록 의도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분명히 말했다. 타자들이 채택했으면 하고 바라는 준칙은 당신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당신은 주관적 직관이다.** 달리 말해, 당신이 행해야 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따라, 행해야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당신은 그런 방식들로만 행해야 한다. 칸트는 되는 대로 단어들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당신은 의도할(will) 수 있다”고 썼을 때, 그가 뜻한 건 염원(wish)이지 승인된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었다; 염원(念願)으로, 그 준칙에는 근본적 주관성이 수반된다. 그의 Canon of Pure Reason (1787: 833)에서 칸트는 수사학적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가 설명하길, 이것은 일상의 실용적 질문이며 이성의 영역에서 그와 같은 답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도덕적 질문, 즉, 이성이 다룰 수 없는 질문일 수도 있다.

 

기대한 대로, 칸트 역시 일반 윤리 규칙들이 획득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들”이란 제목으로 지시한 바와 같이, 그걸 하기 위해 그는 형이상학으로 전향해야 했다. 그는 신(God)과 사후(死後)와 같은 생각들에 기댔고, 이어, 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펼친 지식 이론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피했던, 전통적, 비합리적 형이상학으로 전향했다.

 

하인츠 폰 푀르스터의 가르침, <항상 “나는 ... 해야 해”라고 말해야지, 결단코 “너는 ... 해야 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Foerster 1993: 354)도, 마찬가지로, <윤리적 처방은 개인적/사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에, 결코 강압을 수반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1960년대, 히피 시대에, 10대였던 한 여인이 나한테 설명하길, <당신 자신의 윤리 발달시키기에는 정말 문제될 게 없어요: 당신은 당신 부모가 가하고자 했던 모든 규칙들을 믿지 않았지만, 불쾌한 결과들로 이어지는 것들은 피하는 건 배웠지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일차 바이어빌러티(生存發達性)>의 예기치 않은 적용 사례였다: 즉, <인지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행위 수준에서도 작동한 것은 작동할 수 있는 것으로 보유(保有)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관적 행위 규범 혹은 규칙들의 생성 기초다. 이것은 연장되어 내가 자주 언급했던(Glasersfeld 1983: 223, 1995: 120) 주장을 포괄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 규칙들과 비슷한 것들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타자들”에 대한 우리 구성을, 2차 바이어빌러티(viability)의 기초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사적/개인적 윤리를 초월한 것으로 이어질 수 없다; 예술 작품들에 대한 연구가 아무리 많아진다 해도 미학에 객관적 기준을 제공할 수 없는 것처럼.

 

** 직관(intuition): 시공간 형식에 나타남(現象)을 필요로 하는, 즉, 감각 영역에 한정되는, 그래서, 경험적 지식이 되는, 떠오른 것(表象)들 또는 그것들 사이 관계에 대한 지각.

 

 

결론

 

상대주의 혹은, 실상, 구성주의가 파시즘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는 비난은 어찌 보아도 경솔한 것이다. 윤리에 대한 일반적 생각들로 정치 체제에 대한 선택이 결정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태리와 독일에서 지배적이었던 윤리의 기독교 버전은 파시즘과 나찌즘을 방지(防止)했어야 했다. 하지만, 카톨릭 교황, 파첼리 뿐만 아니라, 수많은 카톨릭 사제와 개신교 목사들 또한 전체주의(全體主義)** 운동에 반대하는 그들 목소리를 높이는 데에는 실패했다.

 

 

** 개인은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정부나 지도자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정치사상 및 정치 체제.

 

사회/정치 운동들은 그 자신의 윤리를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 운동들이“옳든 그르든 내 나라”와** 같은 훈계들을 강조하거나, 그들 정당 또는 그들 지도자를 의심 없는 복종을 요구하는 아이돌(偶像)로 바꾸는 경우, 열리는 길은 여하한 윤리적 숙고도 없는 집단(動員) 행위들로 가는 길이다. 그때 복종은 전적으로“좋은/선한/착한” 일이 되고, 개인은 책임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주장된다.

 

** 독일 혁명가이자 미국의 군인, 정치가였던 칼 슈르츠가 한 유명한 말: "My country, right or wrong; 옳다면 옳은 걸 지켜야 하고; 틀렸다면 옳게 바로잡아야 한다".

 

합리적인 인식론 모델들은 윤리적 기준도 미학적 기준도 결정할 수 없다. 그것들은, 비트겐쉬타인이 명확히 진술한, 이성에 접근할 수 없는 영역, 형이상학의 일부다. 그럼에도, 급진적 구성주의(RC)는, 자신의 귀결로서, 윤리 체계 그 자체가 아닌 그 체계 발달의 출발점을 제시할 수는 있다. RC의 제시: 당신이 (즉흥적으로가 아닌 경험 사실들로 제약 받으며) 구성한“타자들”의 행위들이 당신 자신의 것들과 비슷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경우, 그것들은 이차 바이어빌러티를 확증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오직 타자들이 강압 없이 행위하고 있는 경우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아나키즘의 원리에는 아주 잘 들어맞는 것으로 보이지만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적 규범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감사

 

이 논문 원고에 의견을 준 마리 라로첼리, 마크로 베토니, 그리고 알렉산더 리글러한테 매우 도움이 되었다는 고마움을, 그리고 지그프리트 쉬미트한테는 참고서 관련 도움을 받은 것에 고마움을 전한다.

 

주석들

 

따로 언급한 것을 제외한 모든 번역은 내 것이다 .

급진적 구성주의 비판가들은, 타자들에 대한 (RC의) 이러한 “사용”은 칸트의 정언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Ott 1995: 394). 이는 한참 빗나간 생각이다. 우선, 그들이 염두에 둔 건, 칸트의 진술:“당신이 자신의 입장에 있든, 또는 다른 어떤 입장에 있든, 인간성을 항상 목적으로, 그리고 결코 그저 수단으로가 아니라 항상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하라”(Kant 1785: 429)이다: 이것은 “정언(範疇:catogorical))” 명령이 아니다; 칸트는 이것을 “실천(實際:practical)” 명령으로 정식화 했다. 둘째,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 당신 자신의 생각하기와 행하기의 바이어빌러티 수준을 상승시키기 위해 타자들을 사용하기는 타자들을 “물(物)”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 행하기들에 대한 당신의 해석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참고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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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tgenstein L. (1933)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Kegan Paul, London.

 

 

Received: 27 March 2009

Accepted: 2 July 2009

 

 

 

윗글, 아도르노 인용문의 ‘아우슈비츠 원리’에 대한 이해를 위한 참고 번역

 

 

아우슈비츠 이후 교육

 

테오도르 아도르노

 

아우슈비츠 이후 교육

 

테오도르 아도르노

 

모든 교육에 요청되는 최고 사안은 아우슈비츠는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 모든 교육은 야만주의에 반대한다. 야만주의의 재발 위협을 거론한다. 하지만 그것은 위협이 아니다; 아우슈비츠가 바로 이러한 재발이며, 야만주의는 그러한 재발을 선호하는 근본 조건들이 대체로 변치 않고 지속되고 있는 한 계속된다. ..... 프로이드의 통찰력 가운데, ... 문명 자체는 반문명을 만들어내며 점차 그것을 강화시킨다. ... 만약 야만주의 자체가 문명 원리에 새겨진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반대를 부각하는 시도에는 절망적인 어떤 것이 있다.

 

이러한 절망으로 사람들이 틀에 박힌 진부한 사고에 굴복하지 않도록 그들을 각성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아우슈비츠 재발을 막는 수단들에 대한 반성에서 보자면, 앞이 깜깜해진다. ... 무고한 수백만의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살해되는.... 일이, 엄청 역동적인 진보, 계몽, 그리고 인문주의의 성장과 비교되어 무시되는 역사 과정의 일탈 정도인 피상적 현상으로 무시될 수는 없다. ....대학살은 19세기 말 이래 수많은 나라들에서 발전된 이러한 공격적 민족주의의 부활에 그 뿌리가 있다.

 

더욱이, 단 한 발로 수십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원폭의 발명도 대학살과 똑같은 역사적 맥락에 속한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

 

오늘날, 객관적 – 즉,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 조건들의 변화 가능성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에, 아우슈비츠의 반복을 반대하는 시도들은 필히 주관적 영역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또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핵심적이라는 뜻이다. 나는 영원한 가치들에 호소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는 걸 믿지 않는다; 그것들에 대해 잔혹한 일을 저지르는 이들은 그저 어깨 한번 으쓱거릴 뿐이다. 나는 또한 박해받는 소수가 지닌 긍정적 소질을 드러내 계몽하는 것 또한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뿌리는 박해자한테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가장 하챦은 핑계로 살해되는 희생자들한테서 찾을 일이 아니다. ... 사람들이 그와 같은 짓을 하게 만드는 메커니즘들을 알아야 하고, 이들 메커니즘들이 그들한테 보이도록 해야 하며, 이들 메커니즘들에 대한 일반의 각성을 일깨움으로써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걸 방지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오늘날 여전히 많은 이들이 기도하는 궤변적이고 풍자적인 의미에서도, 희생자한테는 죄가 없다. 오직 반성 없이 그들한테 자신들의 증오와 공격을 분출하는 이들한테만 죄가 있다. 이러한 반성의 결핍에 반대하는 노력을 해야 하며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에 대한 반성 없이 외부로 폭발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판적 자기-반성을 지향하는 교육만이 진정 의미 있는 교육이다. ...어린 시기에 형성되기에, 그러한 재발을 막는 교육은 어린 시절에 집중되어야 한다. .... 철저히 사회화된,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 같은 환경에 감금된 느낌을 갖는, 통제, 관리되는 세상에서 인간성의 폐쇄공포증을 언급할 수도 있다. ... 이는 문명에 반대하는 분노들 키운다. 그것에 대한 저항, 반란은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박해의 전역사를 통해 확인되었던 패턴은 약자에 대한 분노는 특히 사회적으로 약자로 인지된 이들 그리고 동시에 옳든 그르든 행복하게 보이는 이들을 타깃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 위계화된, 문명화된 삶의 표면 아래 깔려 있는 이러한 경향들은 극한에 다다랐다. 구체적인 모든 것들에, 사람들 개개인에, 그리고 개별 조직들에 만연한 ‘보편’으로 가해지는 압력은 구체적인 것들, 개인들을, 그들 저항력까지 함께 파괴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저항력을 상실하면서, 사람들은 또한 어떤 순간 재차 잔혹한 짓을 저지르도록 자신들을 유혹하는 것들과 맞설 수 있는 자질을 박탈당한다. 그 '보편'이 그들이 반쯤만 믿거나 혹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그 어떤 ‘아이디얼(理想 혹은 그와 같은 모델)’인 한, 십중팔구, 그들은 체제 권력이 한번 더 그들한테 명령할 때, 거의 저항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아우슈비츠 이후 교육에 대해 말할 때, 그때 두 가지 영역을 말하고 있다. 하나는 아이들 교육, 특히 어린 시기; 이어, 재발이 더 이상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지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분위를 제공하는 일반적 계몽이다..... 그밖에 많은 유럽 나라들에서 권위적 행동과 맹목적 권위가 형식적 민주주의 조건들에서 기꺼이 인정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훨씬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다. 오히려,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그렇게 야기된 파시즘과 테러가, 사람들이 아직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사이 제국과 같은 낡은 체제 권력이 부패하고 뒤흔들렸다는 사실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들 앞에 떨어진 자유가 불평등하다는 걸 입증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어 권위적 구조들은 이전에 채택했던, 또는 어찌 되었든 폭로되지 않는 파괴적인, 제정신이 아닌 차원을 채택하는 것이다. 더 이상 실제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권력자의 방문들이 전국민 사이에 엑스타시 분출을 유발시키는 방식을 고려하는 경우, 체제 권력은 현재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파시즘 재발이든 그것을 막는 것이든 결정적 측면서 그것은 심리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내가 심리학에 대해 그토록 많은 걸 언급한 것은, 보다 많은 핵심적 측면들이, 이제까지, 교육의 영향 범위 밖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악의 없는 사람들도, 아주 자주, 유대/결속(bond) 개념을 불러일으켜 조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더 이상 여하한 유대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그렇게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실상, 권위/권력의 상실 - 가학적(사디스틱) 권위주의적 공포의 조건들 가운데 하나 –은 이러한 사정과 연결되어 있다. 공감(共感) 상태로“네가 그럼 안 되지”하고 말하는 식으로, 가학적, 파괴적, 그리고 황폐해진 충동들을 가로막는 유대(紐帶)들에 호소하는 것은, 정상(正常) 상식에서, 그럴듯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유대/결속에 호소하는 것이 진지한 방식으로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환상으로 간주한다 – 물론, 사태들이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진행되도록,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결속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구 또한 환상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실질적인 어떤 걸로 경험하고 있는 유대가 아닌 결과, 그 결과가 좋은 것일지라도, 오로지 결과만을 산출하도록 요구하는 유대/결속의 허위성은 아주 재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대다수 어리석고 순진한 이들이 그들보다 나은 사람들의 약점을 발견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재빨리 반응하는 걸 보더라도 그렇다. 소위, 유대/결속이란 쉽게 (좋은 시민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 사이에 들어감으로써) 공유된 신념들의 증표가 되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는(북치고 꽹과리치며 불러모아 유대/결속을 강화시키고 있는) 심리적으로 그들 반대편에 악의에 찬 분노(敵意)를 내뱉게 만든다. 그들은, 개체 자신의 이성(이유)로는 정당화 할 수 없는 규칙들에, 규범들에 의존하게 되는 상태, 즉, 타율(heteronomy)에 이르게 된다. 심리학에서 초자아, 양심이라 부르는 것의 자리에 외부의, 고삐풀린, 그리고 교체-가능한 권위/권력들이 유대/결속/연대라는 이름으로 들어선다; 독일에서, 제3제국의 붕괴 이후 아주 명확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다. 그럼에도, 규범이라는 외피를 쓴 채, 권력에 아주 기꺼이 협조, 공모하고, 더 강한 자들에 표면상 복종하는 것은, 다시는 생겨나지 말아야 할 가해자의 태도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 결속, 그리고 (공동 책임이 없는) 연대를 옹호/지지하는 것은 아주 치명적이다. 대체로 자발적으로 이것들을 택하는 사람들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일종의 영구적 강박(强迫) 상태에 놓이게 된다. 아우슈비츠 원리를 거부하는 진정한 단 하나의 권능은 자율이다; 칸트 표현을 쓰자면, 반성하는, 자기-결정하는, 추종(追隨)하지 않는 힘이다.

 

....... 이후 7페이지 정도 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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