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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네틱스와 삶의 기예

사이버네틱스와 시스템 연구에 관한 13차 유럽 회의

1996, 4, 9-12, Vienna 

총회 연설

 

사이버네틱스와 삶의 기예

(Cybernetics and Art of Living)

 

Ernst von Glasersfeld

Massachusetts 대학,  Amherst,   USA

 

번역: 살클리

 

나는 오늘 연설을, 보통 하듯이, 평범한 우스개 소리로 딱딱한 총회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며 시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Trappl 교수의 발표는 나를 쇼크 상태에 빠뜨렸습니다.

지난 두 주 동안은 여행을 다녔기에, 나는 지금에서야 Gordon Pask의 임종을 들었습니다. 너무 상심이 커서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Gordon은 30 여년 전 내가 미국의 대학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아낌없이 나를 후원했던 이로, 그의 관념들이 나의 생각하기 발달에 주었던 도움을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한 친구를, 그가 제공했던 영감에 대해 충분한 고마움을 전하지도 못한 채로 보냈다는 격심한 후회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박식한 학자가 사이버네틱스를 발명한 이들에 대한 너무나 많은 흥미진진한 개인적 지적 항목들이 되돌이킬 수 없이 잊혀지기 전에 사이버네틱스의 첫 10년, 혹은 15년의 역사를 수집하고 기록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말로 이 연설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불행히도, 박식한 학자가 아닙니다. 나는 이러한 혁명적 분과의 발전을, 이에 깊이 영향을 받았던 열렬한 아웃사이더로서, 단지 우연히 목격했던 기회들을 가졌을 뿐입니다.

최초 나를 뒤흔들었던 요점은, 창시자들이, 그 가운데서도 Nobert Wiener와 Warren McCulloch이 두드러지게, 그들의 기획을 단지 기술 또는 기법으로서 뿐만 아니라 철학에 대한 새로운 그리고 강력한 접근으로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두 관심사들은 빨리도 갈라섰고, 사이버네틱스의 대대적인 수학적, 기술적 성공들은 최근까지도 그 철학적 잠재력을 사실상 덮어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진행할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토론 목록을 보고 판단하건데, 이 회의의 초점 또한 대부분 다양한 영역들에서 진행된 기술적 혁신들과 새로운 응용들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사이버네틱스와 살며 쓰는 슬기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나는 다만 여러분이 연설이 끝난 후 나를 용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Warren McCulloch이 1948년 Virginia 대학의 한 강연에서 했던 진술을 회상하며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한 말로, "하나의 가설을 거짓으로 입증했다는 것은 정말이지 지식의 절정, 극치다." "실재" 세계는 우리가 옳았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틀렸을 때 우리한테 나타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우리가 일정한 방식들로 행위하는 것을 방해하는 제한들입니다.     

60년대 초반 McCulloch의 논문을 읽던 그 때, 나는 전통적 인식론에 속속들이 오랫동안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진술은 일종의 계시였습니다. 얼마 후 나는 Gregory Bateson의 논문, "사이버네틱스를 사용한 설명"(1972)을 우연히 읽었는데, 거기서 그는 사이버네틱스와 그밖에 다른 과학적 기획들 사이에 만들어진 차이는 사이버네틱스가 능률적인 원인들보다는 제한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진화론을 가장 적절한 사례로 들었던 까닭은, 자연 선택은 오로지 적응하지 또는 들어맞지 못한 것들만을 제거하기 때문입니다. 유기체를 생존하도록 하는 속성들은 선택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 변이들의 결과들입니다. 

진화론은 종들과 그것들을 특징짓는 유전 가능한 속성들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 어떤 지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것들인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형성하고 있는 유기체들은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속성들을 갖고 있거나 아니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기체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는 많은 유기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배우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전 가능한 것들이 <그들의 생존을 도울 수는 있다>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의 그 어떤 제한들을 피하는 것을 배웁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그들 환경이 그들이 나아가는 경로에 설정한 장애들 사이에 더 잘 맞아들어가는 것을 배웁니다.   

누구든 들어맞기라는 이러한 관념을 받아들여, 우리가 우리의 삶을 가꾸어가고자 할 때 바탕이 되는 지식을 어떻게 얻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적용할 경우, 전통 철학자들의 대다수 인식론들과는 뿌리부터 다른 알기 이론에 이르게 됩니다. 

Vienna(학파)는 "진화론적 인식론"의 요새와 같은 것이기에, 나는 내가 말하고 있는 인지 모델은 그러한 틀과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이버네틱스에 포함되는 모델에서 지식은 결단코 실재 세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 그 주요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할 수 있는 또는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지식입니다. 자신들을 제한들로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장애들은 그저 경험에 다가가 쓰일 수 있는 공간이 갖고 있는 한계들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유기체의 경험하기 방식과 관계해서만 실존하는 것들이지, 독립된 실재의 표상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식은, 이 이론에서, 실재에 대한 그림 또는 모사가 아니라, 과거 경험 속에서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던 행위들과 생각들의 레퍼토리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알기 이론은 진짜 또는 참된 표상이라는 나름의 관념을 살클수라는 나름의 관념으로 교체합니다. 다른 곳에서(cf. Glasersfeld, 1995) 펼쳐 보이고 있는 이 이론의 세부 항목들을 검토하기보다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손쉬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나는 지난 열흘간을 Montblanc 근처의 Chamonix 계곡과 산들에서 보냈습니다. 그것은 향수에 젖어드는 경험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40년 전까지만 해도 허다한 봄날들을 알프스의 빙하 위에서 스키를 타며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는 스키를 탈 수 천의 사람들을 산꼭대기로 실어나를 케이블카나 다른 기계적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거기 혼자 있고 산 아래로 스키를 타고 내려오고 싶다면, 여러분은 먼저 산을 올라야 합니다.

돌이켜 보니, 그것은 제한들을 다루는 훌륭한 사례로 다가왔습니다. 산을 오르거나 내려오고 싶을 때는 산을 상당히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정상에 도달하고 싶었고; 그래서 단순이 쉽게 오르는 길을 찾았으나 그것이 실수였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경험 많은 등산가라면, 맨 먼저 가서는 안되는 곳들을 파악합니다. 산 또는 눈 사태가 일어날 곳, 얼음이 깨진 곳, 크레바스, 그리고 그밖에 다른 치명적인 제한들을 알고자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산의 변덕스러운 부분들에 대한 윤곽을 그리고 나서야 오를 계획에 착수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여러분은 선택들을 하지만 그 선택들이란 산이 갖는 제한들 사이에 남은 공간 내에서 선택들입니다. 산을 "안다"는 것은 여러분이 그 산 비탈면들 위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살클 수 있는 경로들을 배웠다는 것을 뜻합니다. 

누구든 허다한 방식으로 살클수라는 나름의 개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방식들 가운데 하나는 아주 오래 전 Leibniz와 Maupertuis가 정식화했던 원리입니다: 각각, 최소 행위의 또는 최소 저항의 원리. 

물은 할 수 있는 한 중력이 이끄는 대로 따를 것입니다. 비로 되어 언덕에 내리면, 빗물은 찾은 길을 따라 흘러내립니다. 멈추게 되면, 모아질 것이고 결국에는 장애물을 넘어 흐르거나 에돌아 흐를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이어, 그 언덕의 모양을 바꿔, 새로난 길들을 살클 수 있도록 하며, 아울러 새로운 제한들과 마주칩니다.

이제 그만, 사이버네틱스의 기원들로 되돌아 가겠습니다. 원인들에서 제한들로 주의의 초점을 전환시킨 것 외에도, 사이버네틱스는 통신 이론을 전개하여 또 다른 근본적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Claude Shannon이 그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했을 때, 그는 새로운 장을 연 그의 논문 첫 두 쪽에서 그가 "정보"라 불렀던 것은 의미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진술을 조심스레 했습니다. 정보원에서 수신 장치에 이르는 통신로를 타고 흐르는 펄스들은 에너지가 갖는 어떤 형식의 변화들입니다. 그것들은 적합한 코드를 소지한 이들한테만 "신호들"입니다. 코드 그 자체는 전송되는 것의 일부가 아닙니다. 신호들은 그 코드의 특정 부분들을 선택하도록 하는 지시들입니다. 그리고 통신 이론에서 "정보"는 코드화된 요소들이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호들이 앞서-자리를-차지한 요소들을 얼마나 많이 또는 그것들 가운데 몇을 선택하고 있는가 하는 척도 또는 비율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겠지만, 누군가가 말을 하고 있을 때 이것들을 떠올리는 것이야말로 잘하는 또는 세련된 행위일 것입니다. 

Norbert Wiener는 자신들끼리 통하는 경제적 통신 시스템을 사용하는 꽃가게들을 멋진 사례로 들었습니다. Vienna에 사는 한 젊은이가 미국인 관광객과 행복한 몇칠을 보내고 이제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한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면, 그는 다가오는 그녀 생일날 꼭가게로 가서 붉은 장미 한다발을 골라 Los Angeles로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꽃가게에서는 그 주소, 보내는 사람 이름, 그리고 특정 숫자, 이를테면 54를 타전합니다. 단순히 두 자리 된 그 숫자는 수신측 꽃장수한테 12 송이 붉은 장미와 메시지 "Happy Birthday"를 선택할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자주 했기에 꽃장수들의 코드를 암기해 알고 있다고 생각치는 마시길. 숫자 54는 내가 방금 지어낸 것이다. 그러나 꽃장수들은 특정 꽃들을 선정하기 위해, 그리고 온갖 종류의 소망과 애도의 말들에 대해 그러한 숫자들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 이러한 언급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단지, 그 숫자는 해당 코드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해석하지, 또는 해독(디코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뜻도 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숫자가 이러한 맥락에서 나르는 "정보"란, 그 숫자는 꽃장수들의 코드가 담고 있는 모든 메시지들 가운데 어떤 항목 하나를 가리켜 선택한다는 것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불행히도, 토대를 이루는 이러한 근본 조건은 거의 모든 언어학자들에 의해 무시당했으며, 그들은 Shannon의 이론을 듣고 미칠듯이 흥분했으며 곧이어 그들의 혼란 혹은 착란은, 그 이론을 Shannon이 의도적으로 "통신 이론"으로 불렀음에도, "정보 이론"이라 떠들어대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인간 언어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의 통신 시스템이며, 따라서 Shannon의 이론을 언어에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지적 해명에 다름아닙니다. 그렇지만 언어는 또한 인공적 또는 기술적인 모든 통신 시스템과는 다른 것입니다. 결정적 차이는, 우리가 언어에서는 앞서-자리를-차지한 코드를 갖고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 있는 한 살 먹은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놀라울 정도로"라고 말한 것은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배워야 하는 언어는 그 아이가 직접 경험하는 장, 또는 영역 내에 있는 화자들이 일정하게 계속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뜻하는 바를 보이는 데 도움이 될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한 엄마가 그의 아이한테 "우리 아가 젖병이 어딨지" 하고 말하고 그녀는 젖병을 가져와서 젖꼭지를 아이 입에 물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쭈주 먹어".

그 아이는 빨기 시작해서 (그때 아이들은 입술에 닿는 것은 뭐든지 빨아대기에), 입 안에서 액체임을 느낍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아이는 그 단어들의 소리와 자신의 입술에 닿는 젖꼭지의 촉감 사이에 어떤 연계를 형성하거나 그것들을 연합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젖병", "쭈주", 그리고 "먹기"에 근접한 의미들을 추리기 전에 그와는 다른 대단히 많은 경험들을 붙잡을 것입니다: 물이나 오렌지 주스 마시기, 컵과 유리잔들, 그리고 다른 많은 말-소리들. 이러한 배우기 상황의 가장 중요한 외관은 이렇습니다: "젖병", "쭈주", 그리고 "먹기"에 대한 경험들, 그 아이가 이들 단어들의 소리들과 연계시키고 있는 이들 경험들은, 그 아이의 주관적 인상(印象)들입니다. 그 인상들은 그 엄마의 것도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실재 세계에 있는 독립된 대상들에 대한 사례들 또는 "물 그 자체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러한 아이-주체가 우연히 경험하는 인상들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 일상어에서 빈번하게 쓰이고 있는 단어들의 경우, 이들 주관적 인상들은 그밖에 화자들과 언어적 상호작용을 거쳐 더도덜도 없이 상호주관적인 또는 간주관적인1)  것이 됩니다. 그러나 누구든 가장 공통으로 쓰이는 단어들조차도 각각의 개별 화자들이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추가된 주관적 뜻을 갖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언어학자들과 언어 철학자들은 통상 이러한 여분을 용어 "언외의 뜻"으로 포괄하며, 이러한 주관적 성분을 "객관적인 문자 그대로의 뜻"에서 깔끔하게 분리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주장은 단어들이 실재하는 세계에 있는 물들을 가리키거나 혹은 그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착각에 기대면서 하는 주장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더 적합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우리 이론에서, 단어들은, 내 보여주었던 것처럼, 개별 언어 사용자의 주관적 경험들을 가리키거나 혹은 그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문자 그대로의 뜻과 언외의 뜻을 분리하는 과정은, 이제는 그렇기에 더 이상 객관성을 수반하고 있지 않는 대신, 그밖에 다른 화자들의 씀씀이와 최대한 잘 들어맞는가 아니면 덜 들어맞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역에서 우리 탐구의 결과는, 단어들과 더 긴 언어 단편들이 갖는 뜻들은 결코 타자들과 "공유"되는 것들이 아닙니다. <이때 쓴 용어 타자들이란, 하나의 언어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한테 같은 사람들로 간주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의미, 또는 뜻들이란, 한 언어를 쓰는 능숙한 화자들 사이에서, 기껏해야 양립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다시 말해, 대다수 상황들 속에서 비슷하게 기능하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공적, 기술적 통신 시스템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입니다. 신호들에 뭔가 의의를 부여하는 코드는, 어떤 통신 또는 의사소통이 벌어지기 전에, 교신자 또는 소통자들한테 이미 확립되어 배포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아이의 인간 언어 습득하기는 행위로 앞서 존재하고 있는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 아이는 새내기로서 그 또는 그녀 자신을 위해 하나의 코드를 만들어 확립해야 합니다. 이것은 셀수 없는 시행착오를 수반하는 힘든 과정이며 기껏해야 살클 수 있는 근접, 혹은 추정을 끌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그것은 끝없이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살았든 얼마나 오랫동안 여러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든, 여러분이 특정 단어를 여러분의 공동체에서 허용된 씀씀이와는 양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써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따금씩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개체한테만 있는 독특한 특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그러한 불일치 또는 어긋난 것이 당면 문제로 되는 상황이 여러분의 과거 경험에서는 일어났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이 살며 쓰는 슬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독해 즉 읽기 기술을 이루고 있는 요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지적 주제를 다룬 어떤 책을 얼마나 자주 보십니까? 그 경우, 첫 몇 쪽에서 여러분은 전혀 의미를 알 수 없을 것 같은 진술과 부딪칠 것입니다. 참을성 없는 독자라면 "이 저자는 엉터리쟎아" 하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책은 한쪽 구석에 쳐박히겠죠.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여러분이 단어들이 갖는 뜻이란 본질적으로 개별 언어 사용자들의 주관적 구성물들임을 명심한다면, 여러분은 판단을 유보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 작가는, 여러분이 자신한테 말하기를, 지적인 사람이기에 그 또는 그녀가 쓴 것은 그 저자한테는 아마도 통하는 뜻이 있겠지. 이러한 경우, 여러분은 이러한 뜻이 무엇일 수 있는지 알아내려는 노력할 것입니다. 상당히 자주 그러한 노력을 해볼만한이유는, 그러한 노력으로 그 텍스트가 몇몇 용어들을 낯선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새로운 방식이 멋진 또는 훌륭한 뜻을 만들고 있음을 또한 깨닫도록 해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힘들여 발견한 것일 경우 그 때마다 여러분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바로 독해 또는 읽기의 더욱 깊은 목적인 것입니다.

철학적 논쟁들의 그 참가자들이 그저 그들이 단어들과 연계시켰던 의미, 뜻들이 단 하나로 정해진 것들이라는 그러한 확신만 하지 않는다면, 많은 논쟁들이 생산적인 토론들로 바뀔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언어의 한 조각을 이해했다고 말할 때 우리가 갖는 뜻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아직도, 책이 쪽들을 담듯이, 단어들도 뜻들을 담고 있다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단어들이 언어적 소통 시스템에서 활자로 찍히거나 말해진다 할지라도 그 단어들은 고정된 어떤 의미, 뜻을 나를 수는 없습니다. 그 단어들은 오로지 독자 또는 청자가 그것들과 연계시켰던 그 무엇을 가리키거나 선택할 수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독자 또는 청자가 주어진 단어들과 연계시켰던 개념적 구조들은, 작가 또는 화자의 경험이 아니라, 개별 주체로서 그 사람의 경험에서 추상된 것들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각 언어 사용자의 연계시키는 과정들 또는 그 연합들은 타자들과 여러해를 거치는 언어적 상호작용으로 적응되어 오면서 갈고 닦아진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이루는 소재들은 그 어떤 경우든 주관적 경험들입니다.

 

이때, 이해하기란 무엇일까요?

 

나는 이해하기란 말해진 또는 쓰여진 것에 대한 여러분의 납득 여부에 달려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단어들이 여러분 안에서 불러낸 개념들, 그리고 문장들이 여러분한테 그것들을 관계시키도록 재촉하는 방식이, 앞섰던 것들로 만들어진 맥락에 들어맞으며 그 화자가 지금 말하거나 하고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철회되지 않는, 개념적 네트워크를 산출할 경우, 여러분은 그때 그 또는 그녀가 의도했던 것을 이해했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물론, 단순화된 설명입니다. 내가 맥락이라 불렀던 것은, 보통, 맥락들을 연결하는 서로 다른 수준들, 화자나 저자와 같이한 여러분의 과거 경험들, 여러분이 만들어 세웠던 일정한 기대들, 그리고 또한 여타의 것들과 같은 수준들로 이루어진 위계를 보통 갖고 있습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요점은, 맥락이란, 화자의 머리 속에서 기원한 개념적 구조들을 받아들이거나 재생산하는 바를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준들에서 들어맞고 있는가 아닌가를 문제로 삼는 것입니다. 화자 또는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에는 결코 영원히 다가갈 수 없습니다 - 여러분은 다만 그 또는 그녀가 실제로 말했던 것을 해석할 수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왜 언어에 관한 이야기로 이토록 많은 시간을 썼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 살기의 많은 부분들이 타자들과 결부 또는 결합되어 행해지고 있으며, 언어는 그러한 사회적 맥락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어적 소통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일관된 모델은 우리들의 사회적 상호작용들을 다루어가는 것에 그리고 이어 우리의 삶에 대단한 도움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모델은 우리 삶들을 더 유쾌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한테 "하지만 내가 당신한테 그렇게 말했쟎아요"라고 막 소리치려고 할 때마다, 말하기란 이해되는 것을 보증하지 않고 있음을 떠올렸다면 그 사람을 상냥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언어 이해하기라는 측면에서 윤곽을 그렸던 해석과 살클 수 있는 들어맞음의 원리는,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우리가 알아차리고 있는 세계, 세상 이해하기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들에 접근할 능력, 수단, 권리, 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이 존재론적 실재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고 지속해야 할 것은 오로지 우리 경험 뿐입니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그리고 느낀 것을 해석하며, 우리가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모델들을 우리는 구성하고 있습니다.

13차에 이른 이 회의의 초반 회차에서, 몇 년 전, 나는 주장했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 우리가 구성했던 모델이 얼마 동안 우리한테 쓸모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 모델로 그 사람이 정말 존재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제어권을 얻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동료는 우리가 기대를 벗어난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화나게 할 수도 있으며, 우리는 "사람이 변했어"라고 <종종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책망하는 조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전 어떤 상황도 두드러지도록 하지 않았기에 우리 모델에 우리가 합체시키지 못했던 외관, 측면을 그 타자는 그저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놀람과 우리의 분노는, 우리가 알고 있는 타자가 있는 그대로의 그 또는 그녀로서 타자가 아니라 우리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경험에 바탕해서 구성했던 모델이라는 바를 명심한다면, 크게 누그려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자, 예건테, 행성계 또는 우주에 대한 모델을 구성하고 있는 과학자한테도 아주 똑같이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모델이 잘 작동하며 제기된 질문들에 유용한 답들을 제공하고 있을 때, 그 모델은 실재에 대한 진짜 또는 참된 기술로 간주되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성의 세차 운동 또는 직선 경로를 따르지 않는 빛과 같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이 관찰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관찰들은 받아들여진 모델의 살클수에 종지부를 찍는 제한들에 다름아닙니다. 그 모델은 과학자들의 확장된 경험 세계에 더 이상 들어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보통 그러한 실패를 어느 정도 불신하며 아주 마지못해서야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충격적 관찰들을 정상적이며 기대되는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새로운 개념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모델이 구성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분과의 토대를 이루는 원리들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이버네틱스란 가능한 것들과 제한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평형을 창조해가는 슬기, 기예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나는 살며 쓰는 슬기라는 이 분과에 대한 살클 수 있는 또 하나의 정의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reference 

 

Bateson, G. (1972) Cybernetic explanation. In Bateson, Steps to an ecology of mind, (pp.399-410). New York: Ballantine.  "마음의 생태학"이란 제목으로 민음사에서 출판됨

Glasersfeld, E.von (1995) Radical constructivism: A way of knowing and learning. London: Falmer Press. 출판되었음

McCulloch, W.S. (1948) Through the den of the metaphysician. Printed in McCulloch, Embodiments of mind, (pp.142-156)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1965.

Shannon, C.E. (1948) The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 Bell Systems Technical Journal, 27, 379-423 & 623-656.

      

 


[1] 용어 “intersubjective”는 용어 “objective”로 가리켜진 의미들 가운데 주관과 독립된 실재에 속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을 제외한 주체들끼리 통한, 동의한, 또는 합의한, 등등의 뜻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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