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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지식과 시적 지식의 통약불가능성

 

과학적 지식과 시적 지식의 통약불가능성*

 

 

 

Ernst von Glasersfeld

Scientific Reasoning Research Institut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1994년 4월 리스본의 삐아제 연구소에서 행해진

 <과학, 신비주의, 시, 그리고 의식에 대한 국제 회의>에서

연설된 내용을 확충한 번역

 

 

 

80년 전, 버틀란트 러셀은 이러한 병치(竝置)에 고유(固有)한 문제들에 대해 그의 책 "신비주의와 논리학"에서 진전시켰던 논의의 기초를 설명했습니다. 두 지식을 다루는 영역들은 전혀 다르지만, 과학적 지식과 시적 지식의 병치로 각 영역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정말 비슷하며, 내 믿기로, 같은 출발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상, 러셀이 분명히 했던 바로, 신비주의 요소들을 논리로 다루는 시도들은 형이상학 분야에서 항상 있었으며, 용어 "형이상학"에는 종교의 신비적 유산만이 아니라 예술 영역에서 신비스러운 모든 것까지 포함됩니다.

 

러셀의 정의는 대다수 철학자들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 점을 정확히 정식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러셀 텍스트의 관련 인용구에서 시작하겠습니다:

 

형이상학 혹은 생각으로 세상을 전체(全體)로 구상하려는 시도는, 그 시작부터,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신비주의로 다른 편에서는 과학으로 내달리도록 한 매우 다른 두 가지 인간 충동의 융합과 갈등으로 말미암아 발전했다. 어떤 이들은 이들 충동들 중 하나만으로 위대성을 성취했고, 또 다른 이들은 나머지 하나만으로 그러했다: 이를테면, 흄이 과학적 충동에 전혀 점검받지 않은 채 사로잡혔던 반면, 블레이크한테는 과학에 대한 강한 적대감과 심오한 신비적 통찰력이 공존했다. 그러나 철학자로 위대했던 이들은 과학과 신비주의 둘 다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그들 한 평생이 되어, 항상 철학을, 몇몇한테는, 엄청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필히 과학이나 종교보다 위대한 것으로 만들어냈다. (러셀, 1917/1986, p.20)

 

나의 불일치는 마지막 문장에서 비롯됩니다. 나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신비적인 것들과 과학적인 것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식을 찾으려 했다는 관찰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내 관점에서, 인식론에서 그들 진전을 가로막았던 것은, 정확히, 처음부터 신비주의에 자리를 배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비주의자의 지혜를 이성의 도구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예외없이 이중의 실패로 귀결됩니다: 한편으로는, 경험을 분리된, 명기할 수 있는, 부분들로 분절시키기 때문에 신비주의자들의 통일성 혹은 전체성에 대한 혜안을 뭉개버리며,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시도는 사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미심쩍게 정의된 용어들을 허용하기에 합리적 사고 규칙들을 손상시키게 됩니다.

 

비트겐쉬타인은 이러한 막다른 곤경을 그의 유명한 금칙으로 표현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무엇, 그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Wittgenstein, 1933; p.189.)

 

이 방식을 택할 경우, 말할 수 없는 무엇과 말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건 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결코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하고 싶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릴 때마다, 그러한 구별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딜레마는 회화, 시, 음악에서 우리를 감동시킨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싶을 때 필시 아주 자주 생겨납니다. 우리는 색채에 대해, 구도, 조음, 연계의 장점에 대해, 상징의 권능에 대해, 그리고 박식한 역사가와 비평가들한테서 주워들었던 모든 것들을 말하려 합니다 - 하지만, 그때 작품에 대한 정서적 반응과 심취를 야기한 실제 원인에는 근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국, 그저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게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50년 전, 표현 "sublime(崇高)"을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의 라틴어 어원, “sublimare: 위로 들어 올리다”를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라도 같은 뜻으로 썼을 것입니다. 이 경우, 당연, 문자로로 명기(明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느끼는 바을 전하려면, 은유(metaphor)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유 연구는 한 동안 유행했음에도, 당대 문헌 어디서도, 과학과 신비주의 사이 관계를 검토하려 했을 때, 나한테는 필수불가결한 것인, 은유의 상이한 유형들을 상세히 구별하는 기준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탈리아 철학자, 지암바티스타 비코는 언어의 합리적 과학적 사용을 신비주의자와 형이상학자의 시적 담화들에서 분리하는 기준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입니다(cf. Vico, 1744). 내 부여한 이 기준의 가치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내가 생각하는 은유 패턴에 대한 간략한 일반적 설명입니다.

 

은유 구성의 목적은 일정 개념에 빚대서 그와는 다른 개념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대체(代替)에는 둘 사이에 유사성 또는 견주어-비교하기(類推)가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은유의 성립 여부는, 우리가 첫째 것에 속하는 하나 또는 몇몇 통상적 특징들을 그것들이 습관적으로 귀속되고 있지 않는 둘째 것으로 옮길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두 개의 항(項)이 항상 연루된다는 사실이, 바로, 비코가 행한 구별의 기초입니다.

 

한편, 그가 말하기를, 특정 경험을 불러일으키고자 몇몇 공통된 경험과 연계된 단어들을 사용한 언어적 표현이 있으며, 또한 이러한 은유를 듣거나 읽는 이라면 누구든 그 특정 경험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은유 유형은 일상어에서 빈번히 쓰이고 있기에 모두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과 둘째 유형의 차이를 분명히 하기 전에,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그 날 난 내 친구 로버트를 만나 그 친구와 페라리를 타고 보스톤까지 날아갔지' 하고 내가 말할 경우,여러분이 은유적 표현 “날아갔지”를 이해하는 것은, 차로 날기와 여행하기 모두 여러분의 실제 (또는 적어도 잠재적) 경험 범위 안에 있기 때문이며, 전달된 특징은 속력임을 가늠하는 것에 아무런 곤란도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유형과 관련해서, 이를테면 찬송가 작가가 쓴 시(詩) 하나를 보겠습니다: "아침의 날개를 얻어 바다 저 너머에 산다면 (If I take the wings of the morning and dwell in the uttermost parts of the sea), …". 이들 단어들을 여러분이 겪었던 것들에 대한 기술(記述)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날개로 알고 있는 것과 아침에 대한 여러분의 개념 사이에는 신비로운 간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 저 너머’도 전적으로 여러분 경험 범위 밖에 있습니다. 이러한 틈이 바로 비코의 둘째 은유 유형입니다. 이러한 은유는 알려진 것을 경험 너머로 투사시키거나, 역으로, 익숙한 것에 신비로운 속성을 부여합니다.

 

물론, 시인들은 두 유형을 모두 사용하며, 블레이크는 두 유형의 연결에서 대가였습니다.

 

Smile on our loves, and, while thou drawest the

Blue curtains of sky, scatter thy silver dew

On every flower that shuts its sweet eyes,

In timely sleep. ...

 

우리 사랑에 미소짓고, 파란 하늘 장막

거두며, 그대 은빛 이슬 뿌려주게나

모든 꽃에: 그 사랑스런 감기운 눈,

잠이 들터. ...

   (-->블레이크, "The Evening Star", ca.1770)

 

하늘, 파란 장막, 그리고 은빛 이슬, 꽃과 눈은 우리 경험에 익숙한 것들이며 그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는 데에는 여하한 곤란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블레이스의 시적 상상력에서, 미소짓기, 걷어내기, 뿌리기 행위들은 밤 별의 특성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래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자아냅니다.

 

놀라운 은유로, 시인은 화자들의 일상 경험 세계에 속하지 않기에 문어(文語)로는 소통 불가능한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공유하고 싶은 것은, 윌리엄 제임스가 사적이자 개인적이라 칭했던 그러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제임스, 1901-1902).

 

시적 은유를 산문(散文)이라 불리는 것들과 구별하는 차이는, 지식의 상이한 종류들을 알아보고자 할 경우 매우 중요해집니다. 다른 과학자들한테도 반복, 접근 가능한 경험 또는 실험들에서 끌어낸 추상들로 과학적 지식을 정의할 때, 두 가지는 분명해집니다. 시적 은유는 과학적 담화와 양립할 수 없으며, 둘째, 시인과 신비주의자의 담화는 과학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시인과 신비주의자들은 과학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적 은유를, 버틀란트 러셀이 말하려 했던 바처럼, 절대적 세계의 통일성(혹은 全體性)을 명백히 보여줄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를 폴 발레리의 말로 표현하면:

 

... 문제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실재하는, 즉, 분리, 정의 불가능한, 바에 대한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상징들을 써서 표상하고자 그래서 주도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지성과 그 의지에 맞서고 있다 (발레리, 1936/1957, p.822).

 

남김없이 모두로 조성되는 통일성 개념은 합리적 사유 규칙에 따르면 성취될 수 없습니다. 이성은 경험의 흐름에서 조각을 잘라낼 수 있습니다. 이어 이성은 이것, 즉, 잘린 것들의 이산(離散) 상태로서 "어떤 것"을 성찰하는 경우 단위 개념을 창조합니다. 후설이(1887)이 주목한 것처럼, 이것이 또한 ‘사물(事物)들’ 발생의 최초 단계가 되는 것은,잘린 것들 사이 두어지는 것에 대한 반성들이 잇따를 때입니다. 여기서 밀접하게 관련된 점은, 단위 개념이 경험의 끝없는 흐름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경험에 끝이 없는 것은, 합리적 관찰자로서 우리는 단지 경험이 시작된 한 참 뒤에서야 알아차리며 경험이 멈추면 더 이상 거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역주1) 

 

 

이산 상태의 어떤 것이 자리잡힐 수 있는 배경으로 요구되는 이러한 조건은, 빅뱅 이론에서 문제가 생기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이 이론은 우주의 생성과 발달을 모두 다루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정확히 그 이론은 일종의 역사임을 사칭하고 있기에, 즉각,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묻도록 합니다. 이는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판명되며,과학은 그러한 것을 다룰 수 없습니다. 과학은 우리가 경험 현상들을 조직, 체계화시키는 것을 돕는 개념적 모델을 합리적 사유를 써서 구성합니다.

 

두 가지 유형의 은유들에 대한 비코의 구별은, 시적 지혜 유발 과업(課業)에서 과학적 과업을 분리하는 방식을 제공했습니다. 한편, 이보다 훨씬 앞서, 신학에서 비잔틴 학파는 신비적인 것은 합리적 개념으로는 포착할 수 없음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들 신학자들은, ‘유일신이 전지전능하며 어디서든 현존한다면, 이때 그 신은 우리가 경험에서 마주치는 그 모든 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르다’고 논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개념들이란 단지 우리 경험의 추상들이기에 그 신에 대한 적절한 개념 형성도 바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논증이 결단코 비잔틴 학파의 믿음 또는 그들이 계시에 부여한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한 논증은 그들한테 신비적 지혜와 합리적 지식의 통약불가능성을 알아차리도록 했을 뿐입니다.

 

 

신비적 은유의 권능에 대한 가장 명료한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는, 버나드 쇼의 성. 쟌에서 쟌다르크에게 심문하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서, 심문자, 로베르 보드리꾸르는 그녀가 받았다고 주장하는 계시들을 밝히라고 그녀를 다그칩니다:

 

쟌:  …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my voice)에 대해 따지지 말라.

로베르(심문자):  무슨 말인가? 그 소리라는 게?

쟌:  내가 할 일을 전하는 소리다. 하나님한테서 오는 것이다.

로베르:  그것은 너의 상상력에서 나온 거다.

쟌:  맞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가 우리한테 오는 방식이다.

         (쇼, St. Joan 1923, Scene I)(역주 2)

 

과학자들, 또한, 그들 합리적 모델을 처음 착상(着想)할 시, 시적 상상력에 의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그것은, 퍼어스가 "abduction(推納)"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과학자들한테 그들 경험을 배열하고 이어 관계짓는 방식에서 없어선 안되는 것입니다. 그들 가설들은 "~처럼(as if)" 추측 형식으로 생성됩니다.(역주 3) 실행 가능한 이론이 되려면, 그 이론은 관찰들에 대한 유용한 해석으로서 그밖에 이론들에도 쓸 수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가설과 이론들은 공적 “데이터”를 가리키는 용어들로 정식화되어야 합니다; 공적 데이터란, 여기서, 의도적으로 불러올 수,알아볼 수, 그리고 소통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한편, 이것의 성공 정도와 무관하게, 과학적 이론과 모델들은 합리적으로 분절된 세계의 인간 관찰과 경험에 관한 것들이지, 통일적 세계의 신비적 계시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거의 모든 활동적 물리학자들과 아주 많은 철학자들이, 세상에는 과학의 영향력 밖에, 그 본질상, 남아 있을 신비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하던 역할을 과학이 대신하는 19세기 경향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습니다. 신문에서, 멋지게 연출된 TV 프로그램에서, 교실과 강의실에서, 과학은 진리(TRUTH)로 가는 최고의, 황금의 길로 찬양받았습니다. 이는 종교적 근본주의 못지않게 파멸적인 근본주의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혹성에서 생존을 위한 실행 가능한 평형을 찾고자 하는 경우, 과학자와 신비주의자 모두, 실제 경험의 합리적 정렬과 시적 은유들로 모아진 지혜가 통약불가능할지라도, 양립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양자에 적절한 역할을 부여하는 생각하기 & 살기 방식을 발달시키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참고 문헌들

 

 

블레이크, W. (ca 1770) The Evening Star.

후설, E. (1887) Philosophie der Arithmetik.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0.

제임스,W. (1901-2)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Clifford Lectures. London: Longmans, Green & Co.

러셀, B. (1917) Mysticism and logic. London: Unwin Paperbacks, 1989

쇼, G.B. (1923) St.Joan.

발레리, P. (1936) Une vue de Descartes (Variete IV), in Oeuvres, Paris: Bibliotheque de la Pleiade, 1957.

비코, G-B. (1744) Principi di scienza nuova. English translation by T.G.Bergin & M.H.Fisch, New York: Doubleday, 1961.

비트겐쉬타인, L. (1933) Tractatus logico-philosophiocus. London: Kegan Paul, Trench, Trubner & Co., (2nd revised printing).

 

 

 

번역자 주석

 

1.  "이성의 목적 혹은 존재 이유는 분석이다. 이성이 다루고 싶은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특정 차이에 입각해 기술될 수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것과 관계로 맞물려져야 한다. 신비한 것은 그 또는 저 세계를 그 어떤 배경이든 그 곳에서 그 어떤 분간도 요청하지 않는 총체로 다룬다. 신비한 것이 부분들에 대해 말할 때, 그러한 은유들로 발생시키고자 한 것은, ‘부분들은 궁극에서는 하나다’라는 공감이다." (-->Radical Constructivism, 1995, chap2, 첫 페이지) 그리고 --> “RC: 알기와 배우기의 한 방식”, ‘9장, 단위, 여럿, 그리고 수’ 참조.

 

2. 페이비언니스트 버나드 쇼가 성, 쟌다르크를 쓴 것이 1923년, 글러저스펠트가 이 글에서 인용한 것이 1994년, 뤽 베송이 이 대목을 써서 영화 쟌다르크를 만들어 개봉한 것이 1999년이었다.

 

3. 통상 귀추(歸推)로 옮겨지는 경우들을 보았으나, 역자한테는 귀추보다는 추납(推納)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게 보인다. 'abduction'이란 것이 '하나의 진술을 특정 가설적 상황에 옮겨 그것이 합당하다고, 즉 납득될 수 있다고 여겨질 경우 그 진술은 존재의 증거를 갖게 되는 과학적 추론의 한 방식이다’라는 설명에서, 귀납(歸納)처럼 행위와 지각을 동반하는 경험이 아닌 유사 패턴을 상정하는 가설적 사고를 통해 진술의 적절성 증거를 확보하는 추론임을 볼 때, 실험적 행위에 대해 지각적 증거로 돌아오는 ‘귀(歸)’자보다는 하나의 진술에 담긴 패턴을 유사 패턴을 갖는 특정 상황에 옮기는 것으로 '추(推)'자가 핵심이고 그 과정의 결과로서  진술의 존재 증거를 확보한다는 의미의 들일 ‘납(納)’자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덧붙여, '유추'가 유형으로서 패턴을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기는 것, 또는 그러한 방식으로 둘을 비교하는 것을 가리킬 때, 추납은 유추 과정을 확장한, 혹은 그에 기반한 하나의 방식이다.

--> http://en.wikipedia.org/wiki/Abductive_reasoning

 

-->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Mind and Nature'의 제5장 3절 “추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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