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감각 경험, 추상, 그리고 가르치기

감각 경험, 추상, 그리고 가르치기

 

저자: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레슬리 스테페가 만든 책, “교육에서 구성주의(1995)”의 Pages 369-383.

번역: nhk(김락홍)

 


 

 

 

 

생명체는, 동물이든 인간이든, 자신의 경험에서 규칙성들을 확립할(찾아 행의 기초로 쓸) 경우 더 나은 생존 기회를 가질 것이라는 점은, 삐아제 인지발달 이론의 기본 가정들 가운데 하나다.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그 이유를 보자면, 일어난 일들이 재차 일어날 것으로 보고 행동하는 유기체는 상황이, 최소한 버벅거리거나 다치기 때문에, 좋지 않다면 피하려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들이 다시 일어나도록 시도할 수 있다. 18세기에 데이비드 흄이 진술했던 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반복되고 있는 것임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류의 추론도 할 수 없다.

 

삐아제가 탐구 출발부터 두었던 관심은,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규칙성들을 확립하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방식 발견하기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규칙과 ‘자연법칙들’에 따라 돌아가는 세상으로 여기는 것으로는 전혀 충분치 않다는 걸 삐아제는 분명히 알았다. 어찌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 기대지, 세상과 본질에서 비슷할 그 어떤 것에 기대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 우리가 쓸 수 있는 규칙과 규칙성들만이 우리 자신들의 경험에서 어찌어찌 발견해서 신뢰하게 된 것들이다. 따라서, ‘세상이 무엇과 같을 수 있느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영구성을 띤 지식은 한 순간만이 아니라 앞으로 일정 기간 적용(使用) 가능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경우 그들이 유사한 지식을 갖고 있을 거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살아 숙고할 경우,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걸 깨닫는 기회를 갖는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 경험에서 추상하기로 그러모은 지식은 우리가 우리 경험에서 추상했던 지식과 필히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바는, 적어 놓은 걸 충분한 시간을 갖고 비교하는 경우, 왜 그들이 그렇게 다른 지식을 갖고 있는가를 우리가 알 것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가 그들한테 왜 우리는 우리 지식을 갖고 있는가를 알도록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성하기 노하우(know-how)

 

교육에서, 우리 관심은 학생들이 우리가 지식이라 여기는 것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왜 중요한가까지 아는 것이다. 요컨대, 지니면 그들한테 좋고 유용할 거라 생각하기에 그들한테는 없어 보이는 지식을 우리는 그들이 구성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학생들한테 한 조각 지식을 건네주는, 말해주는 간단한 방식이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한다. 그렇지만, 조금 겪은 후, 말해주는 것만으로는 좀처럼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가장 흔한 류의 정보를 수반(隨伴)하며 행해진다. 가장 단순하게 재조직된 관념을 포함한 것에서조차, 말해주기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다. 이는 우리가 아이들을 수(數) 세상에, 이후, 수학(數學) 영역 발달에 참여시키고자 할 때 뼈아플 정도로 분명해진다. 물론, 학생들한테 말해진 것을 반복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학생들이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전부라면, 그들은 상당히 좋은 점수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자주 보는 바와 같이, 시험에서 좋은 점수가 교사가 가르치고자 했던 걸 학생들이 이해했다는 것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이해하기는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위해 발달, 확장시켜야 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하기는 신체적 기술과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맨 처음 스키를 신은 초보자한테 슬로프 하강시 해야 하는 것들을 말해주는 것은 전혀 쓸모가 없다. 그 발에 장착된 두 개의 다루기 힘든 장치 때문에 조그만 요동에도 균형을 잃을 것이다. 마비된 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이는 학생들이 산술 상징들을 맨 처음 접했을 때 빠지는 상태와 비슷하다(그리고 그들이 대수(algebra)를 접해야 할 때쯤 마비는 다시 찾아온다).

 

이러한 유추(類推)를 임시 작업 가설로 받아들일 경우, 눈 덮인 지형이든 낯선 개념적 추상 분야든, 새로운 영역에서 움직임 배우기는 그저 작은 단계들을 밟아 성취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이를 모를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언어란 지식의 단편을 나르는 간단한 수단이라는 전통적, 자주 당연시되는 믿음 덕택에, 항상 간과되고 있는 바, 교사한테는 작은 단계로 보이는 것이 학생한테는 작은 단계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인지발달 과정에서, 일단 단계들이 성취된 이후에는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물론이고, 힘들게 성취했어야 했던 걸로 알아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정말 중대한, 단계들이 있다. 조기(早期) 사례 하나를 되돌아보겠다.

 

 

젖먹이의 움켜쥠(把握)

 

 

유아 인생 처음 몇 주 동안, 그 아기한테 다가간 경우, 인지발달의 소리 이론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무해한 실험을 할 수 있다. 아기가 편안하게 누워 말똥말똥한 상태로 있는 순간을 택하라. 아기의 시각 장(場)에 작고 밝은 색 대상(對象)이 슬쩍 대롱거리게 한다. 거의 예외 없이, 아기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어 당신은 아기가 그것을 움켜쥐려 한다고 결론짓는다. 연약한 피조물을 너무 오래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기에 그 대상이 그 조그만 손 하나와 접촉하리라 확신하고, 이어 당신의 가정은 확인될 것이다: 아기는 정말로 그 대상을 꽉 쥔다(그리고 줄을 충분히 늘여뜨릴 경우 아기는 그 대상을 탐구하고자 그것을 입으로 가져간다).

 

이러한 실험은 심리학자들 뿐만 아니라 부모들이 수천 번에 걸쳐 의심 없이 실행한 바, 그 결과는 언제나 같은 것들이었다. 움켜쥐고 빠는 순서는 아기 관찰에 있어 “굳건한” 현상(現象)이다. 그렇지만, 빈번하게 간과된 흥미로운 것이 있다: 아기가 최초로 그 대상을 주목할 때. 그 또는 그녀는 체계적으로 그것을 잡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그녀는 움직거리기 시작한다. 사실, 그/그녀는 그/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발가락, 다리, 머리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움직인다. 오로지 손에 그 대상이 닿고, 움켜쥐기 반사 덕택에, 손가락이 대상을 잡고 나서야, 여타 움직임들은 점차 진정되고 대상 끌어당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대상을 대롱거리는 사람이 최초 접촉 만들기에 세심하지 않을 경우, 아기의 무차별적 움직이기는 뜻하지 않은 접촉이 있을 때까지 (혹은 그 놀이에 지쳐 포기할 때까지) 계속된다. 달리 말해, 움겨쥐는 손의 정렬(整列), 팔의 동작, 그리고 눈으로 이러한 복합 시스템 통제하기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힘들게 확립된다.

 

몇 달 뒤, 더 성숙한 신경 시스템이 대상 움켜쥐기를 용이하게 할 때쯤, 아기의 시야 정렬과 운동은 완벽히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8-9개월 된 아기도 그/그녀가 하고 있는 걸 당신한테 (혹은 그/그녀한테) 말해줄 수는 없다. 그 정도 인지발달 수준에서는 사물(事物)을 말하는 언어가 아직 없는 것은 물론, 해야만 했던 바에 대한 반성하는 깜냥 또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아기 경험에 내가 시공(時空)을 할애한 까닭은, 내 견해로, 여기서 드러난 패턴은 결코 유아기 배우기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기가 어느 정도 부드럽고 방향 잡힌 운동 형성을 위해 정렬해야 하는 감각운동) 요소들의 순서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렬은 오직 안내자로서 어른만이, 적시에 야기된 기회에, 적합한 요소들을 제공함으로써 수월해질 수 있을 뿐이다. 수학에서 획득된 추상적 구조와 같은 개념적 정렬을 구축(構築)할 때도 움직이는 것이 뭔지는 단지 추측만 할 뿐이지만, 그 구조들이 얻어지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나는 주장한다. 두 경우 모두, 앞선 요소들로 결합해야 하며, 가능한 조합들 가운데 소수만이 ‘살아남아 확장될 수 있는(viable)’ 것으로 판명될 뿐이다.

 

아기가 결합해야 하는 발동 (야기) 요소들은 동작 (조성) 요소들이기도 하다. 산술이나 수학 배우기 주체가 반드시 결합해야 하는 조적(組積) 블록 조성 요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전혀 다른 종류다. 이것들은 삐아제가 조작(operation)이라 칭해 구별했던 것들로, 반성과 추상의 산물(産物)이다. 그렇지만, 두 경우 모두, 요소들의 맞물림이 성공적이기만 하면 그러한 결합은 반복되는 경향을 가질 것이다; 이어 매번 더욱 성공적일 경우, 되풀이되는 일상으로 더욱 안정될 것이다. 요소들의 결합을 산출하는 심적 기능에 관한 우리의 현재 이론에 기대 보건데, 동작 요소들 또는 조작은, 맨 처음부터 무의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시각 장에서 대롱거리는 “흥미로운” 대상에 대한 아기의 반응에서, 이는 분명해 보인다. 또한, 더 나이든 아이, 그리고 이후 더 복잡한 문제들에 접근하는 학생한테서도 의도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은 시작들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후 반성에 대해 논하면서 이러한 당혹스런 측면을 다시 거론하겠다.

 

단어 reflection은 일반 영어 용법에서 두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심적 활동으로서, 명확히 말해, 숙고하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의식적 사고 유형이다(反省). 다른 하나는 빛 또는 소리의 물리적 현상과 관련되는 것으로 광선이나 음파가 표면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걸 묘사한다(反射 혹은 反映). 삐아제의 인지 이론에서 어려운 것들 가운데 하나는 두 가지 의미들 모두 그의 reflective abstraction(反省的 抽象)의 쓰임새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i)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심적 발달과 추상을 논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두 개의 용어, recognition(再認 혹은 認定)과 generalization(一般化)로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들 두 용어는 (심리학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이것들이 가리키는 심적 조작이 무엇인지 묻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질문을 파고든다면, 우리는 삐아제의 반성적 추상의 의미 이해하기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재인(알아보기)

 

뭔가를 알아본다는 것은 그것을 이전 다른 때에 경험했던 어떤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같은 것” 역시 모호한 것임에 주의하라. 이 맥락에서 ‘같다’는 의미는, 그 뭔가를 앞서 형성된 범주(範疇)에 할당하는 것, 혹은, 그 뭔가를 이전에 경험했던 ‘완전 똑같은 개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두 번째 뜻은, 이를테면, 동무한테 “뒤돌아 봐, 공항을 나설 때부터 같은 사람이 우릴 따라오고 있어”하고 말할 때,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은 개체적 동일성(個體的 同一性)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 여기서 나의 관심사는 후자가 아니라 첫 번째 의미를 함의하는 조작(操作)이다.

 

테이블에 뭔가를 놓자 당신이 “오 맛있는 사과네”라고 말할 경우, 나는 당신 반응에서 몇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a) 당신은 몇몇 측면들에서 “같은 것”으로 간주했던 대상들을 분명 이전에 경험했다. 이를테면, 그것들은 적당한 크기에 둥글고 빨갛다는 걸,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즙이 나온다는 것도 알아냈다. (b) 당신은 이러한 공통된 속성(屬性)들을 추상하고, 이것들을 차후 경험과 비교할 기준으로 보관할 수 있다. (c) 당신은 이러한 속성들의 특정 조합과 단어 사과를 연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구성론 조망에서, 추상하기와 연계(連繫)시키기는 자신이 반드시 이행(履行)해야만 하는 활동이며, 그것들은 그 어떤 여건에서도 자신의 경험이 수반(隨伴)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사는 이러한 활동들을 장려(獎勵)하고자 할 수 있지만, 이것들은 유발(誘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ii)

 

 

경험적 추상과 일반화

 

아이들은 1살 이후 이따금씩 사물에 대한 재인(再認)과 호칭(呼稱)을 가능하게 하는 ‘추상하기와 연계시키기’를 성취하기 시작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막강한 증거가 있다 (그리고, 일단 시작하면 이후 생애에 걸쳐 새로운 것들을 만날 때마다 ‘추상하기와 연계시키기’는 계속된다). 거의 보편적인 이들 인지 단계들로 아이들을 이끄는 여건은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이들 단계들을 만들며 그때 특정 감각 속성들 한 덩어리를 개념으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상이한 감각 인상(印象)들에 대한 이와 같은 그룹핑(하나로-묶어-단위로-간주하기)는 철학자 버클리가 “지각 가능한 사물로서 관념”(1710; Part I, §1)이라 불렀던 것을 생성시킨다 (즉, 별개(別個)로서 반복될 수 있는 개념적 체(體)들은 경험하는 가운데 조성된다). 일단 아이들이 그와 같은 개념들을 형성한 이후에는, 새로운 경험이 특정 범주 조성 수(數)로 간주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속성 수(數)를 갖고 있는가와 무관하게(이를테면, 그들 앞에 놓인 대상의 속성들이 그 대상을 “사과”라고 부를 만큼 사과 개념에 충분히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지든 아니든) 그것들에 접근할 수 있다.

 

삐아제 용어들에서, 그와 같은 개념과 범주들을 형성하는 과정은 항상 경험적 추상이다; 말인즉, 그것은 감각이나 운동 경험에서 얻어진 추상이다. 그것을 귀납적 과정이라(cf. Pinard, 1981) 하는 건, 귀납을 가장 일반적 의미로 이해하는, 즉 ‘개념 형성을 위한 정렬(整列)로서 추상’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다.

 

새로운 경험이 어떤 하나의 범주에 포함될 때마다, 이것이 일종의 일반화하기인 것은, 새로운 경험은, 그 개념과 꼭 들어맞는 것 말고도, 그 개념이 추상되었던 이전 경험들과는 다른 측면들을 당연히 지니고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알아차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새로운 경험을 동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동화에는 상이한 종류들이 있다.

 

 

동화(同化)

 

첫째, 차이들을 알아차린다 해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필시 그것은 그 새로운 대상을 이제는 쓸 수 없는 어떤 것을 대체하는 것으로 쓰고 싶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적당한 도구가 없을 때, 돌이 망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돌로 못을 박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둘째, 새로운 대상을 망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다. 그렇지만, 이 경우, 그 새로운 대상이 ‘앞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범주에 속한 것들한테 기대한 작용 방식대로는 어떤 지점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무 망치를 망치로 여기지만, 못은 벽에 박히기보다는 망치에 박히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 두 번째 경우, 그 새로운 대상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견이 생겨나는 까닭은 문제된 그 대상에 대한 근접한 관찰 때문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어떤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낙담한 기대는 동요(動搖)를 일으키고, 이어 더 진전된 검토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검토는 조정(調整)을 초래(招徠)한다 (예를 들어, 망치와 비슷하지만 못은 박을 수 없는 것들을 포괄하는 범주와 같은 새로운 범주를 창조할 것이다).

 

 

반성적 추상

 

범주을 형성하고 일반화시키는 수단으로서 경험적 추상과는 대조적으로, 반성적 추상은 행위(動作들) 혹은 조작들에서 얻어진 패턴에 관여한다. 간단한 예로, 아이템들 한 덩어리에 ‘많다(numerosity)’를 부여하는 일이 있다. 8살 정도 되면 아이템들의 공간 배치가 달라져도 그 한 덩어리의 수는 변화가 없다는 걸 보통 확신할 것이다. 달리 말해, 8살 정도 먹으면 심리학자들이 수 보존(conservation of number)이라 부르는 걸 추상했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중요 개념의 추상은 세기 활동, 실제로 반복해서 세는 행위에서 비롯되지, 그 아이템들의 물리적(物質的) 속성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총수(總數)가 그 덩어리의 구체적 배열과 무관하게 ‘같다’를 유지한다는 사실은, 세기 없이는, 추상될 수가 없다.

 

 

복수(複數)의 사용iii)

 

훨씬 더 이른, 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례는, 어린 아이의 최초 습득에 수반되는 것으로, 복수 형식의 단어들에 대한 정확한 사용이다. 앞서 기술한 바와 비슷한 상황에서 아이 앞 테이블 위에 하나가 아닌 다섯 개의 사과가 있다고 하자. 앞선 경험에서 사과 개념을 이미 추상했고 또한 그것을 단어 “사과”와 연계시켰던 대략 18개월 아이를 보도록 하자. 그 아이는 이제 테이블 위 물(物)들을 주시할 수 있고 그 구체적 개념에 들어맞는 테이블 위 아이템 하나를 자신이 알아볼 때마다 “사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의 언어 발달이 진행되며 조금 더 크면, 아이가 좀 더 복잡한 걸 해낼 수 있게끔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해당 단어의 단수형을 다섯 번 반복하는 대신, 아이는 이제 복수형 사용이 가능해 “사과들”(한국어권 아이들은 이보다는 “사과 많다”)을 말할 수 있다.

 

자신이 기억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복수(複數)들을 사용해 온 어른한테, 이는 특출한 성취로 보이지 않는다. 아이한테, 그것이 최소한의 알아차림도 없이 발생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언어 발달이 아니라 주요한 개념적 돌파구에 해당된다. 우리가 이러한 돌파구의 가치에 대한 인정은, 당장은, 아이가 단어 “사과들”을 써서 이러한 시각 상황(한 덩어리의 사과들)을 묘사 가능한 것으로 알아보게 되는 방식에 대해 묻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단어 “사과들”이란, 아이가 분명 수없이 들었지만 단일 아이템과 연계시켜 왔던 단어 “사과”와는 같은 소리가 아니기에 쓸 기회를 갖지 못했던 단어다.

 

복수 사용을 결정짓는 것이 낱낱의 사과들 가운데 어떤 하나일 수가 없다는 건 분명하다. 그 결정은 사과들이 한 덩어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발 더 나아가 물어야 하는 것; 아이는 낱낱의 아이템들의 복합체인 그 어떤 걸 어떻게 알아보게 되는가?

 

사실, 답은 간단하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말한 것이란 필히 “지각 입력”의 결과라는 전통적 가정은 이제껏 진전된 탐구를 가로막았던 것 같다. (하나 이상의) 큰 수(numerosity)란 그저 우리가 외부 세계에서 받아들인 정보가 아니라 우리가 밟아 행해야 하는 세는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 여럿(plurality)도 감관(感官)들에 부여된 것이 아니라 특정 개념 조작으로 쌓아올려져야 하는 구성물인 것이다. 이를 깨닫기만 한다면, 그 조작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선, 테이블 위 아이템들 가운데 하나를, 당연, 사과라 불릴 수 있는 류(類)에 속하는 대상으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렇지만, 이 단어 (입말로) 소리내기는 테이블에 대한 시각적 탐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잠시 미루어진다. 재차, 개념 사과에 들어맞아 보이는 아이템 하나와 마주친다. 탐사가 이 지점에서 그친다 할지라도, 아이는 정확히 “사과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하기 위해, 아이는 두 개의 시각 아이템들을 가용한 개념들과 비교하는 가운데 두 경우 모두에 들어맞는 걸 사과 개념이 제공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음에 틀림없다. 달리 말해, 사과 개념과 비교하기에 쓰이는 시각 신호들에 주의를 집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각각의 비교에 어떤 개념이 들어맞는가를 찾는 데에도 집중해야 한다. 즉,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의 조작하기 궤도를 유지하며 그에 따라 반성적 추상을 수행해야 한다.

 

내 제시하는 바, 어떤 특정 개념이 주어진 맥락에서 한 번 이상 성공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재인(再認)하는 것 말고 한 덩어리를 (그 어떤 개념으로) 알아볼 수 있는 방식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하면서 새로운 건, 특성을 결정짓는 것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이행되고 있는 구체적 마음 조작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바로 정확히 삐아제가 용어들, 형상적(figurative)과 조작적(operative)을 써서 구별했던 것이다. 형상적(形象的)인 것은 감각이나 운동 행위의 요소들, 또는 그와 같은 요소들의 재현을 수반하는 것들이고, 반면, 조작적(操作的)인 것에는 관계시키기, 정렬시키기, 추상하기 또는 몇몇 철학자들이 간결하게 특징지었던 것처럼, 마음의 조작들이 포함된다. 그러한 구별(區別)은 이론적으로는 명확하며 강력한 것이며, 복수 용어들의 습득과 (하나 이상의) 큰 수 결정짓기와 같은 경우 논리적으로는 의심할 바 없는 (완전한) 것이다.

 

더 높은 추상 수준에서, 단지 개념 소재, 즉, 조작적 단계들 자체로 산출된 소재만 수반되고 있을 때, 그 이상의 조작적 단계를 확인하거나 입증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 결과, 종종 남은 문제는 피험자(被驗者)에 대한 장기 관찰과 새로운 상황들에서 실험이 요구되는 추측이다. 연구자한테, 이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피험자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상이한 문제 상황들의 충분한 다양성이 관찰되기만 한다면, 적합한 조작적 진전이 일어났는지, 그것이 정확이 언제 벌어졌는지 결정은 불가능할 지라도, 그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통상 가능한 일이다 (steffe’s, 1991c, ‘상이한 종류의 조정에 대한 작업‘을 보시오).

 

 

의식(意識)

 

조작 개념 단계의 두 번째 (여럿 개념 형성) 사례에서 제기된 의문이 하나 있는데, 나는 그에 대해 만족스런 답을 갖지 않다. 그 의문이란 알아차림 또는 의식적 사고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에서 보건데, 여럿의 재인(再認)이 반성적 추상을 수반한다는 건 명백하다. 그렇지만, 또한 분명 아이들은 2살 정도에 몇몇 복수태(複數態)들에 대한 정확한 사용을 배울 수 있으며, 이로써, ‘그들이 그 나이에 자신들의 심적 조작들에 의식적으로 반성을 가하고 있다’는 가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삐아제는 조작적 알아차림의 점진적 도달을 입증하는 임상 인터뷰들로 구성된 책, La prise de conscience(意識의 到達 혹은 開始, 1974)을 출판했다 (이는 의식의 파악(把握)으로 잘못 번역되었다; cf, smith, 1981):

 

둘째 것(즉, 반성적 추상)과 관련한 두 개의 수준은 구별되어야 한다: 피험자한테 무의식, 무지가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 바, 특히, 그것이 추론 형성 정렬들의 산출 기제로 작용하고 있을 때이며, 단 그 정렬들이 추론의 요소들로 쓰이고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의식을 유지할 수 있지만, 이때, 피험자는 그 요소들의 내재적 필연성(반드시 그 요소들이어야 하는 조건)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른다; 이에 반해, 반성적 추상으로 의식에 이를 수 있는데, 특히, 피험자가 두 가지 사고(思考)의 흐름을 비교하면서 그 둘 간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아내려 할 때 그렇다. (Piaget, 1974, p.274)

 

삐아제의 작업은 또한 피험자(혹은 主體) 자신의 조작하기에 대한 의식적 반성이 대체로 예측 가능한 일련의 단계들을 따라 발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그가 우리한테 이들 단계들이 자신들을 드러내는 방식을 말해주고 있지만, 의식이 무엇일 수 있으며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이밖에 그 누구도, 아직 까지, 의식에 대한 ‘살아남아 확장될 수 있는(viable)’ 모델을 제시한 바가 없다. 삐아제도 다른 곳에서 이를 명확히 한 바 있다:

 

의식의 도달을 통제하는 법칙들이, 실상, 우리한테 가르쳐주는 것은 의식은 오직 심적 과정의 결과(結果)에만 닿는다는 점이다; 의식은 익숙한 메커니즘들에서는 얻어질 수 없으며, 의식은 이러한 메커니즘들을 . . . 부적응(maladaptation) 혹은 그 피험자가 제기(提起)한 문제들로 촉발되는 오직 반성적 추상을 통해서만 들춰낼 수 있을 뿐이다. (Piaget, 1976, p. 396; 이탤릭 추가)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개념 조작들을 알아차리게 되는 깜냥을, 우리가 그것을 어찌 하는지 모를 지라도, 우리가 경험상 확신할 수 있는 신비적 사실(事實)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무지의 결과로, 우리는 수학적 사고 발달에서 심적 조작하기에 대한 의식적 알아차림(覺性)이 얼마나 일찍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는가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인용구에서 강조할 가치가 있는 점이 또 하나 있다: 반성적 추상은 “부적응 혹은 그 피험자가 제기한 문제들로” 촉발된다. 이는 스킴 이론에서 직접 얻어진 것으로, 스킴 이론이란 조정(調整) 개념을 수반하는 설명적 구성물들의 네트워크다. 앞서 맥락에서, 반성적 추상은 조정의 도구였다. 삐아제 이론에 따르면, 모든 조정은 동요(動搖)로 인해 촉발된다: 뭔가가 적절히 기능하지 않는 거, 작동하지 않는 거, 또는 어떤 면에서 놀라운 결과라는 걸 깨닫는 바로 인해 촉발된다. 흥미롭게도, 이는 삐아제가 피험자가 끌어올린 문제들을 동요의 원천으로 언급했던 몇몇 지점들 가운데 하나다. 부적응이 가리키는 것은 부정적이거나 해롭거나 또는 경험된 환경과 단지 원치 않은 관계나 상호작용이다. 그러한 피험자 문제들에 대한 언급에는 피험자 자신의 개념적 과정들에서 비롯된 또 다른 종류의 동요가 추가된다. 이것이 바로 삐아제 비판자들이 광범위하게 간과했던 중요한 특징이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주요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은, 반성적 추상을 촉발할 권능을 지닐 수도 있는 그러한 문제들은 피험자 혹은 주체 자신이 제기(提起)한 것이지 다른 누가 제시(提示)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달리 말해, 학생한테 문제로 보이지 않고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반성적 추상이 촉발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실제 교육에서, 의식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 까닭은, 많은 심적 조작하기 영역들에서 아이들의 알아차림은 6살쯤 돼서 시작된다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피나르(1981)는 conservation(保存)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반성적 추상에 대해 말하기를:

 

그러한 과정에 대한 구성적 활동, 더욱 일반적 평형 메커니즘들에서 조작하기에는 필히 비슷하게 넓은 범위의 의식 수준들이 개입되고 있다는 건 강조될 필요가 없다. 순전히 생물학적, 유기적 수준에서는 명백히 부재(不在)한 것으로서 의식 또는 알아차림이 그 발단으로 감각운동 수준에서 해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감각운동기에 적합하게 정의(定意)되어야 한다; 그것은 재현(再現)하는iv) 수준(前조작 또는 구체적 조작 수준)에서는 분명 관찰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피험자가 자신의 심적 구성들에 대해 반성할 때 반성적 추상이 현저히 의식적이 되는 형식적(形式的) 사고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p. 37)

 

수와 양의 보존이 이에 해당되는 경우들이다. 대개 7살 먹으면 둘 모두를 “갖고 있다”. 수의 보존은 몇몇 세기 활동 경험을 통해 비교적 쉽게 얻어지지만, 후자, 양의 보존은 오직 특정 추리와 이어 논리적 필연성에 대한 알아차림이 동반(同伴)될 때만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맥락에서 핵심은, 우리가 아이의 양의 보존에 대해 말할 때 그 의미에 대한 삐아제의 해석을 우리가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논리적 확실성

 

 

삐아제를 주의 깊게 읽은 이들이라면, 중요한 건, 아이들이 액체를 한쪽 용기에서 모양이 다른 용기에 부었을 때 그 양이 변하지 않았다는 판단(判斷)을 정당화하는 방식임을 알 것이다. 즉, 아이는 이러한 경험에 대한 반성으로 ‘(a) 두 번째 용기의 액체는 첫 번째 용기의 액체와 동일한 또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b) 더해진 것도 없고 덜어낸 것도 없다고, 그리고 (c) 이 절차가 가역적이어서 용액을 다시 첫 번째 용기에 붇는다면 그 용액은 이전처럼 같은 높이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아이는, 나아가, 이들 조건이 충족될 경우, 용액의 양은 변치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보존 테스트에 대한, 보존 훈련시키기에 대한, 그리고 조기에 그것을 유발시키기에 대한 많은 문헌들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것은, 용액의 양이 형태가 변하는 동안에 변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질문(質問)에 대한 응답(應答)이다. 이것은 삐아제 이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해당된다. 삐아제 이론의 조망에서, 중요한 것은 바른 답이 아니라 이상의 3가지 정당화 논증들의 결합에서 얻어지는 논리적 확실성에 대한 아이의 파악(把握)이다.

 

아이가 구체적 조작 시기에 진입했는지 여부에 대한 지표는 바로 이러한 확실성의 획득이다. 이 시기 결론들의 확실성을 떠받치고 있는 논리는 이후 형식적 조작 시기에 조작에 수반(隨伴)될 논리와 같은 것일지라도, 그 논리가 아직은 계속해서 제한적인 까닭은 아이가 특정 감각운동 상황 맥락에서만 그것에(을) 기댈(使用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형식적 시기에, 연역과 같은 논리적 조작은 경험 상황들에 의존하게 되고, 그에 따라, 거짓으로 보이는 전제(前提)을 포함해 그 어떤 전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실상, 수학적 사고하기 같은 더 높은 수준에 수반되는 일련의 긴 연역 추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상과 같이 실제 상황에 대한 여하한 필수 지시(關聯)도 제거(無視)하는 일이다. “그러한 더욱 발달된 (형식적) 수준에서 생각하기는 가능한, 불가능한, 그리고 필연 관계들을 발견 또는 결정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Smith, 1987, p.352).

 

삐아제가 자신의 인지발달 이론의 교육적 적용에 대해 혐오감을, 자신의 기나긴 연구 인생에 걸쳐, 반복적으로 드러냈음에도, 구체적 조작기에 대한 그의 분석들은 4 혹은 5학년 가르치기에 귀중한 지침들을 제공할 수 있다; 단, 구성론적 방향에 따른 접근과 도움들이 행해지는 경우에 한해서다.

 

 

 

감각운동 경험

 

반성적 추상에 관해 내 말했던 바에서 중요한 원리 하나가 얻어질 수 있다: 추상의 최초 수준으로 진입에는 구체적 경험이 요구된다. 논리의 권능은 실제 경험된 구체적 상황들 훨씬 너머까지 나아갈(擴張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자신(과 자신이 구성하는 연역적 절차)의 존재 이유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에 이르는) 발달(發達)은 경험이 부재한 가운데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가 바로 광학의 물리적 반사에서 비롯된 의미, 용어 reflective abstraction의 두 번째 의미가 관련되는 지점이다.

 

자신의 심적 절차에 대한 반성하기 활동은 감각운동 행위(動作들)에서 조작 패턴을 추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발달과 관련해 말하자면, 모든 추상은 행위에서 시작된다. 달리 말해, 어떤 걸 추상하려면, 먼저 주체는 반드시 행(動)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그럴 기회가 생기려면 감각운동 소재(素材)와 그에 행위가 가해지는 상황(狀況)이 필요하다.

 

굉장히 상세하게 해결되었던 사례 하나는 세기 활동을 통한 추상적 수 개념의 생성이다 (Steffe et al., 1983). 아이가 결국 (하나, 둘, 셋, 등등) 수 단어들의 비지각적이자 순서적 의미를 추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각 아이템들”(즉, 사과, 쿠키, 손가락, 등등)을 세는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은 결단코 간단하지도 직접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한 수준 이상의 반성적 추상을 수반(隨伴)하는 일련의 단계들을 밟아 진행되며, 그 말미에 모든 구체적 아이템들은 떨어져나가고 수 단어는 더 이상 실제 구체적 아이템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하한 아이템이든 그 잠재적 총수(總數)를 지시하게 된다.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덩어리들을 형성하기에 적합한 블록, 장기판 말, 퀴즈네르 막대, 또는 그밖에 “만지작거릴 수 있는 것들(manipulables)”은 출발 플랫폼으로서 매우 유용하다. 그것들로 세는 걸 불러일으키고 덩어리들을 합치고 나누는 시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아이가 감각운동 행위(動作들)에 동반(同伴)되는 심적 조작들을 추상하게 될 때만, 수 개념 창발은 시작된다.

 

 

구체적 조작들

 

 

그러한 (시각 경험) 상황은 구체적 조작 기간에 행해지는 전통적 테스트 그리고 연습들과 유사하다. 액체 양의 보존 테스트에서는, 3개의 비이커로 조성된 절차가 있고; 서열화(序列化)에서는v), 엇갈리게 놓여진 막대 뭉치들이 있고; 유목-포함, 즉, 포섭(包攝)에서는vi), 지각적으로 더 작은 류(類)들로 분류될 수 있는 꽃, 색칠된 장기 말, 또는 그밖에 덩어리들이 있다. 이 모든 상황들에서, 표준화된 질문에 정확히 답하려면 일정한 지각 실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아이의 개념 발달 지표(指標)는, 그러한 역량의 현시(顯示)가 아니라, 그 답 이외에 다른 답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적 확실성이다.

 

구체적 조작 발달에서 현저한 특징은, 아직은 그 논리적 설명이 희미할지라도, 여하튼 틀림없는, 따라서, (이러저러한 건 이제껏 항상 같은 것들로 판명되었다는) 경험에 기댄 상대적 확실성과는 다른 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연역적 결론과 귀납적 결론 사이 차이에 다름 아니다.

 

The logic of learning (vol. X, 1959) 초반 권의 결론 장에서, 삐아제는 감각운동 배우기와 (반성적 추상에서 얻어지는 논리로 성취되는) 인지적 평형 사이 복잡한 관계를 요약했다. 같은 책에서 공동연구자들이 보고한, 구체적 조작기 피험자들과 함께 한 실험 연구을 그는 언급했다:

 

 

관찰된 모든 상황에서, 감각운동 배우기 요소들과 논리적 평형(安定化)이 불가분하게 얽혀 있는 것은, 전조작기 규제(制御-原理) 또는 조작에 따른 보상 효과가 생길 때마다, 그 성공은 바로 실제 경험에 다름 아니다. (Piaget, 1959, p. 185)

 

직역(直譯)된 윗 구절은 전적으로 불가해할 것이기에, 그것을 내가 영어로 풀었다. 그것은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논리적 평형(平衡)은 심적 조작이 가역적(可逆的) 상태가 될 때 성취되는 인지적 균형을 가리킨다; 가역적 상태란, ‘마음으로 행해진 건 언제든 아니 할 수 있다’는 점이 이해된 때를 말한다. 이러한 가역성에 대한 이해는 구체적 조작기 동안 주요한 인지적 진전들(보존, 서열화, 포섭)의 불가결한 부분에 해당된다. 이와 반대로, 전조작기 규제들은, 작동할 목적으로 발견되는 것들이기에, 경험적으로 행위를 통제하는 규칙성들에서 얻어지지만, 논리적 필연성에 대한 느낌(直觀的 理解)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들은 아니다.

 

삐아제가 인용구에서 지금 우리 호기심을 유발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비록 심적 조작은 언제든 아니 행해질 수 있음에도, 그것의 가역성은 “평형”, 말인즉, 인지 발달을 위해 긍정적 요인이 된다. 이러한 발달은 실제 경험에서 시작되어 문제 해결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내 해석으로, <지적 발달은, 비록 감각운동 소재에서 얻어진 추상으로 생각하는 확대된 능력으로 나타난다할지라도, 그와 같은 소재(物質)와 상호작용으로 촉발될 뿐만 아니라, 그 최고 수준에서까지, 구체적 경험 수준으로 적어도 산발적인 복귀를 필요로 한다>는 일반적 원리에 대한 또 하나의 확증이다. 이러한 복귀가 필요한 이유는, 감각운동 경험에서 개념 구조가 얼마나 멀리 격리되는가와 관계없이, 그 구조의 궁극적 생존-확장성(viability)은vii) 오직 그 수준에서만 확증될 수 있다.

 

일견, 글쓰기 상징들은 감각 경험 형식에 포함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글쓰기는 단연코 그 수준에 있다. 그러나 수학 이해하기 조망에서, 여하한 상징 조작도 상징 사용자가 그에 앞서 미리 상징이 가리키는 심적 조작에 접근하지 못한다면 공허한 활동이다 (cf. von Glasersfeld, 1991a). 이러한 깨달음으로, 관찰 가능한 능숙한 행동(을 바라는) 목표로부터 개념 이해하기(를 바라는) 목표를 근본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 구별은 내가 가르치기(teaching)와 훈련시키기(training) 용어들은 결단코 바꿔 쓸 수 없다고 주장하며 종종 지적했던 바다.

 

이해하기(내 견해로, 유일하게 궁극적 가치가 있는 배우기) 증진, 육성(育成)을 원하는 이라면 누구든 이러한 논의에서 두 개의 경험 법칙을 얻을 수 있다.

 

1. 반성 없이는 그 어떤 이해하기도 있을 수 없으며, 반성은 학생(學生)들 스스로 이행해야만 하는 활동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을 대신해 그것을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특정 학생이 그/그녀의 개념 발달이 어디쯤에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린 교사라면 그저 이미 정해진 커리큘럼만 따르는 교사에 비해 진전된 반성적 추상을 촉진할 더 나은 기회를 갖는다.

 

2. 반성적 추상은 언제든 감각운동 경험 형식에 기반해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반성적 추상의 동인(動因) 혹은 원인(原因)은 아니다. 따라서, 학생들의 추상하기를 보장(保障)할 수 있는 구체적 소재 다루기 혹은 특정 행위 관련 여하한 프로그램도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장기간 개념 구성 연구들을 수행했던 스테페, 콥, 휘틀리, 그리고 여타 연구자들의 각고의 노력은 마침내 (반성적 추상 촉진을) ‘가능성으로서만’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상황과 과제들의 수많은 목록을 제공할 것이다.

 

내 덧붙이는 개인적 관찰로, 한 학생한테 반성적 추상의 촉발을 제공하는 활동은 다른 학생한테는 아닐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왜 우리가 고정된 확실한 훈련이나 절차 프로그램이 아닌, 기껏해야, 포괄적인 가능한 실마리(策略) 목록 모으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말하야 하는 이유다. 나한테 이것은 중요한 원리를 함의하고 있다. 교사들은 결단코 자신들을 “지식 전수(傳授)” 기능공(技能工)으로 보거나 보여지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그들은, 소크라테스 말처럼, 이해하기 탄생에서 산파 역할을 하는 직관적 도우미로서 느끼고 행해야 한다.

 

 

 

 미주

 

i) reflection의 번역어 “반성(反省)”에는 여기 저자가 언급한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기에 reflective abstraction은 ‘반성적 추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잘 맞아들어간다. 하지만, 다른 번역서들에서 ‘반영적 추상’으로 번역하는 것은 삐아제의 의도의 한 면만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i) associating의 명사형 association은 심리학에서, 통상 연합(聯合)으로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가 심적 이미지나 사물들의 ‘연결’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는 것으로 보건데, 그 연결의 결과로서, 파생되어 쓰일 수 있는, 합쳐진 혹은 단일하게 보이는 모습을 지칭하는 것에 의미가 맞추어져 있지는 않다. 따라서 ‘연합’이라는 번역어는 맥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빈번하게 장애를 유발한다.

 

iii) 복수(plural)는 ‘하나 이상의 상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 형식 또는 단어’를 가리키며, 여럿(plurality)은 하나 이상의 상태를 가리키며, 많다(numerosity)는 (하나 이상의) 큰 수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특정 시기 어린 아이한테, 혹은 어른의 경우도 특정 맥락에서는, ‘많다’와 ‘여럿’은 동의어일 수 있다.

 

iv) representation의 번역과 관련하여, 표상:presentation, 재현:representation을 구별하는 쓰는 경우도 있지만, 이 둘을 구별 없이 영어권 저자들을 포함하여 쓰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저자는, 그리고 저자가 인용한 인용구의 저자들을 포함하여, 이 둘을 구별하여 쓰고 있다고 생각되며, 나아가, representation의 경우, 저자는 피험자 혹은 주체의 입장에서, 그것은, 관찰자가 보기에는 재현일 수도 있지만, 같은 형식 혹은 패턴을 다시 상연(上演)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경우, 구별을 위해 re-presentation을 사용한다. 여기서는 그냥 ‘재현’으로 번역한다. 여기서, 재현은 2살 쯤 감각운동기 말미에 대상 영속성을 확립하고, 그 결과, 재현하기가 가능해진 걸 말하고 있다.

 

v) 서열화(seriation): 삐아제 인지발달 이론에서 3번째 단계, 구체적 조작기는 7-12살 정도에 거치는데, 이때 중요한 논리 또는 추리 발달의 하나로서, 대상이나 상황들을 크기, 색깔, 모양, 또는 패턴과 같은 특징에 따라 분류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vi) class inclusion은 발달심리 책자들에서는 ‘류포함’ 또는 ‘유목포함’으로 번역되고 있으나, 논리학에서 ‘어떤 것 또는 작은 범주을 더 큰 범주에 포함시키는 걸‘ 뜻으로 포섭(subsumption)이라 칭하고 있다.

 

vii) viability는 현재 개념, 구조, 이론 등등이 변화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생존가능성(survivability)과 이후 새로운 영역에서 그 확장, 발달한 바로서도 작동가능성(workability)을 모두 함의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단어로, 저자는, 개념, 구조, 이론 등등에 대한 실재론의 진리(truth) 개념에 상응하는 구성론의 개념을 이 단어로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합지 않다. 역자는 이전에 이 단어에 대해 한국어 ‘살클수’를 만들어 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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