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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구성론적 접근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구성론적 접근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

 

번역: 살클리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리는 구체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명

                          료한 관념들을 하나의 틀에 짜맞추어 보유하는 일은 인간

                          깜냥의 권능 너머에 있다: 사람들이 보았던 모든 새와 동

                          물들, 감각들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나무와 식물들, 그들로

                          서는 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한 지점을 알아차릴 수 없다.

                                                                  존 로크[i]

 

       중세에 있었던, '보편적인 것들'에 관한 수많은 논쟁들은 그것들을 "실존"하는 것들로 여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를 경우, 그 토론자들은 대략 적어도 4개의 학파로 나뉠 수 있다.

1. 플라톤적 실재론자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슬로건 universalia ante res로 특징지웠다; 그들은 우리가 사물 또는 들을 경험하기 전에 앞서 일반 개념들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2.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재론자들, 그들은 보편적인 것들을 처음부터 사물 또는 들에 따로따로 내재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의 슬로건은 universalia in rebus sunt였다.

3. 유명론자들, 그들한테 '보편적인 것들'일 수 있는 것은 단어들 밖에 없었다: 갖가지 사물 또는 들에다 적용시켜 쓸 수 있는 것은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4. 개념론자들, 그들한테 '보편적인 것들'이란, '구체적인 것들'에서 추상적 생각하기로 생성된 것들이기에, post res, 즉, 사물 또는 들을 경험한 후에 생겨난 것들이다.

       네 학파 모두 각기 문제들이 있다.

       1에 따를 경우, 풍차, 정조대, 고속도로, 쿼크, 그리고 신용카드와 같은 발명품과 새로이 유행하는 것들을 포괄하는 모든 '보편적인 것들'은 처음부터 "실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당신이, 플라톤와 더불어, 신은 모든 신생아들한테 필수 관념들을 완벽히 제공하고 있다고 믿는 경우,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전지자로서 신은 인간이 발명하는 모든 것들을 그것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상가들한테 이것은 맘에 드는 모델이 아니다.   

       '보편적인 것들'이 구체적인 사물 또는 들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은(2), 우리가 그것들을 구체적이지 않은 채로는 맞닥뜨릴 수 없다고 할 경우 그것들이 어떻게 일반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결정적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유명론 또는 명목론은(3), 보편적인 하나의 단어로 포괄될 수 있는 '구체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다소 큰 집단을 우리가 발견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를 아직도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내 구성론적 조망에서 볼 때, 4번, 개념적 접근이 가장 흥미롭다; 그러나, 또한, 부분적으로는 유명론의 가정에 기댔던 경험론자들이 그것을 상세히 설명했던 형식을 보자면, 그것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역사적으로 훨씬 더 긴 개념적 발달에 대해, 최근 관념들과 더 잘 들어맞는 것으로 내 여기고 있는, 수정된 간략한 견해를 펼쳐보이겠다.      

       보편적 관념들을 산출하는 추상적 생각하기는, 데카르트의 경우, 훌륭히 기술했다:

하나의 사물 또는 이, 자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수많은 사물 또는 들에서 연역되는 것이라면, 사물 또는 들을 이루는 관념들에서 당면 주의를 요청하고 있지 않는 것들은 모두 제거될 수밖에 없다; 그후 남는 凸점 또는 특징들이 기억 속에 더 쉽게 간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데카르트, 1629/1958, Rule XII, p.56)

       이 논문의 앞머리에 올렸던 경구는, 그와 같은 추상의 필요성에 대한 로크의 진술로 감동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다수는 이러한 진술에 동의하면서도 이러한 진술과 관계없이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네가지 접근들 가운데 하나를 승인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말을 꺼냈다. <그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자체로 실존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던 "추상적 일반 관념들"이라는 나름의 관념에 반대하며 가열차게 싸웠던 버클리조차도, 단어들을 일반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기꺼이 인정했다 (버클리, 1710, Introduction, §12).

       실상, '보편적인 것들'에 관한 모든 논쟁은, 이를테면, 이름 "삼각형"을 3개의 모서리를 가진 다양한 모양들에 적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름 "삼각형"이 지시하는 추상이 관찰자와 독립된 어떤 실체를 나타낸(대변/재현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버클리는 이를 아주 명확히 했으며, 그렇기에 그를 좀 길게 인용한다 해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알기로, 모든 지식과 (추리로서 또는 사실이나 예를 들어 하는) 증명은 나름의 보편적 관념들에 관한 것들이라고 자주 주장되었다; 주장된 바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 경우, 그러한 관념들은, 나한테는, 전제된 방식, 보편성에 따라 추상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 보편성이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한, 어떤 것에 대한 절대적, 실증적 본성 또는 착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기의된 또는 다시떠올려진(대변/재현된) 구체적인 것들이 관계하는 가운데 산출되어 그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그 덕에, 사물들, 이름들, 또는 나름의 관념들은, 그 자체로는 구체적이며, 보편적인 것들로 해석된다. 따라서, 내가 삼각형과 관련된 어떤 명제를 증명할 때, 가정되어야 하는 것은 나는 삼각형이라는 보편적 관념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점이다; 그 관념은 내가 짜만들 수 있었던 등변도 아니고 부등변이나 이등변도 아닌 어떤 하나의 삼각형이란 관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 또는 저 부류에 속하든 상관없이 내가 숙고하고 있는 삼각형은 오로지 구체적인 삼각형일 뿐이며, 그 관념은 직선으로 이루어진 모든 삼각형들을, 어떤 것이 되었든, 한결같이 대표하며 그것들을 다시떠올릴 수 있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보편적이다. (ibid., §15)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버클리가 입증하고자 (내 생각에 그렇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 것은, 어떤 한 유형의 삼각형의 각들의 합이 2직각과 같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는 이러한 발견을, 변들의 길이와 각들의 크기가 논증에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고 있기에, 모든 유형의 삼각형들로 연장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분명, 그 자신 그의 논증 전개 과정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은, 1734년 그가 원리들의 그의 최종 판에 추가한 아래 글을 볼 때 그렇다:

그리고 여기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구든 각들의 개별 크기의 양들이나 각 변들의 관계들에 주의를 주지 않고도, 그 어떤 도형을 간단히 삼각형 형상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는 추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결코, 그가 삼각형에 대한 추상적, 일반적, 비일관적(자기-모순적) 관념을 짜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할 것이다. (1710에 추가된 1734판, §16)

       그와 같은 부분적 추상을 가정하는 것이 불가결한 까닭은, 우리 모두가 변과 각이 모두 같지 않은 도형을 삼각형으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렇다면, 버클리는 명목론자다. 이름이란, 그가 말하길, 구체적인 것의 이름이지만, 기호의 역할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일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1710, 서문, §12)        

       그러나 이것은, 상이한 구체적인 것들이 어떻게 해서 똑같은 기호로 지시될 수 있게 되는지 하는 질문을 방치하고 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쫓는 실재론자들한테,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까닭은, 물-자체들은 유사성들을 명백히 드러내며 그 유사성들로 인해 물-자체들은 "자연에 실존하는 종류들"로 할당될 수 있다는 점을 당연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명목론자들과 개념론자들한테, 이 점이 내버려둬도 될 결론일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의 모델에서 언어 밖 일반성이 차지할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버클리가 이러한 딜레마를 그럭저럭이나마 해결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나한테는 그가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내 생각에, 그가 그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그가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맥락에서, "그러나 내 구상하기 또는 상상하기 권능은 실제하는 실존 또는 지각의 가능성 너머까지 연장되지는 않는다" (1710, 원리들, §5)고 썼을 때다. 그 진술은 '또는'으로 인해 모호해지면서, 읽는 이한테, 혼동을 야기시키고 있다. 혹자는 '또는'으로 인해 실존과 지각을 다른 사건들인 처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버클리 모델에서, 실존을 발생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지각된 존재이다(esse ist percipi: 존재는 지각된다). 버클리 자신한테, 그 진술이 함정인 까닭은, '구상하기(상상한 것들 엮기)'와 '상상하기(마음 속에 그리기)'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한테, 이것들은, 가끔씩 자신들을 동시에 드러내기는 하지만, 조작의 수준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별개의 깜냥들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것들을 성분으로 하는 많은 것들을, 원리적으로 그것들은 지각 너머에 놓여 있는 것들이므로, 구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테면, 지각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음의 수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우리는 철회되고 있는 <이른바, '~ 너머에> 실상을 명시하지 않고도 "놓여 있다"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특정한 변의 길이와 특정 각을 상상하지 않고도 삼각형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사례는 유용한 예화로써 쓰일 수 있다. 당신이 경기장 입구에 있다고 하자; 당신은 똑바로 걷는다; 어떤 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똑바로 걷는다; 다시 오른쪽 입구 쪽으로 방향을 틀어 똑바로 걷는다. 당신은 당신의 걸음이 삼각형을, 직선의 길이와 각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그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변과 각의 특정 값들 대신 변수들을 포함하는 삼각형을 조작적으로 결정하고 그렇게 정의하는 구성 프로그램 하나를 당신은 실행했다. 요점은, 우리는 지각에서조차 이미 만들어진 삼각형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작은 요소들로 그것들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다.

       버클리가 이러한 통찰력에 아주 바짝 다가섰던 것은, 그가 누구든 "각들의 개별 크기의 양들이나 각 변들의 관계들에 주의를 주지 않고도, 그 어떤 도형을 간단히 삼각형으로 여길 수 있다"고 말했을 때다. 그러나 그는 그 진술을 더 갈고다듬는 것을 방해했던 인습적 틀에 박힌 두 가지 관념으로 인해 더 나가지 못했다. 공간, 시간, 그리고 수와 같은 항목들이 "마음에 속하는 것들"임을 깨달았음에도, 그는 양 개념들과 심적 이미지들이 정적이며 더 나눌 수 없는 단위로서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전통적 신념을 명확히 고수했다. 이것이 그를 가로막았던 첫번째 관념이었다. 두번째 관념은, 위의 정의 속 변수들을 특정 값들로 대체하지 않고는 삼각형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심할 수 없는 경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정말이지, 조작적 정의는, 바로 그 지각 행위로 분실된 값들을 대신하기에, 삼각형 알아보기 또는 재인에 쓰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등변, 이등변, 그리고 부등변일 삼각형을 시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다른 곳에서, 어떤 것을 알아보는 능력은 단지 그와 똑같은 것을 상상하는 능력에 선행하는 것임을 보인 바 있다(글라저스펠트, 1979; 1995). 하루하루의 경험은 이에 대한 셀 수 없을 정도의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 알아보기는 하지만 눈 앞에 없을 때 심적 이미지로 떠올릴 수는 없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비슷하게, 우리 모두한테는,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 듣거나 읽을 때는 그 의미를 알지만, 그럼에도 말하거나 쓰고 있을 때는 쓸 수 없는 단어들이 (그리고 이차 언어에서는 더 많이) 있다.

       개념과 심적 이미지 사이 이러한 차이는[ii] , 내가 믿기로, '보편적인 것들'에 관한 논쟁에 새롭고 알찬 길을 열어주고 있으며, 그러한 구성론적 접근은 그럴싸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iii]  개념들이란 의식적이며 정적인 것들일 수밖에 없음을 당연시 여기는 관점을 포기한다면, 그것들이 구성되는 과정을 경험적 사례를 빌어 보여주는 것은 가능하게 된다. Lettvin, 마투라나, 피츠, & 매컬럭(1959)가 증명해 보였던 것은, 개구리의 신경계는 4개의 상이한 시신경 섬유 다발이 임펄스 들을 연속적으로 신경절 세포들, 이른바, 개구리의 명령센터에 전달할 때마다 포획할 먹이를 발견한다는 점이었다. 각각의 균질한 임펄스[1]들은, (1) 국부적 명암 대비, (2) 작고 어두운 대상의 볼록함, (3) 어두운 모양의 움직임, 그리고 (4) 국부적 시각 장이 갑작스레 어두어지는 것과 같이 기술될 수 있는 각각의 자극들에 대한 반응들이다. 1, 2, 그리고 3으로 임펄스들의 배열이 주어지면, 어두운 배경에 작은 곤충처럼 행동하는 어떤 것에 반응하라! 이와 함께 그 임펄스들은 개구리가 자신의 먹이를 포획할 행위를 촉발시킨다 (개구리의 종에 따라, 뛰어가 덥석 물거나 혀를 쏘아잡는다)., 갑작스레 어두워지는 것이 개구리한테 위험이 엄습할 가능성에 대한 신호로 보내질 때, 임펄스 4는 그 행위를 멈칫거리게 할 것이다. 그와 같이, 1, 2, 그리고 3의 정렬은 개구리가 자신의 먹이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행렬을 조성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렬은, 또한, 개구리가 움직이는 작은 그림자나 작은 검은 공을 벌레인 것처럼 굴리는 것에 반응할 것이란 사실과도 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구리의 신경계에 대한 구성물 하나를 다루고 있으며, 개구리한테 그 구성물로 부여하고 있는 것은 실재에 대한 어떤 그림이 아니라 그 자신의 환경에서 영양분을 찾기 위한 충분히 성공적인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만약 그 개구리가 자신의 조작하기 방식에 대해 의식적으로 반성 또는 성찰할 처지에 있다면, 3개의 임펄스들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은, 그 개구리한테는, 먹을 수 있는 곤충에 대한 조작적 정의에 다름아니라고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심적 이미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개구리의 관련된 신경 섬유 다발들이 요청되는 임펄스들이 공급하고 있지 않을 때도 그 개구리한테는 그 해당 프로그램을 고의로 구동시킬 수 있는 추가적 능력이 있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 조건의 수행 여부는, 또한, 피아제가 약 2살 먹은 아이들이 '대상 영속'이라는 성취물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기준이기도 하다. 어떤 대상을 알아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아이는 또한 그 대상이 당면한 경험 장 안에 있지 않을 때 그 대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휠씬 더 어린 아이들, 고양이, 그리고 그밖에 동물들도 대상 영속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고 주장했던 것은 무수한 발달 심리학자들로서는, 그들 검사 방식으로는 부재한 대상을 상상하는 능력을 결코 검사할 수 없었음에도, 할만한 일이었다.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서,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구성론적 접근을 요약하고자 한다:

       경험의 흐름에서 조각들을 잘라내서 그것들을 하나의 류에 속하는 것으로 알아보는 데에 쓰이는, 특징적 요소들이 정렬되어 있는 구성 프로그램들을 나는 "재인 행렬" 또는 "재인 개념들"이라 부를 것이다. 그에 따라, 나는 용어 '보편적인 것'을 한 주체의 의식적 반성 또는 성찰로 접근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주체가 또한 의도적으로 심적 이미지들로 불러낼 수 있는, 그러한 개념들에 한정하자고 제안하고자 한다.

       재인 개념들에 대해서도 보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용어 "실존"을 공간과 시간 속 독립된 존재의 어떤 형식을 지시하는 뜻으로 쓰고자 하는 한, 그것들을 "실존"하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념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은, 반복가능한 프로그램들이며 그와 같이 심적 조작들이 흐르는 가운데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지속이나 실체를 갖지 않는다. 그것들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구비하고 있는 것들에 속하지 않는다.                          

       결론으로, 내가 추가하고 싶은 것은, 내 구성론적 입장에서 볼 때, 그것들에 대한 그 어떤 존재론적 단언들도 행해질 수 없으며 따라서 누군가 단 하나의 그 "실재"를 기술하고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을 수 없다. 이제껏 의도한 이 모든 것은, 몇몇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모델들을 제안한 것이다.

 

References

Berkeley, G. (1710)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Dublin: Printed by Aaron Rhames, for Jeremy Pepyat, Bookseller.

Descartes, R. Rules for the guidance of our native powers (composed before 1629, published in 1701), in N.Kemp Smith (Ed.& Trans.) Descartes philosophical writings. New York: The Modern Library, Random House, 1958.

Glasersfeld, E.von (1979) Cybernetics, experience, and the concept of self. In M.N.Ozer (Ed.), A cybernetic approach to the assessment of children: Toward a more humane use of human beings,(67-113). Boulder, Colorado: Westview Press.

Glasersfeld, E.von (1995) Radical constructivism: A way of knowing and learning. London: Falmer Press.

Lettvin, J., Maturana, H.R., McCulloch, W.S., & Pitts, (1959) What the frog's eye tells the frog's brain,

Proceedings of the IRE, 47 (11), 1940-1959.

 


[1] ‘impulse’ 자극을 가하거나, 또는 습관적인 효과를 유발하는 것으로, 신경 또는 근 섬유를 통해 전달되어 흥분을 야기시키는 전기화학적 파동의 일종


[i]  Lock, J. (1690)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Book III, ch.III,§2.

[ii] 내가 여기서 만들고 있는 차이는 부분적으로, 다만 부분적으로만, Kant가 “순수” Anschauungen와 “경험” Anschauungen의 대립으로써 설명한 것과 일치한다. cf. Kritik der reinen Vernunft, B742-744. (용어 “Anschauungen”은 통상 “직관”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이 단어는 “직관”은 “view<“바라보기”, 그리한 결과로서 “조망”>에 더 가까운 독일어 의미를 주고 있지 않다.  

[iii] cf. 조작은 생각 속에서 관계로서 파악된다는 John Dewey의 진술: 그 진술에서 관계란 “그 것의 의미가 사례들로서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에도, 자신이 공공연히 예로서 드러나고 있는 그 사례들과는 독립된 것이다.” (The quest for Certainty, New York: Putnam, 1960; S.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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