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형식의 법칙들

각 장에 대한 메모들: 노트7, 노트8

7장 주석

정리 14의 기술에서, '상수'는 연산 상수를 가리킵니다. 연산에서는 두 개의 상수, 표시 또는 연산자와 공백 또는 허공이 있습니다. 제한 또는 조건 없이 '상수'에 대한 언급은 통상 허공보다는 연산자를 지시하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8장 주석

 

   우리는 이 텍스트에서 앞서 입증과 증명을 구별한 바 있습니다. 상당히 자연스레 보이는 이러한 구별을 행하면서 우리가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증명은 입증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입증에서는 앞서 기록된 지침들이 적절히 지켜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증명의 경우에는 이러한 절차를 우리는 이용할 수 없습니다. 

   증명에서 우리가 관계하는 것들은 연산 외부에 있는 용어들이며, 그래서 연산 지침들에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와 같은 증명들을 지침에 좌우되는 것들로 만들고자 하는 바에서, 우리가 성공하는 것은, 오직 또 다른 연산을 만들 때 뿐입니다; 그때, 최초 연산은, 또 다른 연산 안쪽에, 요람을 틀고, 우리는, 또 다른 연산 밖에서, 입증이 아닌 증명에 따르는 혹 부합하는 형식들을 재차 볼 것입니다. 

   따라서, 증명의 타당성(validity)은 일련의 지침들이 우리한테 공통으로 제공한 동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태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경험에 있습니다. 통상 이러한 경험은 논리학에서 형식화되었던 추리 능력을 포함하며, 그 능력에 국한되고 않습니다. 수를 함유하든 또는 그렇지 않든 그러한 시스템과 관련한 거의 모든 증명들은 공통된 계산 능력(즉, 어떤 방향으로 셈하는* 능력)과 이 능력에 대한 우리 경험에서 유래한 관념들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왜 정리 증명을  확실성의 정도에서 귀결 입증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는가 하는 의문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얼른 보기에도 답이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경험 개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재연적(再演的) 생활 과정들, 특히, 논증하는 그리고 단위들을 써서 앞으로나 뒤로 세는 과정들을 겪으며, 이를 거쳐, 우리 마음들에서,  증명이 실체를 갖도록 이것을 사용하는 바의 타당성에 대해 상당히 확신하는 경험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증명 절차들은 자체로 아직 연산에서 성문화되지, 즉, 코드(절차 체계)로서 확립되지, 않았기에(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될지라도), 이 단계에서 우리의 확실성은 직관적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따라야만 하는 지침들을 포함한 체계가 낯선 것일지라도, 오직 지침들을 따름으로써만 입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리 증명에서는, 연산 형식  증명 구조를 우리가 아직 성문화하지 않았을지라도, 증명의 기초 또는 기반으로 우리가 여기는 것은, 적어도, 우리한테 익숙한, 또는 우리가 경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증명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입증과 증명 사이 관계를 참작 또는 고찰하는 또 다른 방식은, 증명이 확실성의 정도에서 입증과 같다는 전제에 대한 추가적 뒷받침으로서, 그 관계를 입증 상태에서 증명 상태를 분리하는 경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억기하기로, 입증은 연산 내부에서, 증명은 그 밖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들 사이 경계는 따라서 공유된 경계이며, 우리가 귀결 입증하기에 따르든 정리 증명하기에 따르든, 어느 쪽 방향으로든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결들과 정리들은 서로 들어맞는 관계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관계에 표시되는 경계가, 공유된 것일지라도, (실존하는 경계처럼(124쪽 이하를 보시오)) 한쪽에서만 보이는 까닭은, 입증이 행해지는 기반을 우리가 안다면(즉, 우리가 채택한 초기 방정식들에 대한, 실용적 근거들과는 별개로, 형식적 근거들을 이해한다면, 그래서 그 방정식들을 공리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면), 증명이 입증으로 보이진 않을지라도 그 입증은 함의된 바로서 증명으로 보일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상, 입증이 증명과 맺는 관계는 초기 방정식이 공리와 맺는 관계와 똑같다는 점을 관찰하지만, 관계란 산술에서는 명백한 것이지만 대수로 진입하면 사라져버리는 것이란 점 또한 주목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대수들이 통상 공리들 없이, 적절한 단어들로, 제시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증명이 이미 그와 같이 잠재해 있던 어떤 것을 아주 명백히 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은 수학적 관심사입니다. 주어진 정리에 대한 일정한 수의 별개 증명들이 있다할지라도, 그것들이 모두 발견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하나의 정리를 증명하는 올바른 방식을 우연히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엄청난 수의 잘못된 방식들로 그것을 증명하고자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어떤 것을 찾는 유추조차도 전적으로 합당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우리가 내내 잘 알아차리고 있었을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숨겨진 어떤 것을 찾고 있지 않습니다. 이때 탐색이라는 관념이 도움이 안되며 명백히 방해하기까지 한다는 것은, 탐색들은 일반적으로 이전에 숨겨진 어떤 것을 찾기 위해 조직되는 것이기에, 따라서 견해 또는 조망이 펼쳐질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증명을 발견하는 데에는, 탐색 또는 조사 그 이상의 교묘한 어떤 일이 필요합니다. 이때, 어떤 진술에 대해서든 우리가 정당화하고 싶은 측면에서, 여하튼 사실의 측면에서, 따라서 우리가 이미 쭉 알고 있는 측면에서, 적절성(relevance)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탐색 방식은 알 수 있지만, 반면, 우리가 이미 볼 수 있는 것을 '깨닫고자' 하는 테크닉은 우리의 노력에도 쉬이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때, 논증 과정 따르기와 이에 대한 이해하기 사이 구별을 도입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해하기를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된 것에 대한 경험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리를 더 일반적 정리 속에 담을 수 있을 때까지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정리가 머물 수 있는 더 넓은 의미에서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도, 그것의 증거를 보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의 증명을 따라 쫓을 수 있습니다.

   따르기와 이해하기는, 입증하기와 증명하기처럼, 가끔씩 부당하게 동의어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 증명을 따라 쫓지 못한 것이 틀림없을 때 그때 그 사람은, 너무도 자주, 논증, 과정, 학설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따르는 데 실패한 것이란, 그가 아주 심사숙고하고 있는 것일 수 있으며, 그한테 제시된 것을 이해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더 짧은, 혹은 더 맘에 드는, 경로를 그가 보고 있기에, 아직은 그 전달 방식을 모를지라도, 제시된 것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따르기는 특히 학설과 결합될 수 있으며, 이때 학설은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하는 특정 방식을 고수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해하기 또는 오성은 말해진 또는 행해진 것이 언제나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또는 행해질 수 있다는, 그렇지만 그 모든 방식들은 변함없이 같은 것들이라는, 사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다(count)가 putare = prune(가지 치다), correct(정정하다), (따라서) reckon(합으로 간주하다)에 기초를 두고 있을지라도, 단어 추리하다(reason)는 reri = count(세다), calculate(계산하다), reckon(합으로 간주하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따라서, 증명의 추리하기와 계산하기 활동들은 원래는 하나로 여겨졌던 것들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논증하다(argue)가 arguere = 분명히 하다(clarify)(말 그대로, '맑게 하다(make silver)')에 기반하고 있음에 주목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무리의 단어들이 정돈하는(getting it right) 과정을 감당하는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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