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형식의 법칙들

각 장에 대한 메모들: 노트12

12장 주석

   

   평면 공간에 쓰는 대신, 지구 표면에 쓴다고 상상합시다. 토끼굴들, 등등을 무시하면, 우리는 그것을 종수(genus) 0 의 공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를 쓴다고 가정합시다. 이것을 또 다른 행성에서 읽힐 수 있을 만큼, 크게 쓴다고 합시다. 적도를 도는 외부 둥근 괄호를 그리고, 괄호 와 는 각각 오스트랄리아의 해안선들과 뉴질랜드의 남섬에 해당된다고 합시다.

   이상은 그 표현이 북반구의 어딘가에서, 이를테면, 런던에서 보이게 될 방식입니다. 그러나 여행을 해봅시다. 

   케이프 타운에서 우리는 

                            

 을 봅니다. 멜버른으로 항해하면서, 우리는

                                

 를 보며, 그곳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가면서는

                                  

를 봅니다.

   이들 네 개의 표현들은 구별되며 동등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종수 0인 표면이라도 표현을 적고, 그것이 이해되기를 기대하는 것으로만은 분명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관찰자가 그 표현과 관계해서 서있다고 여겨지는 곳을 지시해야만 합니다. 평면에 쓰는 경우, 모호성(ambiguity)은 우리가 그 표현을 가장 바깥쪽 괄호의 외부에서 보는 경향이 있기에 명백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구 표면에 쓰여지는 경우, 어떤 괄호가 가장 바깥쪽의 것인지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 표현이 의미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관찰자가 그것의 참작을 위해 초청받은 장소를 제시하는 지시자를 추가해야 합니다.

   세 번째 실험에서, 우리는 적절성의 원리를 (여기서는 좀 덜 강력할지라도) 사용하는 대안적 방식을 관찰합니다. 그 원리의 정상적 사용으로, 우리는 추가 표시하기들을 (각각의 모든 상태들은 동일하게 표시되기에) 제거할 수 있으며 한 단계로 유일 원에 도달할 수 있는 반면, 그 실험에서는 표시하기들 사이 일련의 구별을 제거하는 더 약한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그때는 유일 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단순화 과정의 이들 두 방식들은 연산을 위해 채택한 소거와 응축의 방법들과는, 그 방식들이 이것들에서 생겨났고 이것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릅니다. 그 실험에서 우리가 실상 보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수들의 궁극적 환원성과 관계들의 공허함에서 생겨난 형식에서 벗어나고 진입하는 우리의 여행들을 일단의 그 모든 원리들로 우리가 부정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단계에서 이들 원리들에 대한 사용을 포착하고 고정시킴으로써만 우리는 우주를 지속시켜나갈 수 있으며, 그와 같은 우주에 대한 우리 이해는 그것의 현재 현상을 발견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생기게 하기 위해 맨처음 했던 것을 억기하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연산 자체는 직접 회상으로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형식의 중심 상태에서 벗어나, 밖을 향하는 행위 그리고 실존의 지엽적 조건에 가까운 이미지 방식을 그만둘 때, 재현 공간을 통해 우리 여행의 무대를 설정하는 부르기와 가로지르기의 법칙들이 어떻게 익숙한 시간 작용에서 고정된 항성들이 되는가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가 정리들이라 불렀던 것들의 궁극적 보상에 투사된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들은 그것들이 그 배역을 연기하도록(말인즉 그 운명을 버티도록)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 형식으로 진입하면서, 그것들은 모두 정당화되며 소비됩니다. 그것들은 의심되고 있는 한에서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의심될 수 없을 때, 그것들은 폐기될 수 있습니다.

   실존의 전조들에 대한 생각으로 잠깐 돌아가서, 그것들의 형식을, 오늘날 과학에서 실재 또는 현실과 동일시되고 있는 조금 덜 원시적인 구조에 대한 내생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경우, 지금 통상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그것의 바로 현존으로, 표지(token)나 표현들로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추론을 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 게 됩니다. 그리고 표지나 표현들이 (그밖에) 어떤 하위 기층의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 이후로는, 그래서 우주는 그 자체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또 다른 실재 또는 현실의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때 그 세계를 잠깐 동안 물리학자들이 기술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합시다. 그 세계는, 수많은 기본 입자들, <그 자신들의 공간을 통해 쏘아질 경우, 파동들로 나타나는, 그래서 (11장에서처럼), 진주나 양파들 처럼 박편으로 벗겨지는 똑같은 구조를 갖는, 그리고, 오캄의 면도날에 따라, 표준 속도로 공간을 여행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편리한 전자기적이라 불리는 그밖에 파 형식들을 갖는> 수많은 기본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것들의 관계의 형식을 지시하는 일정한 자연 법칙들에 구속되어 나타납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기술하고 있는 물리학자 그 자신은, 그 자신의 설명으로, 그것들로 구성된 그 자신입니다. 요약하면, 그는 자신이 용케 발견하고 기록하였던, 더도덜도 아닌, 그와 같은 일반 법칙들로 그것들에 따라, 그가 기술하는 바로 그 입자들의 응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그 자신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따라서 그 자신을 볼 수 있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기막히게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분명 그것은 우선 그 자신을 잘라 적어도 하나의 보고 있는 상태로 그리고 적어도 또 다른 하나의 보이는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절단된 불구가 된 상태에서, 그것이 보고 있는 것은 오로지 국부적인 그 자신일 뿐입니다. 세계는 의심할 바 없이 그 자신이지만 (즉, 그 자신과 뚜렷히 구별되지 않지만), 그 자신을 대상으로 볼려는 여하한 시도에서든 그것은, 마찬가지로 의심할 바 없이, 그 자신이 자신과 구별되도록, 따라서 자신에 대해 그 자신은 거짓이 되도록 행위(act)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그것은 항장 그 자신을 부분적으로 벗어날 것입니다.

   다음 질문에 대한 받아들일 수 있는 답을 찾는 것은 힘든 것 같습니다: 왜 또는 어떻게, 세계는 그 자신을 보는, 그리고 그 과정을 경험하는 듯하는 그러한 갈망을 착상하며, 그러한 능력을 발견하는 까닭과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이 그렇게 하는 것은 때때로 최초의 신비라 불립니다. 아마도, 우리가 현재 우리 자신들을 실존하는 바로 여기는 형식의 견해에서 보면, 정말 질문할 것이 없는 곳에서 질문을 짜맞추는 우리의 집요함에서 신비는 생겨납니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갈망, 능력, 그리고 용인이 주어질 경우, 여기서 정식화된 법칙들에 따라 절대 불가피한 결과가 나오는 것처럼, 생겨나는 조건 또는 상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적어도 신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대변자들로서, 아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우주 법칙을 기록할  있습니다. 

기타, 등등 당신은 결국 우주를, 당신이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아주 상세히 그리고 가능한 것으로, 구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재차, 당신이 구성할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지금 있는 것에 도달할 즈음, 우주는 그때 있을 것을 포함하는 새로운 질서로 확장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자신의 정보와 관련하여, 우주는 그 자체인 우리가 우주를 포착하고자 들여다보는 망원경들을 벗어나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뱀은 그 자신을 먹습니다; 개는 자신의 꼬리를 쫓아다닙니다.

   따라서 세계가 물리적 우주*로서 나타날 때는 자신과 일종의 숨박꼭질 놀이를 하는 것으로 언제나 그 대표자들로서 우리한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드러난 것은 감춰지겠지만, 감춰진 것은 재차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것을 재현한 이래, 이러한 엄폐는 우리 삶에서 일반적으로 그리고 우리 수학에서 구체적으로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 마지막 장에서 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우리가 우리 과정에서 설정한 두 개의 공리들은 서로 용인되며 동의될 수 있는 것임을 정말이지 우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논증의 일정한 단계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솜씨있게 이러한 지식을 우리 자신들한테 애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때 우리가 재발견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여행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우리 자신들한테, 재차 부여하는 목적을 지닌 일련의 정당화와 증거들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재차 그것과 다시 맞닥뜨리는 경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에 입각해서 볼 때, 우리는 우리 여행이, 비록 그 형식적 과정이, 일단 우리가 그것에 설정하면서, 불가피한 것이었다할지라도, 예측대로, 불필요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 Cf α'γωνιστηυζ = actor, antagonist. 우리는 행위(action)를 고투(agony)와 동의어로 적을 수 있습니다.

unus = one, vertere = turn. 주어진 (포획된) 우주는 한번 회전으로 만들어진 결과로서 보여지는 것이며, 따라서 최초 구별이 나타난 현상이며, 명백한 그리고 애매한 모든 존재들의 단지 부차적 측면일 뿐입니다. 그것의 구체성은 그것의 가시성을 위해 우리가 지불한 대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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