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배우기

'전도몽상(顚倒夢想)'에 대한 바른 이해

산스크리트 단어 분석은 '넘어 간 쪽과 반대되는 상태' 그래서,

한자어, '뒤집어진 잘못된 생각'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나한테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전의 사고 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가리킬 수 없는데 가리킬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상태'다.

 

빤야 전제 1에서 언급한 바처럼, 가리킬 수 없는 바에,

가리킬 수 있는 것을 배치하는 일은

식자가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업보다.

 

유사이래, 인생을 일장춘몽으로 여기는 경우는 불현듯 솟구치지만, 

그 허망함은 견딜 방법을 찾지 못해 다양한 토대 작업은 지속되었다;

여타 문화권에서 신화와 전설들로는 만족하지 못한 가운데

브라만에서 힌두 또는 자이니즘에 이르는 아트만, 지바, 등등;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이데아와 헤겔의 절대 정신, 등등; 그리고

오늘날 현대 철학과 과학에서 여타 이론에 제공되는 실재론적 토대들.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모든 것들,

지각하고,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에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기초가 되는 , 것들은 없다

라고 하는 깨달음, 또는 선언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허망함을 허망함으로 메꾸는 막가파 방식이나

순박한 이들에 영합하는 '전도몽상'과 같은 거짓된 방식이 아닌,

목하에서 대면하고 애쓰고 알아차리고 대처하는 그 순간들로

그 허망함을 견디며, 언급한 양자의 업보들을 씻고,

붓다는 토대 없음에서 최고의 평안과 행복을 얻었다.   

 

비슷하게, 지각이란 매니폴드에 개념을 찍어 나온 결과물이란 칸트의 지적이나,

삐아제의 아이의 시간과 공간 구성과 같이 윗 견해를 지지하는 작업이나,

폰 푀르스터의 신경 신호들의 무차별상태에서 분별이라는 감각구성, 등등과 같은

작업들에서 그들 이론의 기초들은 모두 '허구'들에 기반하고 있다고,

그들 모두는 말하고 있다; 가리킬 수 없는, 그래서 지각물과 비교할 수 없는 '외부 세계'보다

더 그럴듯한 이상의 대안적 허구들은 실재성에서 비롯되는 악패 철폐로 귀결된다.

 

이러함에도, 우리는 

'지각이란  감관을 통해 감각기관 밖, 바깥 세상에 있는 대상을 인지한 결과물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이런 말을 하는 나 또한 통상 윗 허구를 사용하며 산다.

 

또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해서 그것들의 결과물의 유효성은, 말인즉,

지각&지각물, 시공간, 운동, 일반, 추상, 등등과 같은 구성물의 유효성은

실재론의 믿음 강화에 기여하며, 곧바로 실상은 무시되고 가리워진다.

 

하지만, 일상의 상호작용이 차이, 불일치, 불화, 갈등, 등등을 드러내면,

감각, 지각부터 추상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그 개체적 특성이 도드라진다. 

매번의 상호작용에 대해 서로 구체적 대화를 하다보면,

서로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닫는다.

 

지각물,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지각자의 순간, 찰나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그 누구, 다른 그 무엇과도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각이란, 목하 기대하던 신호를 얻는 일 이상이 아니다.

고로, 지각이란 그저 식 또는 지식의 활용,

삐아제식으로 말하자면, 스킴 활동의 한 조각이며,

오온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변전(變轉)의 한 양태다.

 

우리는 같은 세상을 바라보며, 같은 의지나 동기 또는 

관념이나 세계관 또는 종교관을 갖고 살고 있다는, 그래서

서로 전제된 바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고 있다는 착각,

각인의 망상이 바로, 전도몽상, 개꿈이라는 것이다.

 

감각, 지각, 개념들의 차이는 당연 전제되어야 하고,

그것에 그 어떤 우위나 권위 따위는 부여될 수 없다.

단 하나,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가'만이 문제된다.

목표들의 조합, 이것만이 당신과 당신의 파트너가 함께

하는 이유들일 것이다; 그 조합들이 어찌 평가되든.

 

정리하자면,

전도몽상은  목하-분별-작용(삼무빠다)의 과정을

 설명함에서 있어, 즉, 허구를 도입함에 있어,

그 허구에 실재성을 부여하여,

분별의 실체를 허구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허구란 단지 설명을 위한 이론적 기초일 뿐이다. 

 

이를테면, 

삐아제한테, 아이의 지각, 분별에는,

전조작기에는 반사(업식), 게쉬탈트 따위가

조작기 이후에는 개념이 개입된다.

나가르주나한테는

분별, 즉 색은 항상 을 전제로 하고, 

분별의 소멸은 항상 으로 귀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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